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154

2018.09.05

정민아의 시네똑똑

딜레마에 빠진 이들의 비통함과 남겨진 삶의 문제

신동석 감독의 ‘살아남은 아이’

  • 입력2018-09-04 11: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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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제공 · 아토ATO]

    [사진 제공 · 아토ATO]

    내 자식의 희생으로 살아남은 아이가 있다. 그 아이를 보는 부모의 심정에 대해 상상해본다. 아버지는 아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게 하려고 아들의 의사자 지정에 열과 성을 다하고, 보상금을 전액 기부한다. 어머니는 좀 다르다. 그녀는 어디서건, 어느 순간에건 늘 아들을 그리워한다. 남은 삶을 어쩔 수 없이 살아야 하는 생명체의 미천한 속성 때문에 늘 아파한다. 그런 부모가 아들이 구한 친구를 대면하게 된다. 그리하여 아빠, 엄마, 아들의 친구 등 세 사람 사이에는 복잡한 감정적 관계가 형성되고, 운명처럼 이들은 서로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 

    영화 ‘살아남은 아이’는 놀라운 데뷔작으로 남을 것이다. 신동석 감독이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한 이 작품은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처음 소개됐고, 베를린국제영화제 포럼 부문 공식 초청에 이어 우디네 극동영화제 최우수 데뷔영화상을 수상하는 저력을 보였다. ‘죽음’이란 삶에서 누구나 겪는 일이고 살아남은 자가 어떻게 죽은 이를 애도하는지가 문제임을 이야기에 세밀하게 녹여냈기 때문이다. 


    죽음 위에 삶을 도배하듯

    [사진 제공 · 아토ATO]

    [사진 제공 · 아토ATO]

    인테리어 가게를 운영하는 성철(최무성 분)과 미숙(김여진 분)은 6개월 전 고등학생인 아들 은찬을 잃었다. 하나뿐인 소중한 자식 은찬은 친구 기현(성유빈 분)을 구하고 숨졌다. 성철은 은찬이 죽은 뒤 학교를 그만두고 돈벌이에 나선 기현이 안타까워 자신의 인테리어 기술을 가르쳐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반면 미숙은 그런 기현을 마주하는 것이 고통스럽다. 부모 없이 홀로 살아가는 기현이 죽은 친구의 부모가 처한 고통을 못 느낄 정도로 세상에 심드렁하면서도 성철의 호의를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미래도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노동하는 재미를 느껴갈 즈음이다. 그러자 문제가 생긴다. 성철, 미숙과 친밀한 감정적 교류가 이뤄지자 기현의 내면에 숨어 있던 죄책감이 솟아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죄책감은 고백으로 이어지고, 고백은 진실에 대한 열망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아이 잃은 부모에게는 다시 피 말리는 전쟁이 시작된다. 

    단순한 이야기 같지만, 세 사람을 축으로 한 인물들의 입체적 감정 변화, 그리고 진실을 둘러싸고 뒤바뀐 올바름의 문제가 역동적으로 전개된다. 



    우리가 수많은 사회적 죽음을 보고 경험한 사례가 영화에 펼쳐진다. 진실이라는 판도라의 상자는 유가족에게 더 큰 상처가 될지도 모른다. 현장에 있었던 은찬의 친구들과 그 부모들, 학교 교사들은 살아 있는 사람이라도 평화롭게 살기를 바라며 성철과 미숙에게 야멸차게 군다. 기현도 뒤늦게 알아가던 살뜰한 가족의 정을 포기해야 할 것이다. 진실을 대면한다는 것은 큰 용기를 필요로 한다.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살아 있는 자들은 지독히도 강해야 견딜 수 있는, 이 엄청난 현실의 버거움을 영화는 전한다. 

    성철과 기현이 행하는, 낡은 벽지를 뜯은 자리에 새 벽지를 들뜨지 않게 발라야 하는 도배 일은 누군가의 죽음과 남겨진 삶이 중첩된 우리네 인생을 닮았다. 이런 이유로,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며 미래 없이 살아가던 기현이 성철을 따라 도배 일을 배운다는 설정은 서사와 주제 속에 매우 영리하게 배치됐다. 

    말이 많지 않은 영화다. 느리고 진중한 이야기 전개가 영화를 더욱 무겁게 한다고 느낄 수도 있다. 한 많은 인물들은 자기 감정을 잘 이야기하지 않고, 과거를 떠올리지도 않는다. 흔한 플래시백 기법이나 대화 장면을 사용해 기현이 왜 저렇게 불우한 환경에서 지내며, 성철 부부가 얼마나 고통 속에 몸부림치는지를 직설적으로 알려주지 않는다. 카메라는 인물의 떨리는 뒷모습을 따라가거나 실루엣으로 처리된 옆모습을 희미하게 비추며 감정을 우회적으로 담아낸다. 그만큼 관객에게 생각의 자리를 남겨줘 더욱 큰 공감을 이끈다. 인물들이 눈물을 줄줄 흘리거나, 비통함에 차 고함을 지르거나, 한숨과 낙담으로 일관하지 않아도 일상을 살아가는 그들의 깊은 슬픔이 절절하게 표면으로 배어 나온다. 

    에너지 넘치면서도 진중한 연출력이 빛을 발한다. 최무성, 김여진, 성유빈 세 배우의 연기 앙상블을 지켜보며 새삼 캐스팅에도 감탄하게 된다. 거대한 사건으로 점철된 영화가 아니라, 미세하게 변화해가는 감정의 결을 쌓아나가면서 정서적 파고를 일구는 영화다. 현실을 충실히 반영한 리얼리즘 영화지만 감정적 스릴러라고 느낄 정도로 영화적 재미가 뛰어나다.

    정의로울 것인가, 진실할 것인가

    많은 이가 아들을 죽인 소년범과 죽은 아들의 아버지와 관계를 보여준 벨기에 출신 다르덴 형제의 ‘아들’(2004)을 떠올릴 것이다. 시차가 있고 인종도 다르지만 ‘아들’과 ‘살아남은 아이’의 설정, 인물, 배경이 비슷한 측면은 분명 있다. 그 밖에도 용서와 애도에 대한 영화인 이창동의 ‘밀양’(2007)도 떠오른다. 하지만 이들 영화와 달리 ‘살아남은 아이’가 가진 독특한 세계와 메시지가 있다. 세월호 참사로 우리 모두가 겪은 죽음에 대한 집단적 트라우마와 애도의 문제다. 영화는 죽음 이후 살아 있는 자들이 그 죽음을 어떻게 바라보고 애도하는지에 집중한다. 

    윤리적 선택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개인의 고통은 어떻게 하는가, 법이 이들을 달래주지 않을 때 개인의 원통함은 어떻게 해소해야 하는가, 정의로운 이름으로 남을 것인가 혹은 진실을 파헤칠 것인가 등 수많은 문젯거리를 던지는 영화다. 그러므로 폭발적인 마지막 장면을 본 관객이라면 쉽사리 이 영화를 잊기 힘들 터다. 

    반성하고 성찰하며 담론을 만들어가는 영화는 많지 않다. 그러는 와중에 ‘살아남은 아이’가 가진 많은 사회적 메시지가 울림을 준다.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되 쉽게 이후의 삶과 현실을 이야기해서는 안 될 것이다. 충분히 애도하고, 충분히 연민할 때 삶은 다시 시작될 수 있다. 영화는 절망 이후 피어나는 희망이 있으며, 사람이 희망임을 말한다. 그래서 슬픔 뒤에 슬며시 미소가 지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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