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18

2015.12.23

모란봉악단 55시간 37분 미스터리

북·중 관계 해빙 무드 속 돌발 악재…김정은 방중 불투명

  • 구자룡 동아일보 베이징 특파원 bonhong@donga.com

    입력2015-12-22 14: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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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판 걸그룹’ ‘북한의 소녀시대’ 북한 모란봉악단이 해외에서는 처음으로 12월 12일 중국 베이징(北京) 중심 톈안먼(天安門)광장 옆 국가대극원에서 공연하려 했으나 시작 몇 시간 전 취소되는 ‘사건’이 발생했고, 며칠이 지났음에도 아직까지 정확한 내막이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들은 12일부터 14일까지 공연할 예정이었다.
    12월 12일 오후 7시 반 첫 공연이 예정된 날 정오 무렵, 모란봉악단 여성단원들은 국가대극원에서 약 2km 떨어진 숙소인 민주(民族)호텔에서 간단하게 짐을 꾸리고 나와 공연장이 아닌 서우두(首都)국제공항으로 향했다. 이들은 12시 55분 평양행 고려항공 JS152편을 대기시킨 채 있다 4시 7분 떠났다. 국가대극원 측은 4시 30분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공연 취소 사실을 알렸다. 모란봉악단과 함께 공연을 준비하던 북한 공훈국가합창단도 같은 날 밤 열차 편으로 귀국길에 올랐다.
    모란봉악단이 베이징에 체류한 시간은 55시간 37분(2박3일)이었다. 처음 베이징에 왔을 때 언론의 집중적인 스포트라이트를 받자 일부 단원은 줄곧 밝은 표정으로 기자들에게 “공연을 꼭 보러 오라”고 말하기도 했지만, 돌아갈 때는 굳은 표정이었다.
    이번 공연 티켓은 일반에게는 판매하지 않고 당·정·군의 주요 간부 등 초청자들에게만 배부됐다. 하지만 일부 티켓은 배부받은 사람의 손을 거쳐 일반인에게 암표로 판매돼 1만5000위안(약 270만 원)까지 치솟을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하지만 화려한 등장과 달리 모란봉악단은 러허설만 한 차례 하고 돌아갔다.     

    시진핑 참관 기대했으나…

    이번 공연은 중국 관영 ‘환추(環球)시보’가 12월 11일 사설에서 ‘일반적 예술교류가 아닌 대형 외교활동으로 양측이 선의를 표현하는 특수한 방식’이라고 의미를 부여한 것처럼 북·중 관계 개선을 위한 대형 이벤트였다. 2012년 7월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지시로 창설돼 김정은에게 총애를 받아온 모란봉악단의 이번 베이징 공연은 2013년 2월 북한의 3차 핵실험 이후 경색됐다 올해 누그러지기 시작한 북·중 관계를 개선할 큰 전환점이 될 것이라는 기대가 컸으나 오히려 악재가 됐다.
    돌연한 공연 취소 및 모란봉악단의 철수와 관련해 북한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 중국은 관영 ‘신화통신’이 12일 밤 10시 22분 ‘실무 차원에서 소통의 원인으로 제때 공연이 이뤄지지 못했다. 하지만 중국은 앞으로도 북한과 문화교류를 계속할 것이다’라고 밝힌 것이 전부다. 그러다 보니 다양한 추측과 분석이 나오고 있다.
    한국 국가정보원은 “공연 취소 이유가 김정은에 대한 찬양 일색의 공연 내용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고 국회 정보위원회에 보고했다. 공연을 하루 앞둔 12월 11일 오후 모란봉악단의 리허설에서 김정은에 대한 숭배로 일관된 공연 내용을 확인한 중국 측이 관람자의 격을 낮춰 차관급인 문화부 부부장이 참석하겠다고 하자 북측이 “그러면 안 한다”고 반발해 철수했다는 것이다. 북한은 ‘국보급 공연단’을 보낸 만큼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이나 리커창(李克强) 총리까지도 참관을 기대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북 전문 인터넷 라디오방송 ‘자유북한방송’은 베이징의 대북 소식통을 인용해 ‘공연 내용에 대한 북·중 간 갈등’과 관련해 좀 더 구체적인 내용을 전했다. 모란봉악단의 리허설을 보고 나서야 공연의 핵심 내용을 파악한 중국 관계자들이 “예술에 사상을 섞으면 안 된다”며 공연에서 ‘죽어도 혁명정신 버리지 말자’ ‘우리는 누구도 두렵지 않아’ 같은 내용을 빼달라고 요구했다는 것이다. 모란봉악단 공연 중 미사일 발사 장면 영상 등이 배경으로 나오는 것도 문제가 됐다. 하지만 현송월 단장 등 모란봉악단 관계자들은 “우리 공연은 원수님께서 직접 봐주시고, 지도해주신 작품이기 때문에 점 하나, 토 하나 뺄 수 없고 빼서도 안 된다”고 맞받았다.
    어떤 내용이기에 양측이 이처럼 민감한 반응을 보인 걸까. 리허설에서 나온 노래 가운데 하나로 알려진 ‘자나 깨나 원수님 생각’은 제목부터 김정은과 북한 체제를 찬양하고 있으며 가사 전체가 김정은 1인 숭배 일색이다. ‘자나 깨나 원수님 생각 자나 깨나 원수님 생각’을 후렴구로 반복하면서 ‘천만 자식 꿈과 이상 모두 안아 꽃 피워주는 그의 품은 우리의 집 인민의 정든 요람’ 등으로 표현하며 찬양으로 일관하고 있다. ‘타오르라 우등불’은 ‘장군님 그리움에 불타는 불길 당중앙 따라서 위훈 떨친다’ 같은 구절이 3절까지 반복된다.
    중국이 공연을 참관하는 주요 인사의 ‘격’을 낮춘 것이 공연을 갑작스럽게 취소한 요인이 된 것은 맞지만, 중국이 격을 낮춘 이유에 대해서는 다른 해석도 있다. 이른바 김정은의 ‘수소 폭탄’ 발언이다. 12월 10일 조선중앙통신에 따르면 김정은은 평양 평천혁명사적지를 시찰하며 “우리 조국은 자위의 핵탄, 수소탄(수소폭탄)의 폭음을 울릴 수 있는 핵보유국”이라고 말했다. 화춘잉(華春瑩)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이날 오후 정례브리핑에서 “관련국은 정세 완화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기 바란다”고 비판했다.

