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95

2015.07.06

백인 우월주의 상징 남부연합기 퇴출되나

미국 흑인교회 총기난사가 기폭제… 대선 이슈로 급부상

  • 이장훈 국제문제 애널리스트 truth21c@empas.com

    입력2015-07-06 13: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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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사회가 흑인교회 총기 난사 사건에 상당한 충격을 받은 가운데, 흑백 인종차별의 상징이라는 말을 들어온 ‘남부연합기(Confederate Flag)’에 대한 퇴출운동이 본격화되고 있다. 6월 17일 남부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찰스턴에 있는 이매뉴얼 아프리칸 감리교회에서 백인 우월주의자인 딜런 루프(21)가 권총을 마구 쏘아 9명이 숨졌다. 사망자는 모두 흑인으로, 이 교회를 운영해온 클레멘타 핑크니 목사를 포함해 여성 6명과 남성 3명이다. 87세 할머니도 포함됐다. 올해에만 마약과 무단침입으로 2차례 기소됐던 루프는 고교 1학년을 중퇴하고 현재 직업이 없으며 친구도 별로 없는 전형적인 ‘외톨이’다.

    범행 장소인 이매뉴얼 아프리칸 감리교회는 미국 남부에서 가장 오래된 흑인교회 가운데 하나로, 1816년 해방노예 출신인 덴마크 베시 등이 설립했으며, 흑인 민권운동 당시 중요한 구실을 했다. 흑인 민권운동가인 마틴 루서 킹 목사가 1962년 이 교회에서 연설하기도 했다. 찰스턴은 과거 흑인 노예시장이 번성했던 항구도시로, 아프리카 일대에서 잡혀온 흑인 노예들이 미국에 제일 먼저 도착하는 기착지였다. 1861년 남북전쟁의 시초가 됐던 섬터 요새 전투가 발발한 곳이자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무대로도 유명하다.

    깃발, 동상, 공원이름까지

    수사당국이 조사한 결과 루프는 이번 범행을 상당히 계획적으로 저지른 것으로 드러났다. 목격자들에 따르면 루프는 총을 쏘면서 “당신들은 우리 여성들을 성폭행했고 우리나라를 차지했다. 당신들은 이 나라에서 떠나야 한다. 나는 흑인에게 총을 쏘러 왔다”고 외쳤다. 루프는 범행 동기에 대해 “총격을 통해 인종전쟁을 시작하기 위해서”라고 자백했다.

    수사당국은 루프가 만든 ‘마지막 로디지아인’이라는 이름의 인터넷 웹사이트도 찾아냈다. 웹사이트에는 백인 우월주의를 조장하는 ‘선언문’ 성격의 2500단어 분량 글이 올라와 있다. ‘로디지아’는 아프리카 짐바브웨 일부 지역에서 소수 백인이 일방적으로 독립을 선언할 때 사용했던 국가 이름이다. 이들은 당시 백인 우월주의자들을 용병으로 고용해 흑인들을 무자비하게 살해한 바 있다.



    문서에는 주로 흑인을 비하하거나, 백인들이 겁을 먹고 싸우지 않는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트레이번 마틴 피살 사건이 나를 일깨웠다’ ‘지머먼이 옳았다’ 등의 문장도 있다. 플로리다 주에서 자경단원으로 일하던 조지 지머먼은 2012년 2월 플로리다 샌퍼드에서 당시 17세였던 비무장 흑인 청년 트레이번 마틴과 다투던 중 마틴에게 총격을 가해 숨지게 한 인물이다.

    미국 국민을 충격으로 몰아넣은 것은 문제의 웹사이트에서 루프가 성조기를 불태우거나 총을 든 사진들도 발견됐다는 사실. 남부연합기는 남북전쟁 당시 노예제를 인정했던 남부연합의 공식 깃발이다. 붉은 바탕에 푸른 띠를 대각선으로 교차하고 13개의 흰 별을 그려 넣은 모양으로, 지금도 남부 지역 일부 주민이 ‘역사적 정체성’의 상징으로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백인 우월주의자를 비롯해 인종주의 단체들도 이 깃발을 상징으로 삼고 있어 말썽을 빚어왔고, 흑인에게는 인종차별을 의미하게 됐다.

