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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화의 밥꽃, 목숨꽃 사랑 ⑦

무수한 수꽃들의 지극한 사랑

‘꽃산’ 이룬 밤꽃

무수한 수꽃들의 지극한 사랑

무수한 수꽃들의 지극한 사랑
무수한 수꽃들의 지극한 사랑

밤나무 수꽃이 피기 시작했다(위). 마을을 지켜보는 밤나무에 꽃이 피어 있다.

“흠! 흠! 이게 뭔 냄새지? 어디서 나는 거야?”

6월 접어들면서 시골에서 맡게 되는 묘한 냄새. 바로 밤꽃 냄새다. 밤꽃은 겉보기에는 수수하다. 하얀 꽃이 실처럼 가늘게 필 뿐이다. 하지만 냄새는 강렬하면서도 묘하다. 말로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릿한 듯한, 역겨운 듯한 냄새. 한마디로 남자 정액 냄새와 비슷하다. 그래서 예로부터 ‘6월 밤나무골 과부 몸부림치듯 한다’는 말이 전해온다. 실제 밤꽃에서 나는 냄새의 성분을 분석해보니 정액과 거의 비슷하다고 한다.

밤꽃은 바람을 이용한 풍매화이면서도 곤충을 매개로 한 수분도 기꺼이 받아들인다. 밤꽃에는 꿀과 꽃가루가 많은 데다 냄새도 강렬해 벌은 물론 풍뎅이, 나비, 개미, 파리가 꼬이고 심지어 깜깜한 밤에는 나방까지 날아든다.

나무 전체가 한 송이 꽃 같아

밤꽃을 가까이서 보자. 수꽃과 암꽃이 따로 피는 데 얼핏 봐선 구분이 쉽지 않다. 야시시한 냄새를 풍기는 하얀 꼬리 모양의 꽃이 수꽃. 5월 말쯤 새 가지 잎겨드랑이에서 수꽃 이삭이 먼저 나온다. 이삭마다 뽀글뽀글 물방울처럼 생긴 꽃봉오리에서 수술이 터져 나온다. 실같이 가늘고 하얀 수술이 연노란 꽃밥을 달고 솟아난다. 10~15cm에 이르는 수꽃 이삭 하나에서만 이런 방울이 수십 개. 꽃차례를 따라 꽃이 다 피면 마치 여우꼬리처럼 복스럽다.



그럼, 암꽃은 어디 있지. 얼핏 봐서는 찾는 게 쉽지 않다. 암꽃은 수많은 수꽃이 절정을 이룰 무렵 핀다. 그러니까 수꽃 이삭이 몇 개쯤 먼저 달리고 나면 그 아래쯤에서 암꽃이 살포시 모습을 드러낸다. 그 모습이 참 단순해 누군가 알려주지 않으면 알기 어렵다. 크기는 콩알만한데, 성게처럼 생긴 총포(總苞)에 싸여 때를 기다린다. 그러다 실 같은 암술머리 여러 개를 총포 위로 살짝 드러낸다. 꽃이 핀 거다.

밤나무 한 그루에서 피는 수꽃은 어마어마하다. 그해 새로 생긴 가지에서 피는 밤꽃은 처음에는 되도록 위를 향해 꿋꿋이 서 꽃가루를 날린다. 그런 다음 아래로 늘어진다. 작은 가지마다 꽃차례가 길게 줄줄이 늘어서 장관을 이룬다. 나무 아래서 올려다보면 현기증이 날 정도. 조금 떨어져서 보면 마치 치어리더들이 응원할 때 흔들어대는 꽃술 같다. 이런 꽃술이 10여m 높이로 그득 핀 모습이라니.

밤꽃이 한창일 때 멀리서 보면 나무 한 그루가 마치 한 송이 꽃 같다. 밤나무가 잘 자라는 곳을 보면 대개 군락을 이룬다. 경남 산청을 비롯해 남부지방에서 특히 잘 자라는데, 밤꽃이 필 무렵 그 둘레 산을 바라보면 꽃밭 아닌 ‘꽃산’이라 해야 할 정도다.

