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245

2020.06.26

진중권, "친문 패거리 대중독재에 맞설 무기는 자유 공화주의" [진중권의 직설④]

  •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

    입력2020-06-23 14:5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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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친문의 사조직으로 퇴락한 국가, 보수는 공화주의와 자유주의로 견제해야

    • 민주당이 내다버린 ‘공정’과 ‘정의’를 어젠다로 취해야

    • 보수도 ‘명예 코드’, ‘모럴 코덱스’ 준비해야

    진중권. [뉴스1]

    진중권. [뉴스1]

    ‘보수’의 정체성을 둘러싸고 논쟁이 붙었다. 좋은 일이다. 대한민국 보수가 최초로 ‘나는 누구인가’를 묻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발단은 김종인 비대위원장의 발언이었다. “앞으로 보수라는 말을 사용하지 말라”고 주문하자, 당에서 반발이 터져 나왔다. 원희룡 제주지사는 “보수의 이름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우리의 유전자”라고 말했다. 박진 의원과 장제원 의원 역시 “보수의 가치”를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의 말을 ‘보수’라는 정체성의 포기로 받아들인 모양이다.

    보수주의 논쟁

    그 후 여러 사람이 자기가 생각하는 ‘보수’의 정의를 제시하고 나섰다. 그것들 중에서 가장 퇴행적인 것은 홍준표 의원에게서 나왔다. “압축 성장기에 있었던 보수 우파 진영의 과(過)만 들춰내는 것이 역사가 아니듯 보수 우파의 공(功)도 제대로 평가받아야 한다.” 이어서 그는 “좌파 2중대 흉내 내기를 개혁으로 포장해서는 좌파 정당의 위성 정당이 될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가 말하는 보수의 정체성은 결국 ‘고도성장에 대한 회고’와 ‘좌파 딱지 붙이기’의 두 요소로 이루어진다. 

    유승민 전 의원의 반응은 그보다는 개혁적이다. 하지만 구체성이 떨어진다. 그는 “한국 보수가 망한다는 것은 무능하고 깨끗하지 못한 진보 세력에 나라 운영의 권한과 책임을 다 넘겨주는 것”이라며 “개혁보수 노선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선언한다. 하지만 아직 유효하다는 그 개혁보수의 노선이 무엇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 역시 보수가 개혁돼야 한다는 당연한 얘기를 하는 수준에 머물 뿐, 앞으로 보수가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지 구체적인 개혁의 청사진을 제시하지는 못한다. 

    진전된 것은 원희룡 지사의 것이다. “대한민국 역사 속에서 담대한 변화를 주도했던 보수의 역동성이 대한민국 현대사의 핵심 동력이고 우리의 정체성이라고 생각한다.” 주목할 것은 그가 보수의 특성으로 ‘변화’와 ‘역동성’을 들었다는 점이다. 실제로 보수가 이 사회의 주류였을 때, 그들은 ‘변화’에 열려 있었고 ‘역동성’을 갖고 있었다. 원희룡 지사는 현재의 관점에서 보아도 여전히 의미가 있는 보수의 역사적 성과를 토대로 보수의 서사를 고쳐 쓰려는 시도를 보여주고 있다. 

    문제는 다음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용병’에 의한 승리가 아니라 바로 우리에 의한 승리, 대한민국의 역사적 담대한 변화를 주도해 왔던 바로 그 보수의 위풍(威風)이 승리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용병’은 김종인 위원장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김 위원장이 “당내에 대권 주자가 없다”고 선언하자, 자신을 잠룡이라 믿어온 이들이 일제히 반발하고 나선 것이다. 보수가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시작한 것은 좋은 일이나, 그 논쟁이 당내 주도권 싸움으로 흐른 것은 다소 유감스럽다.



