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경계에 선 코로나환자들, “처절한 몸부림에 의사도 눈물 쏟아져”

의료봉사 10일간 목격한 대구 코로나 병동 현장, 친구 어머니의 극적 생존부터 극단적 선택 시도까지.

  • 이진한 동아일보 의학전문기자·의사

    likeday@donga.com

    입력2020-03-20 14:58:48

  • 글자크기 설정 닫기


    3월 5일 오전 대구로 향했다. 대중교통 대신 차를 몰고 달려갔다. 매번 내려가는 고향이지만 이번엔 마음이 무거웠다. 대구에서 2월 18일 이후 폭발적으로 늘어난 코로나19 환자들 때문이다. 의료봉사를 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이 시기였다. 떠나기 전 의사면허를 서울시 의사회에 신고를 한 터였다. 외국에서 아이티라는 나라에 지진 났을 때 종군기자의 마음으로 의료봉사를 간 것보다, 또 최근에 라오스 미타팝병원, 국립아동병원 등에서 의료봉사를 갔을 때보다 더 착잡했다. 도착한 뒤 대구에 계신 어머니에게 잠시 인사했다. 어머니가 걱정할까봐 “오랜만에 볼일 있어서 왔다가 다시 서울 올라가는 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대구에서 의료 봉사는 3월5일부터 14일까지 10일간 진행했다.

    ● 처음으로 레벨D 방호복을 입자 환자들 아우성

    [이진한]

    [이진한]

    기사로만 썼던 방호복. 그걸 계명대 동산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입었다. 병원 의료봉사는 오전 오후 일정이 다르다. 오전에 주로 환자들의 바이러스 검사를 한다. 오후는 병동 회진이다. 그런데 그날 오후에 합류해 병동에 바로 투입됐다. N95 마스크를 착용하고 고글도 썼다. 고글은 얼굴에 자국이 난 정도로 매는 끈을 꽉 조였다. 거기에다 의료용 테이프로 얼굴주변에 붙였다. 최대한 보호하기 위한 것이긴 했지만 테이프는 방호복을 벗을 때 항상 주의 대상이다. 감염 우려가 높은 부분이다. 

    먼저 필자에게 52병동을 맡으라고 했다. 매일 담당하는 병동은 달랐다. 6층, 7층, 8층을 맡기도 했다. 60여명의 환자들이 있었다. 1인실, 2인실, 4인실, 6인실 등 환자들이 들어오는 대로 입원이 되는 상황이었다. 병동엔 간호사들이 3교대로 3명이 근무하고 있었다. 그런데 환자들이 워낙 늘어나 간호 인력은 턱없이 모자랐다. 땀이 나는 방호복을 입은 3명의 간호사는 2시간마다 교대를 했다. 의료진 부족으로 교대를 마친 간호사들은 두 시간을 쉬고 또 다시 투입됐다. 

    병실에 들어가자 환자들이 대부분 침상에 누워 있다가 일어나서 여러 가지 불만 또는 궁금한 것들을 쏟아냈다. 주로 “빨리 나가고 싶다, 감옥 같다”, “언제 나갈 수 있나”, “검사결과를 왜 안 알려주나”였다. 어떤 환자는 “난 음성이 나와서 2차 검사를 앞두고 있는데 일반 환자들이랑 같이 있는 게 괜찮은가”라고 물었다. 의료진은 이따금 “감기처럼 면역이 획득된 것이므로 바이러스가 들어와도 면역세포가 물리치기 때문에 괜찮다”며 안심시켰다. 



    검사결과 등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바로 현장에서 해결하기도 했다. 가끔 양성으로 검사결과가 나오면 환자들이 실망감을 느끼거나 분노를 표출하기도 했다. 심지어 자살까지 시도하는 환자도 있었다. 이 때문에 검사 결과를 바로 알리지 말라고 병원에선 당부를 하기도 한다. 환자들에게 충분한 설명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심리적으로 불안한 환자들을 위해 심리상담 또는 정신상담을 위한 시스템이 필요해 보였다. 

    병동을 돌면서 환자들에게 체크하는 중요한 일은 새로운 증상이 생기는 것을 체크하는 것이다. 즉 열이 나거나 숨쉬기가 힘들거나 등이다. 폐렴으로 진행되는 게 제일 큰 문제이기 때문에 자세히 문진도 해야 했다. 일일이 환자 상태를 적은 종이차트는 병동에 있는 공용 휴대전화로 찍어서 주치의에게 보냈고 자세한 설명도 했다.

    ● 중환자실에서 친구 어머니를 만나다

    [이진한]

    [이진한]

    “진한아 나 성규다. 제발 부탁 하나만 하자.” 대구 친구인 안성규에게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 온 날은 7일. 74세 어머니가 4일 코로나 확진을 받았다는 것이다. 감염 경로는 확인되지 않았다. 4일 입원 때는 걸어서 왔는데 다음 날부터 열이 나면서 폐렴 증상이 심해졌다. 주치의인 박재석 호흡기내과 교수는 상태를 살펴보다가 폐렴이 악화되는 것을 확인하고 중환자실로 올렸다. 숨이 가빠져 산소를 최대로 줬지만 산소 포화도도 88%(95%가 정상수치)를 가리켰다. 폐가 망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가슴 사진에서도 심각한 상황임을 확인했다. 

