주간동아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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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만불의 사나이’ 현실로

인공 아가미-우주 엘리베이터도 등장…연산능력-음악재능 알약 하나로 OK

  • 입력2006-06-09 12: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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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00만불의 사나이’ 현실로
    경고! 과학이 SF(Science Fiction·과학소설)를 집어삼키려 한다.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현실이 소설의 쇠퇴를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다. 21세기로 접어들면서, 실제 과학과 허구인 SF 사이의 경계가 점점 더 희미해지고 있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소프트웨어 로봇을 부려 인터넷에 널린 자료를 찾는다. 여행하는 곳의 정확한 전자지도를 얻기 위해 위성 신호를 조율하는가 하면,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기의 유전병 여부를 탐색한다.

    그러나 이것도 시작에 불과하다. 단지 몇 십년 안에, 우리 지구는 이음매 하나 없이 촘촘하게 이어진 네트워크로 뒤덮일 것이며, 그리하여 마치 전기 플러그를 꽂듯 우리 마음과 인터넷을 접속하게 될 것이다. 원자와 원자를 조합해 새로운 물질을 만드는가 하면, 화성의 기후를 변화시켜 식민지를 건설하고, 소행성을 잡아 원거리 항성의 비밀을 탐사할 것이다.

    SF 작가들이 그리는 미래의 풍경이다. 이들의 예측이나 예언이 늘 맞았던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놀라울 정도의 적중도를 자랑하는 것도 적지 않다. 휴교 젬스백은 1911년 ‘랠프 124 C41+’라는 소설을 통해 오늘날의 레이더와 같은 장치를 상상했다. 아서 C. 클라크는 지구 정지궤도에 자리잡은 통신위성을 묘사했다. 그리고 윌리엄 기브슨은 1984년에 발간된 소설 ‘뉴로맨서’에서 전세계적 디지털 정보의 회로망(매트릭스)인 ‘사이버스페이스’(Cyberspace) 개념을 처음 내놓았다.

    앞으로 또 어떤 새로운 일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미국 미시간대 문학교수이자 SF전문가인 에릭 랩킨이 경제 전문 주간지인 ‘비즈니스위크’와 손잡고 대표적인 SF 작품들을 뒤졌다. 거기에 묘사된 미래사회의 풍경을 훑기 위해서다. 그 중에는 그럴 듯한 것도 있고, 희망찬 것도 있다. 묵시록적이거나 재미있는 예언도 빠지지 않는다.

    개처럼 민감한 청력과 독수리처럼 날카로운 시력을 갖출 수 있는데 지금처럼 열등한 신체로 만족할 이유가 있겠는가. 많은 SF 작가들은 사상 유례없이 강력해진 인간상을 그리고 있다.



    D. G. 컴튼은 ‘잠들지 않는 눈’(1974)에서 몰래카메라의 확장된 형태를 보여준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인공 눈(Artificial Eye)을 갖추고 있는데, 이것이 일종의 무선카메라 구실을 한다. 그의 상관들이 그 눈을 통해, 그가 추적하는 여자의 모습을 살필 수 있는 것이다.

    저명한 SF작가 스타니슬라프 렘이 그린 ‘미래 의회(1)’(1971)에서는 등장인물들이 수학 연산 능력과 음악적 재능을 높이기 위해 알약을 먹으며, 버나드 울프의 소설 ‘림보’(1952)에는 소형 원자력 모터로 작동되는 인공 사지(四肢)가 소개된다. ‘600만달러의 사나이’의 원조인 셈이다. 게다가 이 소설 속의 사회에서는 얼마나 많은 부위를 인공 보철물로 대체했는지가 신분의 높낮이를 가리는 기준이다. 기계(혹은 로봇)에 가까운 신체를 지닌 사람(?)일수록 고위 인사라는 뜻이다.

    그런가 하면 코보 에이브의 소설 ‘제4 간빙기(間氷期)’(1959)는 인공 아가미를 달고 해저 도시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을 그렸으며, 마지 피어시는 인공 자궁에서 회임(懷妊)되는 어린이들을 상상했다(‘시간의 끝에 선 여인(2)’·1976).

    비인간

    로봇-안드로이드-인공지능 같은 ‘비인간’은, 인간보다 월등하거나 열등한, 때로는 흡사한 존재로 그려진다.

    희곡 ‘R.U.R’(1921)에서 ‘로봇’이라는 말을 처음 썼던 카렐 차페크는 1936년작에서도 새로운 단어를 만들었다. 바로 환경 변화에 의해 탄생한 새로운 지적 생명체인 ‘뉴트’(Newt). ‘뉴트들과의 전쟁(3)’은 새로운 차원의 전쟁을 보여준다.

    아이작 아시모프는 ‘나, 로봇(4)’(1950)에서 그 유명한 ‘로봇공학 3원칙’을 처음으로 창안했다.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SF작가로 꼽힐 아시모프는 1992년 타계할 때까지 500편 이상의 작품을 남겼는데, 그 중에서도 로봇을 다룬 소설들은 불멸의 걸작으로 평가된다. 다음은 3원칙의 내용. 제1조, 로봇은 인간에게 해를 끼쳐서는 안되며 위험한 상황에 방치해서도 안된다. 제2조, 로봇은 제1조에 위배되지 않는 한 인간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제3조, 로봇은 제1조와 제2조에 위배되지 않는 한,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

    또다른 SF작가 필립 K. 딕은 ‘안드로이드들은 전자 양(羊)의 꿈을 꿀까?(5)’(1968)에서 인간 행세를 하는 안드로이드를 뒤쫓는 현상금 사냥꾼을 그린다. ‘블레이드 러너(6)‘라는 제목의 영화로도 만들어졌던 그 세계는, 인간과 안드로이드를 분간하기 힘든, 혼돈과 암흑의 세계다.