    중국은 ‘모란봉’ 관련 언론보도 통제

    모란봉악단 55시간 37분 미스터리

    4월 평양에서 공연하는 모란봉악단. 김정은의 웃는 사진이 무대 배경을 장식하고 있다. 사진 출처 · 조선중앙TV 화면 캡처

    중국 측이 김정은의 발언에 대해 한반도 비핵화와 북한 핵개발 반대라는 원칙에 어긋난다 보고 이의를 제기했다는 것이다. 김정은의 발언에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으면 마치 북한이 자신들의 발언에 대해 중국이 동의한다는 잘못된 메시지를 줄 수도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이번 공연을 주도한 중국공산당 대외연락부(중련부)는 인터넷 홈페이지에서 쑹타오(宋濤) 중련부장이 12월 10일 모란봉악단을 이끌고 베이징을 방문했던 최휘 북한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선전부 제1부부장과 악수하는 사진과 이번 공연의 의미 등을 담은 내용을 삭제했다. 공연 취소에 대한 중국의 우회적인 불만 표시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모란봉악단이 베이징에 도착한 뒤 현송월 단장이 김정은의 옛 애인이라는 기사가 자꾸 나오자 김정은이 격분해 “돌아오라”고 했다는 설도 있지만 설득력이 약하다. 심지어 모란봉악단 단원 가운데 2명이 탈북을 기도해 베이징 한국영사관으로 들어와 공연이 취소됐다는 황당한 얘기도 나왔다.
    북·중 관계 해빙의 상징적 이벤트로 평가되며 큰 관심을 불러 모았던 모란봉악단의 베이징 공연이 갑작스럽게 취소되면서 향후 북·중 관계에도 악재로 작용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아울러 집권 3년이 지나도록 성사되지 못한 김정은의 방중도 상당 기간 어렵게 됐다는 관측이 나온다.
    모란봉악단의 공연 취소와 관련해 중국에서는 언론보도가 일체 통제되는 것은 물론, 중국의 대표 인터넷 포털사이트 바이두(百度)에서는 아예 ‘모란봉’을 치면 기사 제목만 보이고 내용은 열리지 않는다. 중국판 트위터인 웨이보(微博)에서는 ‘모란봉’이나 ‘모란봉 취소’ 등이 금지어로 지정돼 검색어를 치면 ‘관련 법률에 따라 검색을 제한한다’는 안내메시지가 나온다. 중국 인터넷에서 검색이 차단된 단어는 ‘파룬궁’ ‘달라이라마’ ‘대만 독립’ ‘신장 독립’ 같은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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