    박 교수는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큰 아들인 성규에게 전달했다. 급하게 성규는 6일 병원에 찾아가 “엄마 얼굴 한 번만 보고 싶다. 방호복을 입고 들어가면 안 되겠냐”고 애원했지만 다시 발길을 돌려야 했다. 일반인이 방호복을 입어서 들어가면 감염의 우려가 꽤 높아진다. 방호복은 입을 때가 아니라 벗을 때 가장 감염의 우려가 있다. 하지만 의료진이 한 명이 따라 붙어서 도와준다면 감염을 최소화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해봤다. 

    이젠 어머니를 못 볼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것일까. 8일 그는 ‘어머니 정말 꼭 나으셔야 한다’는 내용으로 애틋한 편지를 내게 보냈다. 가족들과 함께 찍은 가족사진들을 포함해서다. 어머니의 손녀와 사위 등의 편지도 포함돼 있었다. 8일 오후 방호복을 입은 뒤 무거운 마음으로 편지와 사진들을 들고 중환자실을 향했다. 중환자 4명이 입원한 이곳엔 간호사들이 가장 고생이 많은 곳이다. 그곳에서 친구 어머니는 ‘섬망’(환각 등 의식장애) 증세가 심해져 혹시나 모를 사고를 막기 위해 손발이 끈으로 고정돼 있었다. 숨을 가쁘게 쉬고 눈을 꼭 감고 있었다. 아들의 편지를 큰 소리로 읽어줬고 사진과 편지를 어머니 손에 쥐어줬다. 그 내용을 들었던 것일까 어머니는 사진과 편지를 손에 꼭 쥔 채 놓지 않았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던가. 9일 어머니는 그 죽음의 문턱까지 갔지만 10일 폐렴이 갑자기 호전되기 시작했다. 폐렴이 심해 양쪽 가슴 사진은 새하얗게 변했지만 지금은 다시 회복돼 폐가 점차 깨끗해지고 있었다. 12일엔 중환자실에서 일반 병동의 4인실로 병실을 옮겼다. 14일엔 산소마스크 대신 ‘콧줄’을 달고 있었다. 산호포화도가 97%로 정상수치였다. 어머니는 기자의 손을 꼭 잡으셨다. 주치의는 “가족의 지지와 본인이 살고자 하는 의지 그리고 의학적인 치료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기적인인 회복을 이룬 것 같다”면서 “1,2주 지나면 거의 회복될 것으로 예상 된다”고 말했다.

    ● 병동 진료보다 힘들었던 환자 이송

    자원봉사 2일째 가장 힘든 일이 주어졌다. 6일 오후 82세 할아버지 상태가 급속히 악화되면서 다른 지역 병원으로 급하게 이송해야 했다. 폐렴에서 악화돼 숨이 점점 차는 환자였는데 치료 받을 중환자실이 대구 경북 지역엔 더 이상 없었다. 전국에 다 연락했지만 어렵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다행히 전북대병원에 자리가 있다고 연락이 왔다. 

    대구동산병원에서 전북대병원까지 182㎞, 응급차로 2시간 반~3시간 거리였다. 원래 중환자 이송은 의료진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일이었다. 답답한 우주복을 입어야 했고 닫힌 좁은 공간에 환자와 함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송 대원들은 휴게실 화장실에도 갔지만 방호복을 입은 상황에서 사람들 눈치 때문에 나가지도 못했다. 더구나 이송하다가 환자가 숨을 쉬지 않는다면 살리기 위한 모든 의료 행위를 해야 한다. 기관 삽관을 해야 되는 상황도 생긴다. 

    그러다가 방호복이 찢어지기도 한다. 2,3시간 내내 긴장을 하면서 숨을 못 쉬어 고통스러워하는 환자를 달래고 용기를 줘야했다. “거의 다 왔습니다. 조금만 참으세요. 대학병원 가면 편안하게 숨 쉴 수 있습니다.” 산소통에 산소량을 매번 확인하면서 환자에게 수 십 차례 이런 말을 반복했다. 내 인생에서 가장 길었던 시간이었다. 산소통도 1시간 반 지나니 거의 없어졌다. 다행히 여분의 산소통이 있어서 재빨리 교체를 했다. 함께 이송을 담당했던 박경식 소화기 내과 교수는 순간순간 아찔한 경험을 해서 마음이 철렁했다고 했다. 무사히 전북대병원에 도착하고 이송을 마쳤다. 돌아오는 길엔 녹초가 됐다.

    [이진한]

    [이진한]

    다음날 아침에도 일어나기 힘들었다. 기쁜 소식이 있다. 16일 전북대병원에 전화를 걸어 환자의 생존 여부를 확인한 결과 다행히 무사하다는 연락을 받았다. 순간 감격에 벅차 내 눈에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지금도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있는 중환자들이 눈에 선하다. 친구 어머니처럼 극적으로 살아나길 바라는 것은 의료인으로서 지나친 욕심일까. 대구 경북의 환자분들에게 희망을 갖고 힘을 내시라고 말하고 싶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