무수한 수꽃들의 지극한 사랑

성게같이 생긴 암꽃은 수꽃에 온전히 둘러싸여 핀다. 밤꽃은 향기가 강하고 꿀이 많아 곤충들이 밤낮으로 꼬인다. 갈색으로 말라가면서까지 밤이 잘 영그는지 지켜보는 마지막 수꽃들(왼쪽부터).

암꽃을 마지막까지 지켜주다

밤꽃을 관찰하다 보면 색다른 모습과 마주하게 된다. 대개 꽃은 수정이 끝나면 꽃잎이 땅으로 떨어진다. 밤나무 수꽃은 수정이 끝난 뒤 시들면서 갈색으로 바뀌고 꽃차례가 통째로 떨어진다. 땅으로 돌아가 이제부터는 밤나무한테 거름이 된다.

그런데 암꽃과 같은 꽃차례에 피는 수꽃은 다르다. 암꽃은 꽃차례의 아래쪽, 수꽃은 위쪽에 달리는데 여기서 피는 수꽃만은 암꽃보다 나중에 핀다. 그러니까 밤나무는 제 나름 수정을 위한 장치를 시간차로 마련해둔 것이다. 1차로 무수히 많은 꽃가루가 다른 밤나무의 암꽃을 찾아간다. 그럼에도 수정하지 못한 암꽃을 위해 암꽃보다 늦게 피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는 게 아닌가 싶다.

6월 초 핀 수꽃은 대부분 하지(夏至) 무렵이면 떨어진다. 하지만 암꽃과 같은 꽃차례에서 핀 수꽃은 쉽사리 떨어지지 않는다. 꽃가루 수명이 다하고 심지어 갈색으로 바뀌고 나서도 한동안 암꽃을 가까이서 지켜준다. 다른 수꽃이 다 떨어지고 한 달 정도 지난 7월 하순쯤 돼서야 땅으로 떨어지는 거다. 이때쯤에는 수정된 밤들이 제법 자라 밤송이 크기가 알밤 정도 된다. 뒤늦게 핀 수꽃은 어린 새끼가 무사히 잘 자라는지 확인하고 나서야 생을 마감한다. 이렇게 무수한 수꽃의 지극한 사랑 덕에 우리는 맛난 밤을 먹는다.

무수한 수꽃들의 지극한 사랑

밭에서 김을 매다 발견한 아기 밤나무.

밭에서 김을 매다 보면 아주 가끔 이제 막 나온 아기 밤나무를 만나곤 한다. 나무 크기라고 해봐야 한 뼘 남짓. 위로는 줄기를 뻗어 잎이 자라고, 아래로는 뿌리를 내리고 있는데 그 가운데 알밤이 ‘내가 주인이요’ 하듯이 떡 하니 자리하고 있다. 어디서, 어떻게 굴러온 밤일까. 밤꽃 냄새가 그렇듯이 밤나무의 생명력도 강한 거 같다.

밤나무 : 참나뭇과에 속하며 잎이 지는 중간키나무로, 10m 이상 높이 자란다. 아시아, 유럽 등 온대 지역에 분포하며, 우리나라는 마을 주변이나 산기슭에서도 잘 자란다. 암꽃과 수꽃이 같은 그루에서 피는 암수한그루로 꽃은 6월부터 핀다. 향기가 진하고 꿀이 많다. 수꽃은 가지 끝 잎겨드랑이에서 10~15cm쯤 되는 이삭꽃차례(spike)를 이루며, 암꽃은 가끔 그 아래쪽에 두세 송이가 모여 핀다. 암꽃은 총포(總苞)로 싸여 있는데 위로 여러 개의 실 같은 암술머리를 내밀고 있다. 총포 안에는 보통 씨방 3개가 있으며, 이것이 자라 알밤이 된다. 꽃말은 진심.



주간동아 2015.06.01 990호 (p72~73)

  • 김광화 농부작가 flowingsk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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