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21

2016.01.13

와인 for you

‘황소의 피’ 에그리 비커베르

진한 루비빛에 감춰진 헝가리의 자존심

  • 김상미 와인칼럼니스트 sangmi1013@gmail.com

    입력2016-01-12 16:3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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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헝가리에는 ‘황소의 피‘라고 부르는 레드 와인이 있다. 헝가리 말로 에그리 비커베르(Egri Bikavér). 에게르(Eger) 지방에서 만든 황소의 피(Bikavér)라는 뜻이다. 왜 하필 황소의 피일까. 답을 알기 위해선 헝가리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6세기 오스만튀르크가 헝가리를 침략했을 때 일이다. 튀르크군은 1526년 모하치 전투에서 승리한 뒤, 1541년 헝가리 수도였던 부다페스트를 점령하고, 1552년 또다시 그곳에서 동쪽으로 140km 떨어진 에게르성(城)을 침공했다. 8만 명이나 되는 튀르크군에 대항하는 에게르 병사 수는 고작 2000명. 승리는 불가능해 보였다. 성주는 마을 창고를 열어 병사들에게 좋은 음식과 와인을 내줬다. 그들의 사기를 진작하는 데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자 해서였다.
    레드 와인을 들이부은 병사들의 수염과 옷은 붉게 물들었고, 그들은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튀르크군의 공격을 막아냈다. 예상치 못했던 에게르군의 용맹함을 마주하자 튀르크군 사이에선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에게르군이 황소의 피를 마시고 전투에 임했다는 무시무시한 얘기였다. 겁을 먹은 튀르크군은 결국 38일 만에 에게르를 포기한 채 물러났고, 이후 사람들은 에게르의 레드 와인을 황소의 피라는 별칭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에그리 비커베르 와인은 13종의 포도 가운데 최소 3종 이상을 섞어서 만든다. 13종 중에는 커더르커(Kadarka), 케크프런코시(Kékfrankos), 케코포르토(Kékoportó)처럼 동유럽 토착 품종이 있고 카베르네 소비뇽(Cabernet Sauvignon), 메를로(Merlot), 피노 누아르(Pinot Noir), 시라(Syrah)처럼 우리에게 익숙한 품종도 있다. 에그리 비커베르 수페리오르(Superior)는 13종 가운데 5종 이상을 섞어서 만들고 오크통에서 최소 12개월, 병입한 뒤 최소 6개월간 숙성을 거친 뒤 출시한다.
    품종 선택이나 블렌딩 비율이 오롯이 와이너리 재량이다 보니 에그리 비커베르의 맛과 품질은 와이너리마다 차이가 크다. 우리나라에는 최근 투메레르(Thummerer) 와이너리의 에그리 비커베르가 수입되고 있다. 투메레르는 1995년 헝가리 정부가 올해의 와이너리로 선정한 곳으로, 2011년에는 최우수 와인셀러로도 뽑혀 실력을 인정받았다.
    투메레르의 에그리 비커베르는 진한 루비빛에 잘 익은 베리류의 향이 풍부하다. 오크 숙성으로 만들어진 부드러운 타닌과 은은한 나무향이 고급스럽고, 매콤한 향도 살짝 느껴져 우리 음식과도 잘 맞는다. 특히 두툼한 돼지 목살 구이에 곁들이면 더욱 맛있게 즐길 수 있다.
    투메레르는 에그리 비커베르 수페리오르를 수확이 좋은 해에만 생산한다. 가장 최근 빈티지인 2011년산은 오크통에서 18개월을 보낸 뒤 병입된 상태로 또다시 긴 숙성을 거쳤기 때문에 훨씬 더 복합적인 풍미를 자랑한다. 가격은 7만 원대, 숙성 기간을 생각하면 크게 부담스럽지 않다.
    옛 소련 시절 질보다 양을 추구해야 했던 동유럽 나라들이 이제 전통의 맛을 되찾으며 신흥 와인 강국으로 떠오르고 있다. 그들 중 선두 주자가 헝가리다. 늘 마시던 와인 스타일에서 벗어나 새로운 것을 찾는 와인 애호가에게 헝가리 와인은 반가운 존재다. 가격 대비 좋은 품질 덕에 헝가리 와인을 찾는 사람도 많아지는 추세다. 아직 갈 길은 멀지만 헝가리 와인이 황소 같은 기세로 더욱 약진하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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