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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중국 건국 70주년 앞두고 혁명 성지 답사 열풍

  • 하종대 동아일보 기자 orionha@donga.com

중국 건국 70주년 앞두고 혁명 성지 답사 열풍

중국 옌안혁명기념관에는 건국 70주년을 맞아 홍색관광 열풍이 불고 있다. [하종대]

중국 옌안혁명기념관에는 건국 70주년을 맞아 홍색관광 열풍이 불고 있다. [하종대]

9월 17일 오전 중국 산시(陝西)성 옌안(延安)시 옌촨(延川)현 원안이(文安驛)진 양자허(梁家河)촌. 시진핑 중국 공산당 총서기이자 국가주석이 문화대혁명 시절 중학교를 마치자마자 시골로 하방돼 동료 지식청년 14명과 함께 7년간 고된 농촌생활을 직접 체험한 곳이다. 

동네에서 4.5km나 떨어진 곳에 안내서비스센터(接對服務中心)가 설치돼 있다. 지난해 새로 확장했다는 안내서비스센터 앞면은 황토고원의 전형적 주거지인 야오둥(窯洞·토굴) 양식이다. 이른 아침부터 중국 각지에서 홍색관광(중국말 홍색여유·紅色旅遊)을 온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홍색관광이란 중국 공산당의 혁명 사적지를 돌아보는 것을 뜻한다. 말이 관광이지 사실상 하나의 단체학습 과정이다. 40명이 단체로 왔다는 산둥(山東)성 성리(勝利)회사 직원들은 모두 항일투쟁 당시 중국 홍군 복장으로 통일했다. 상의에 당원 배지까지 단 사람도 있었다. 올해는 건국 70주년이라 다른 때보다 이런 홍색관광객이 부쩍 늘었다. 

양자허촌은 황토고원에 자리 잡은 산간 오지다. 산시성의 성도 시안(西安)에서 6차선 고속도로를 타고 300km가량 달리면 옌안이 나오고 옌안에서 다시 4차선 고속도로를 70km 가까이 달린 뒤 지방도를 지나야 동네가 나온다. 고속도로는 모두 최근에 개설했거나 확장했다. 양자허 계곡 양쪽은 모두 높은 산이다. 황허(黃河)처럼 지명에 하(河)자가 붙어 있으나 실제로는 폭이 10m도 채 안 되는 개천이다.


시 주석 오지 하방돼 토굴 생활

시 주석이 1969년 1월 23일 하방돼 처음 살았다는 토굴은 소박하기 그지없다. 20㎡ 남짓한 공간에 높이 1m가량의 온돌 침상과 아궁이 1개, 항아리 3~4개, 호롱불 촛대와 침상의 탁자, 그리고 남포등과 라디오 하나가 전부였다. 당시 지식청년들은 동네 밖 소식을 궁금해했고, 라디오로 이를 해결했다. 침상 머리맡엔 ‘류류펀(六六粉)’이라고 적힌 팻말이 놓여 있다. 위생이 좋지 않았던 당시 몸에 기생하는 이와 서캐, 벼룩을 박멸하는 대표적인 약품이었다고 해설원은 설명했다. 

청년 시진핑은 이곳에서 동료 5명과 숙식을 함께 했다. 침상에는 당시 사용했다는 이불이 반듯하게 개켜 있었다. 해설원은 문 입구에서 다섯 번째가 시진핑의 잠자리였다고 설명했다. 이 지역에서는 보통 굴 3개가 한 집이었지만 당시 시골로 내려간 즈칭(知靑·지식청년의 준말로 당시 중국에서는 이렇게 불렀다)은 여러 명이 1개 토굴을 썼다. 



청년 시진핑은 1969년부터 칭화(淸華)대에 합격해 1975년 10월 베이징으로 다시 올라오기까지 3개의 서로 다른 토굴에서 거주했다. 처음엔 6명이 한곳을 썼지만 두 번째는 4명이, 마지막에는 2명이 함께 썼다. 

시진핑은 처음엔 이곳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시중쉰(習仲勳) 국무원 부총리의 아들로 태어나 중국 고위 간부들이 집단 거주하는 중난하이(中南海)에서 자란 시진핑에게는 조와 옥수수 위주의 식사, 불결한 거주환경, 고된 노동 등 산간오지의 생활은 견디기 힘든 고역이었다. 한때 몰래 베이징으로 탈출하기도 했던 그는 “돌아가라. 대중에 의지하지 않으면 내일은 없다”는 외숙의 조언을 듣고 마음을 바꿔먹었다. 