    보수란 무엇인가

    굳이 ‘보수’라는 말에 집착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다른 나라에서는 ‘보수’니 ‘진보’니 하는 말은 정치학 교과서 밖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독일에서는 기민당이나 사민당, 미국에서는 민주당이나 공화당 등 당명을 쓰지, ‘보수’나 ‘진보’라는 말을 현실정치의 맥락에서 쓰는 예는 거의 없다. ‘보수적’ 정책과 ‘진보적’ 정책 사이의 구별도 점점 흐려지고 있다. 요즘은 보수당에서도 녹색당의 생태주의 담론을 포용하고, 사민당에서도 필요에 따라 시장주의 정책을 갖다 쓰기도 한다. 

    그렇다고 ‘보수’의 이념이 필요 없다는 얘기는 아니다. 한 사람의 정치적 성향이 정책에 대한 견해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정당의 지지자들은 그보다는 그 당이 상징하는 가치, 즉 도덕이나 이념을 보고 지지하는 경우가 많다. 문제는 그 보수의 도덕이나 이념이 이미 낡았다는 것이다. ‘반공’만으로 쉽게 집권하다 보니 그동안 보수의 가치관을 업데이트 하지 못한 것이다. 그동안 보수는 제 정체성을 ‘긍정적’으로가 아니라, 대신 ‘반북’, ‘반공’ 등 부정적 방식으로 규정해 왔다. 

    보수에도 ‘명예 코드’가 필요하다. 즉 자신이 보수임을 자랑스럽게 여기게 해 줄 ‘모럴 코덱스’가 있어야 한다. 서구의 보수는 국가를 위한 희생, 공동체를 위한 헌신, 가족의 가치, 전통문화의 계승 등을 자신들의 명예 코드로 여겨왔다. 영국의 군인묘지에는 ‘Sir’라 새겨져 있다고 한다. 귀족이 조국을 위해 누구보다 희생적으로 싸웠다는 얘기다. 서구의 보수는 이른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의무로 인식해 왔다. 스스로 부과한 이 사회적 의무가 보수의 자존심을 이루어 왔던 것이다. 

    한국의 보수는 어땠는가? 입으로는 안보를 떠들며 몸으로는 병역을 회피해 왔다. 사회적 약자를 돌보는 일 따위는 아예 머리에 들어있지 않다. 가족의 가치는커녕 “대구의 밤문화”나 자랑해 왔다. 독일의 좌파 화가 케테 콜비츠를 끝까지 돌본 것은 어느 보수인사였다. ‘우익’을 자처하는 소설가 김훈은 좌파들이 제 자식 특권이나 지켜주는 동안 산업재해로 목숨을 잃은 노동자들을 위해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런 우익들은 나 같은 좌익을 부끄럽게 만든다. 보수의 모럴 코덱스는 원래 이런 것이다.

    공화주의 이념을 권장함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공화국은 원래 ‘공적 업무’(res publica)라는 뜻을 갖고 있다. 결국 공화국은 무엇보다 공공선을 위한 국가라는 뜻이다. 모든 결정에서 공공선을 세우는 것은 대통령의 헌법적 책무다. 그런데 이 나라에서는 지금 그것이 무너지고 있다. 조국 사태, 윤미향 사태, 그리고 최근 한명숙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은 이 정부가 공공선보다 패거리의 이익에 더 관심이 많음을 보여준다. 이때 공화국은 한갓 ‘사적 업무’(res privata)를 돌보는 조직으로 전락하게 된다. 

    민주주의와 공화주의는 서로 보족적인 관계에 있다. 공화주의가 무너지면 당연히 민주주의도 위험해진다. 민주국가에는 의회의 국정조사, 감사원의 감사, 언론의 비판, 검찰의 수사, 법원의 판단 등 정부를 견제하는 여러 장치가 있다. 권력을 쥔 자들이 공권력을 사익을 추구하는 데에 쓸 경우, 먼저 이들 기관부터 무력화시키기 마련이다. 지금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는 것이 바로 그 일이다. 민주주의를 다수결로만 이해하는 이들이 다수의 힘으로 이 공공선을 무너뜨리고 있다. 