    루프는 자동차에도 남부연합기가 새겨진 번호판을 달고 다니는 등 자신이 백인 우월주의자라는 점을 공공연히 과시해왔다. 그가 유서 깊은 흑인교회를 범행 장소로, 이 교회 담임목사와 신자를 범행 대상으로 선택한 것은 자신의 잘못된 신념을 합리화하려는 의도라고 볼 수 있다.

    찰스턴이 속한 사우스캐롤라이나를 비롯해 앨라배마, 조지아 등 남부 주들에서는 아직도 흑백 인종갈등이 자주 벌어진다. 특히 지난해 8월 미주리 주 퍼거슨 시에서 백인 경찰이 비무장 흑인을 권총으로 살해한 사건을 비롯해, 최근 들어 흑백 인종갈등을 증폭하는 사건이 계속 발생해왔다. 아이러니하게도 흑인 최초로 미국 대통령이 된 버락 오바마가 취임한 이후 인종갈등 사건이 오히려 늘어나고 있다.

    이 때문에 미국 전역에서는 유사한 사건이 재발하지 않도록 남부연합기를 퇴출하자는 운동이 확산되고 있다. 최대 유통업체 월마트를 필두로 아마존, 이베이, 구글, 타깃, 시어스 등 온·오프라인 유통업체가 줄줄이 남부연합기 상품에 대한 판매 중단을 선언했고, 깃발 제작사들도 제작 중단 방침을 밝혔다.

    이번 운동에는 니키 헤일리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지사가 앞장서고 있다. 공화당 소속인 헤일리 주지사는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첫 여성이자 첫 소수인종 출신 주지사다. 로버트 벤틀리 앨라배마 주지사도 주의사당 앞 남부연합기념비에 걸린 연합기를 떼도록 행정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핑크니 목사 장례식에 참석한 오바마 대통령 역시 추도사에서 “미국은 아직 인종차별의 역사를 극복하지 못했다”며 남부연합기 퇴출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공화당의 계산, 민주당의 속내

    남부연합기 퇴출 운동은 단순히 깃발을 내리는 데서 그치지 않고 ‘문화 청산(Cultural Cleansing)’ 운동으로 확산하고 있다. 남부의 여러 주정부는 역사공원과 기념비, 학교 등에 남아 있는 남부연합 출신 영웅들의 이름이나 관련 상징물을 제거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찰스턴에서는 강력한 노예제 옹호자였던 정치인 존 칼훈(1782~1850)의 동상이 훼손됐다. 텍사스 주에서는 텍사스대에 있는 남부연합 대통령 제퍼슨 데이비스의 동상 철거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메릴랜드 주 볼티모어 지방의원들은 로버트 리 남부연합 장군의 이름을 딴 공원 이름을 바꿀 것을 요구하고 있다.

    반면 남부 지역의 일부 백인은 이러한 운동에 격렬히 반발하고 있다. 남북전쟁에 참전한 이들의 자손들로 구성된 단체 ‘남부연합 전사들의 후예’는 “남부연합기 퇴출은 우리 선조를 모욕하고 비하하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흑백 인종차별과 남부연합기 퇴출 문제는 내년 미국 대통령선거(대선)에서도 쟁점으로 부상할 게 분명하다. 공화당 대선후보들은 이 문제에 대해 가능한 한 언급을 피하고 있다. 공화당 핵심 지지층인 남부 백인 유권자들을 의식하기 때문. 젭 부시 전 플로리다 주지사는 흑백 인종차별을 비판하면서도 남부연합기를 퇴출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테드 크루즈(텍사스 주) 상원의원은 “깃발에서 인종차별과 노예제가 아닌 조상의 희생과 남부 주의 전통을 기억하려는 이들도 있다”고 강조했다.

    반면 민주당 유력 대선후보인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부 장관은 가장 적극적으로 이 문제를 이슈화하고 있다. 그는 “흑백 인종차별을 없애기 위해 법과 제도를 정비해야 한다”면서 “남부연합기도 퇴출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흑인 유권자들이 전통적으로 민주당 후보를 선호해왔다는 점을 고려한 행보다. 인종차별 문제가 여전히 미국의 최대 골칫거리라는 점이 선거 과정과 맞물리면서 다시 한 번 입증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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