이후 원안이 인민공사 양자허 대대(大隊)에서 말 그대로 현지 농민들과 한 몸처럼 융화했다. 혹시나 이가 옮을까 두려워 농민 가까이에 가는 것조차 꺼려하던 과거의 그에서 완전히 변신한 것이다. 매일 농민들의 어려움을 듣고 함께 해결책을 모색했으며, 어떻게 하면 이곳 농민들이 좀 더 잘살 수 있을까 궁리하느라 머리를 싸맸다. 

1973년 그는 먼저 농민들을 추동해 마을 입구에 깊은 우물을 팠다. 동네 주민들이 하천 가까이에 얕게 우물을 파 쓰는 바람에 폭우가 내리기만 하면 우물이 망가지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시진핑이 팠던 그 우물은 ‘즈칭징’(知靑井·지식청년이 판 우물)으로 명명, 보존돼 있다. 

시진핑은 열심히 일했지만 부친 시중쉰이 마오쩌둥(毛澤東)에게 반혁명분자로 몰려 있는 문화대혁명 시기라 여러 차례 입당이 거절됐다. 하지만 문화대혁명 말기 중앙당이 “부모에게 문제가 있지만 자녀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는 결정을 내리자 옌촨현 당위원회는 그의 평소 행실과 업적을 고려해 토론 끝에 1974년 1월 드디어 입당을 허가했다.


길 넓히고, 우물 파고, 저수지 만들고, 메탄가스 발전까지

국방대 학생들이 홍군사령부가 위치한 왕자핑(王家坪) 팔로군총사령부 유적지에서 안내원의 설명을 듣고 있다. [하종대]

국방대 학생들이 홍군사령부가 위치한 왕자핑(王家坪) 팔로군총사령부 유적지에서 안내원의 설명을 듣고 있다. [하종대]

입당과 동시에 그해 1월 10일 시진핑은 양자허촌 당지부 촌서기로 선출됐다. 이후 그의 업적은 작지 않다. 먼저 그해 8월 촌의 연료 문제를 해결하고자 메탄가스 발전 탱크를 산시성에서 처음으로 만들었다. 그는 후일 ‘런민(人民)일보’ 기사를 보고 이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회고했다. 또 마을에 대장간을 설치하고 농기구를 스스로 제작해 썼으며, 나아가 마을 상점을 열고, 방앗간도 따로 만들었다. 1974년 시작해 이듬해까지 5개의 저수지를 추가로 건설해 작물 재배 면적을 넓혔다. 1975년 6월에는 마을 주민들과 함께 마을에서 원안이진까지 차가 다닐 수 있도록 신작로를 건설했다. 칭화대에 합격해 베이징으로 올라오기 전까지 당지부 촌서기로 재직한 기간이 2년도 채 안 됐지만 그의 정치적 업적은 놀랄 만큼 컸다. 그는 이런 업적을 널리 인정받아 우수 ‘선진 일꾼’에 선발되기도 했다. 

시진핑의 업적은 촌 역사관에 그대로 기록돼 있다. 촌 역사관의 주요 역사 34개 가운데 그와 관련된 내용이 13개나 된다. 그래서인지 그는 양자허를 떠난 뒤에도 양자허에 깊은 관심을 표했다. 푸젠(福建)성 푸저우(福州)시 당서기이던 1993년과 국가주석이던 2015년 두 차례에 걸쳐 양자허를 방문해 당시 농민들과 회포를 풀었다. 농민들이 어려움을 토로할 때마다 편지를 보내 위로하고 관심을 표했으며,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촌에 소학교가 설치된 것도 그가 보낸 출연금 덕분이었다. 2013년에는 100년 만의 대홍수로 상당수 야오둥 가옥이 무너지자 인근에 아예 아파트를 지어 144가구가 이주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이 때문에 당시 양자허에서 시진핑과 함께 생활했던 농민은 찾아보기 힘들다. 어렵게 찾아낸 1951년생 상점 관리인은 “그때 나는 군대에 있어 시진핑을 보지 못했다. 농민들로부터 얘기만 들었다”고 말했다. 양자허촌을 취재하는 동안 혹시나 부정적인 내용이 나올까 싶어 줄줄 따라다니던 공안 경찰관은 “2000년 주룽지(朱鎔基) 총리의 퇴경환림(退耕還林) 정책으로 농경지가 대부분 임야로 바뀌어 당시 시진핑과 함께 농사를 짓던 농민은 현재 양자허에 거의 없다”고 설명했다. 양자허 농민들은 “지금은 과수 농사를 짓거나 도시로 나가 노무 일을 하고 있다”고 그는 전했다. 