    영화 ‘스타워즈’에서 레이아 공주는 홀로그램의 형태로 된 형상 메시지를 통해 도움을 요청한다. 윌리엄 기브슨이 ‘뉴로맨서(7)’(1984)에서 묘사한, 홀로그램 대화와 흡사한 형태다.

    모린 맥휴는 거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간다. 인터넷은 급속한 진화를 거듭해 단지 생각만으로도 얼마든지 접속할 수 있는 거대한 무선의 정보제국(Infosphere)이 된다. 맥휴가 ‘차이나 마운틴 장(8)’(1992)에서 그린 미래상이다.

    닐 스티븐슨이 예언한 미래는 광고로 뒤덮인 세계다. 그의 ‘다이아몬드 시대(9)’(1995)는 벽, 책, 심지어 젓가락으로도 전송되는 비디오형 광고를 묘사하고 있다.

    여행

    현대 로켓공학의 가장 큰 숙제 중 하나는 지구의 중력권을 어떻게 하면 벗어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래야 우주여행도 가능할테니까.

    아서 C. 클라크는 ‘낙원의 분수’(1979)에서 그 나름의 해결책을 제시했다. 그것은 적도로부터 3만5000km 높이에 떠 있는 정지궤도 위성까지 우주 엘리베이터를 건설하는 것. 황당하게 들리겠지만 초경도(超硬度)의 탄소 나노튜브를 쓰면 가능하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아시모프와 함께 SF의 한 산맥을 이뤘던 로버트 A. 하인라인은 ‘달은 엄혹한 정부(情婦)(10)’ (1966)에서 지구로부터 달 기지까지 물품을 운송하는 방식으로 자력(磁力) 유도장치를 이용한 발사장치를 고안했다.

    동화 같은 발상도 있다. 매리 도리아 러셀이 ‘참새(11)’(1996)에 등장시킨 우주선은 다름아닌 소행성이다.

    킴 스탠리 로빈슨은 환경 문제를 우주로 확장시킨다. 그의 1993년작 ‘붉은 화성(12)’은 화성을 식민지화하는 데 따른 정치적, 과학적, 공학적 걸림돌들을 그리고 있다. 여기에 등장하는 ‘레즈’(Reds)라는 사회운동가 그룹은 화성의 기후를 변화시키려는 계획을 반대한다.

    맥휴의 SF ‘차이나 마운틴 장’에 소개된 행글라이더들의 경쟁. 행글라이더들은 뉴욕시에 형성된 강철의 계곡 사이사이를 날며 치열한 다툼을 벌인다. 하지만 진짜로 흥미진진한 게임은 무중력 공간에서 벌어진다. 오손 스콧 카드는 무중력 공간을 무대로 경쟁을 펼치는 새로운 차원의 운동선수들을 등장시켰다(‘엔더스 게임(13)’·1977). 벤 보바의 소설 ‘제로 지’(Zero Gee·1972)는 좀더 외설적이다. 무중력 환경과 섹스의 관계를 탐구하고 있기 때문.

    또 셰퍼드 미드는 ‘밀랍 무도회’(The Big Ball of Wax·1954)에서 ‘필리스’(Feelies)라는, ‘온몸형 영화’ 형태를 소개했다. 이것은 관람객의 두뇌에 영화를 투사함으로써 영화 주인공이 느끼는 쾌락을 고스란히 맛볼 수 있도록 고안한 기술이다.

    전쟁

    미래의 전쟁이야말로 SF작가들이 가장 즐겨 상상한 소재다.

    한 전쟁 고아가 전장에서 군인들에게 입양된다. 그런데 그 고아는 놀랍게도 폭탄이었다. 필립 K. 딕의 소설 ‘세컨드 버라이어티(14)’(1953)에 묘사된 내용이다. 그런가 하면 브라이언 앨디스는 ‘머리 위를 맨발로’(1969)에서 향정신성 의약품을 이용해 인명만을 살상하는 전쟁을 묘사한다. 물론 사회기간 시설에는 조금도 피해가 없다.

    스타니슬라프 렘은 ‘전도된 진화’(1986)에서 초소형의 벌레형 무기를 소개했다.

    에이즈, 내성(耐性) 박테리아, 에볼라 바이러스, 광우병…. 대재난의 날은 이미 온 것인지도 모른다. 마이클 크라이튼이 ‘안드로메다 스트레인(15)’(1969)에서 상상한 것처럼 외계로부터 들이닥친 세균이 지구를 위협하는 정도는 아닐지 몰라도 말이다.

    J. G. 밸러드가 상상한 바이러스도 달갑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아마존에서 발원한 바이러스가 인류의 생존을 위협한다. 이 돌연변이 바이러스는 모든 것을 유리로 바꿔 놓는다. 말 그대로 ‘크리스털 세계’ (1966)인 것이다.

    구원

    테크놀로지가 인류에 재앙을 불러올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또한 치유나 구원의 출구로 작용할지도 모른다. 앤 맥캐프리의 ‘노래하는 우주선(16)’(1969)에서 항성간을 여행하는 우주 전함의 핵심 컴퓨터 시스템은 헬바라는 여인의 두뇌를 이식한 것이다. 그녀의 두뇌는 이성적이고 평화지향적이며 합리적이다.

    무엇보다 아름다움에 대한 동경이 있다. 올라프 스테이플던의 ‘스타 메이커’(1937)는 유토피아를 이룩해 가는 마음과 마음간의 심적(心的) 공생을 보여준다. 그 유토피아는 서로에게 관용할 줄 아는 세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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