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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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의 ‘4분 33초’

지리산 화엄음악제에서 엿본 열반

  • 김작가 대중음악평론가 noisepop@daum.net

    입력2015-10-19 13:5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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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의 ‘4분 33초’
    국보 제67호 각황전 앞에 선 무대를 보는 순간, 야니의 타지마할 라이브를 체험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지리산 자락에 위치한 천년고찰 화엄사에서 열린 ‘2015 화엄음악제’의 무대였다. 누가 나오는지도 몰랐다. 확인했던들 모르는 이름이 태반이었을 것이다. 나의 조예가 얕디얕은 클래식과 현대음악 위주의 라인업이었다. 크로스오버 국악으로 화제를 모았던 정재일과 한승석 중앙대 교수의 ‘바리’ 공연이 아는 이름의 전부였다.

    10월 10일 6시부터 3시간가량 진행된 화엄음악제에 가게 된 건 얼마 전 술자리 때문이었다. 음악 담당 기자들과 만났다. 주말에 있을 공연들에 대해 이야기하던 중 누군가 이 공연에 간다고 했다. 농담 삼아 거길 가면 ‘힙력’이 증가할 것 같다고 했다. 농담이 이어지다 보니 왠지 안 가면 안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힙왕’이 되기 위해서라도 꼭 가야 할 듯싶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은 이렇다. 공연이란 언제 어디서 하느냐에 따라 그 성격이 완연히 달라지는 법이다. 한여름 진흙밭에서 열리는 재즈페스티벌을 상상할 수 있나. 혹한의 벌판에서 록페스티벌이 열린다면? 가을 한복판의 지리산, 그것도 오래된 절에서 현대음악과 크로스오버 음악을 접할 수 있다니. 음악팬으로서 내심 당기지 않는다면 새로운 것에 대한 욕망이 소진됐다는 증거다.

    대학 1학년 때, 그러니까 1993년 친구들과 야심차게 천왕봉 정복을 꿈꿨다 실패한 후 처음 가보는 지리산이었다. 20여 년 전에는 경치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는데 나이가 들어 다시 찾으니 과연 명산의 자태가 있었다. 아직 단풍이 완연하진 않았지만 멀리 고산이 붉었다. 화엄사 앞 단풍들 가운데 몇몇 성질 급한 놈이 보였다.

    오후 6시가 됐다. 열두 번의 타종과 함께 공연이 시작됐다. 타종을 배경으로 일본 타악의 거장 다카다 미도리의 징소리가 끼어들었다. 그리고 각황전에서 법복을 차려입은 화엄사 스님 수십 명이 계단을 내려와 객석으로 향했다. 차갑게 깔리기 시작한 산 공기, 급격히 저무는 해와 어우러지는 소리, 움직임은 숨이 막힐 만큼 장엄했다. 준비된 좌석보다 많은 관객이 찾았기에 앉을 수 있는 곳 어디에나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 누구도 작은 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그동안 본 어떤 공연보다 최고 오프닝이라 할 만했다.



    본격적인 첫 무대는 현대음악 피아니스트 토머스 슐츠가 맡았다. 그는 존 케이지 곡을 연주했다. 첫 곡 ‘Landscape’에 이어 고른 곡은 바로 ‘4분 33초’. 현대음악에 아무리 문외한일지라도 이 작품은 알 것이다. 악보에 무음을 뜻하는 라틴어 ‘TACET’가 쓰인 게 전부인, 침묵의 음악 말이다. 말로만 들었지 실제 수행되는 건 처음 봤다. 그것도 고찰에서 만나는 ‘4분 33초’. 슐츠는 진지하게 피아노 앞에 앉아 있었다.

    산의 새소리와 계곡 물소리, 나무 사이 바람소리와 객석에서 들리는 숨소리가 소리의 전부였다. 신비한 경험이었다. 평소 정적과는 다른, 무대 위에 누군가가 있기 때문에 더욱 집중되는 침묵의 시간. 영성음악제를 표방하는 화엄음악제에 걸맞은 수행과도 같은 곡이었다. 나는 살짝 졸았는데, 수행의 부족함 때문이었으리라. 그 외에도 많은 음악가가 무대에 올랐다. 공연 마지막을 장식한 미국의 현대음악 트리오 에비안의 공연(사진)에 맞춰 각황전 표면에 3D(3차원) 영상이 입혀질 때는 열반의 경지에 한 발짝 다가서는 듯했다.

    공연이 끝나자마자 비가 쏟아졌다. 전남 구례 읍내로 나갔다. 추적추적 내리는 빗소리를 배경 삼아 돼지 냄새가 잔뜩 나는 피순대와 암뽕(돼지자궁)을 먹었다. 잎새주 몇 병을 순식간에 비웠다. 20여 년 전 함께 지리산을 찾았던 친구들이 생각났다. 내년에는 그들을 꾀어 같이 오고 싶었다. 어른들을 위한 음악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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