    다음 선거에서 권력을 누가 쥐든지 그는 ‘공정’과 ‘정의’, ‘공공선’의 공화주의적 가치를 되살리는 과제를 갖게 될 것이다. 그것은 친문의 사조직으로 퇴락한 국가를 다시 공화국으로 되돌리는 것을 의미한다. ‘불법만 아니면 모든 것이 용서된다’는 야쿠자 도덕이 이미 집권 여당의 공직윤리 기준으로 자리 잡았다. 견제할 세력이 없으니 폭주는 계속될 것이고, 공정과 정의는 계속 무너져 내릴 것이다. 보수는 민주당이 내다버린 이 공정과 정의를 아젠다로 취해서 프레임으로 활용해야 한다. 

    공화주의는 원래 보수의 이념이다. 3공 시절 보수당은 ‘공화당’이라 불렸다. 하지만 독재정권을 연상시킨다고 생각해서 그랬는지, 그동안 보수에서는 ‘공화주의’를 외면해 왔다. 박정희가 국민연금과 의료보험을 도입했다는 사실은 망각되고, 보수의 이념은 ‘신자유주의+권위주의’로 좁혀졌다. 그 결과 유권자들의 머릿속에 보수당은 오직 ‘기업과 가진 자들만을 위한 정당’이라는 인식이 각인되어 버렸다.

    무너지는 자유주의

    보수에서 되살려내야 할 또 다른 가치는 바로 ‘자유주의’다. 올해 초 교과서에 ‘자유민주주의’에서 ‘자유’를 빼고 그냥 ‘민주주의’로 표기한다고 해서 보수에서 크게 반발한 적이 있다. 다 쓸데없는 논쟁이다. 이제까지 보수가 고집해온 ‘자유’는 자유주의적 가치와는 별로 관계없다. 그 말은 ‘반공’, 혹은 ‘규제완화’의 동의어였기 때문이다. 한국의 보수는 그동안 국가보안법, 사형제 등 정작 자유주의적 권리와 관련된 문제에서 일관되게 반(反)자유주의적 입장을 취해왔다. 이 부분, 반성이 필요하다. 

    ‘자유민주주의’라는 말에서 ‘자유’라는 말을 빼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최근 민주당에서는 자유주의 없는 민주주의를 실천하고 있다. 대자보를 붙인 청년이 처벌받고 기자가 길에서 테러를 당하고, 사실을 보도한 방송이 제재를 받고, 유시민을 비판한 직원이 해고당하고, 조정래를 비판했다고 원고가 잘리고, 윤건영의 의혹을 폭로한 기자가 사표를 냈다. 대통령을 ‘문재인씨’라 불렀다가 개그맨이, 그의 부인을 ‘김정숙씨’라 불렀다가 신문사가 곤욕을 치렀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21세기에 자유주의적 권리의 침해가 버젓이 일어나는 것은, 민주당의 주류인 586세대가 운동권 시절 배운 ‘민중민주주의’의 흔적으로 보인다. 민중민주주의는 개인과 소수의 자유를 고려하지 않는다. 민주당의 586세대는 민주주의를 오직 ‘다수결’로만 이해하는 것으로 보인다. 다수결이 자칫 다수의 폭력으로 흐르지 않게 하는 자유주의적 장치에는 그들은 아무 관심이 없다. 최근 그들의 민주주의가 모든 일을 다수의 힘으로 밀어붙이는 대중독재의 경향을 드러내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 다수결 민주주의가 지금 공화주의와 자유주의를 위협하고 있다. 특히 사회의 중도층은 이 현상을 매우 우려하고 있다. 그들은 공공선의 기준이 무너지고, 개개인의 자유가 위협을 받는 상황을 그저 보고만 있어야 한다는 사실에 좌절하고 있다. 민주당에게 배신당한 이들은 누군가 저들의 폭주에 제동을 걸어주기를 원한다. 그 역할을 이제 보수가 해야 한다. 보수가 공화주의와 자유주의의 가치를 다시 세워 벌써 대중독재의 조짐을 드러내는 저들의 다수결 민주주의를 견제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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