옌안이 위치한 산시 북부지역(중국말 산베이· 陝北)은 생존 위기에 몰린 중국 홍군(紅軍)을 살린 혁명 성지(聖地)다. 중국인은 혁명 라오취(老區)라고 부른다. 해발 1000~2000m 산이 줄줄이 이어지는 오지라 과거에는 들어오기도 나가기도 쉽지 않았다. 지금은 고속도로가 모두 뚫려 시안에서 양자허까지 4시간이면 올 수 있지만, 과거에는 산길을 걸어야 했다. 1934년 10월 중국 홍군은 국민당 군의 토벌작전에 몰려 이듬해 10월까지 370일간 380여 차례 전투를 거치며 14개 성에 있는 18개의 높은 산과 24개의 큰 강을 건너 옌안에 도착했다. 

산시성엔 시중쉰의 고향 푸핑(富平)현이 있다. 푸핑은 보통 부귀평안(富貴平安)을 의미한다. 부귀는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정치적으로 지위가 높으며 몸이 건강하고 마음이 편안한 상태를 뜻한다. 하지만 푸핑현의 푸핑(富平)은 또 다른 뜻으로 사용된다. 부서태평(富庶太平)이라는 의미로, 개인적으로 부유한 상태가 아니라 모든 인민이 함께 부유해지고 나라가 안정돼 모두가 편안하게 살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 

일반 농가에서 태어난 시중쉰은 고향 이름처럼 부서태평의 뜻을 품고 일찍이 혁명에 눈을 떴다. 21세 나이에 산간(陝甘·산시성과 간쑤성의 약칭) 변경지역 소비에트 주석에 올라 ‘와와(娃娃·어린아이)주석’으로 불렸다. 그는 중국 혁명 원로 가운데 군중노선을 가장 모범적으로 추구한 혁명가로 추앙받는다. 1959년 국무원 부총리까지 올랐으나 문화대혁명 직전 마오에 의해 반혁명분자로 몰려 16년간 감옥에 갇혔지만, 덩샤오핑(鄧小平)의 부활과 함께 복권돼 광둥(廣東)성 서기로 재직하면서 특구 설치를 처음 주창해 성공으로 이끄는 등 중국 개혁·개방 및 시장경제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시중쉰 생가  ·  묘소 매일 300~400명씩 찾아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부친 시중쉰의 생가를 관람객들이 살펴보고 있다. [하종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부친 시중쉰의 생가를 관람객들이 살펴보고 있다. [하종대]

고향에서 인기가 높은 시중쉰의 생가와 묘소는 푸핑현에 그대로 보존돼 있다. 생가는 이 지역 전통 양식으로 여름 더위를 피하기 위해 북향(北向)인 점이 특징이다. 재밌는 사실은 야오둥이 집 지을 돈이 없는 빈궁한 사람들의 집이 아니라는 점이다. 시중쉰의 부친은 평지에 집을 지었지만 바로 왼쪽에 5m 깊이로 토굴을 만들었다. 강수량이 적은 이곳에서는 토굴이 여름 더위를 피하고, 깊은 우물을 파기 쉬우며, 황토고원에서 날아오는 모래바람을 피하기에도 좋아 평지라도 토굴집을 만들어 산다. 

매일 1000~2000명씩 몰리는 양자허와는 차이가 있지만 시중쉰의 생가와 묘소에도 하루 300~400명의 관람객이 온다고 관리인은 전했다. 특히 건국 70주년인 올해는 관람객이 크게 늘었다고 한다. 

참관을 마친 다음 날 오전 TV를 켜니 중국 CCTV 아침 뉴스 ‘자오원톈샤(朝聞天下)’에 시 주석의 하루 활동 내용이 나온다. 30분간의 뉴스 가운데 23분이 시 주석 얘기다. 과거 후진타오(胡錦濤) 주석 시절 후 주석의 뉴스는 6~8분에 불과했다. 최근 2~3년 사이에 일어난 변화라고 중국 주재 한국인 지인이 전했다. 하지만 한 중국인 농민은 “그래요? 잘 안 봐 몰라요”라며 무관심을 표시했다. 

시 주석 집권 10년째가 되는 2022년 누가 당 총서기로 선출될 것 같으냐고 물으니 중국인 지식인들은 한결같이 시 주석이라고 입을 모은다. 다음 세대로 넘어갈 후계 구도 역시 전혀 형성되지 않은 상태다. 관영매체에 나오는 시 주석에 대한 평가는 덩샤오핑을 넘어 마오쩌둥에 비견된다. 중국몽(中國夢)과 강한 중국(중국말·强起來)을 기치로 14억 중국인을 독려하는 시 주석이 퇴임 이후 이런 평가를 이어갈 수 있을지 자못 궁금하다.






주간동아 2019.09.27 1207호(창간기념호③) (p60~62)

하종대 동아일보 기자 orionh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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