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88

2015.05.18

은밀하게 나긋하게! 비단결 신방 차리다

관음증 자극하는 완두꽃

  • 김광화 농부작가 flowingsky@hanmail.net

    입력2015-05-18 11:3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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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밀하게 나긋하게! 비단결 신방 차리다

    수정이 끝난 꽃잎을 살그머니 들추니 꽃가루를 가득 묻힌 꽃술이 드러난다. 수정이 끝나 시들어가면서도 암술을 끝까지 지켜주는 완두 꽃잎. 완두꽃은 밤에도 꿋꿋하게 핀다(위 부터).

    관음증(觀淫症)이라. 옛날 사람들도 관음증이 있었다. 신방을 훔쳐보려고 문풍지에 침을 발라 구멍을 뚫고, 그 작은 구멍으로 첫날밤을 훔쳐봤으니까. 하지만 인터넷으로 유통되는 요즘의 노골적인 관음증에 비하면 점잖다고 할 수밖에.

    내 관음증은 사람보다 동물이나 식물에 더 쏠려 있다. 짝짓기를 보자면 동물은 대체로 숨길 것도 없이 다 보여주는 편이다. 수탉은 한달음에 암컷을 제압한 뒤 등 위에 올라타 재빨리 짝짓기를 끝낸다. 고양이 암컷은 발정기가 오면 묘한 울음소리를 낸다. 보통 때 ‘야옹’ 하는 소리와 달리, 발정기 ‘아기울음’ 소리는 몸 전체가 만들어내는 떨림에 가깝다. 수컷과의 짝짓기 시간을 선택하는 것도 암컷이다. 개는 발정기 때 묶어두면 그야말로 발광을 한다. 길길이 뛰면서 묶어놓은 줄을 결사적으로 풀고 뛰쳐나간다. 짝짓기를 하는 동안 ‘벌건 대낮에 볼썽사납다’는 사람에게 작대기로 맞아도 쉽사리 떨어질 줄 모른다.

    자신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 꽃술

    여기에 견줘 식물들의 사랑은 눈여겨보지 않으면 쉽게 알기 힘들다. 하염없이 느리고 말이 없다. 그런데 이쪽 세계에 조금씩 눈을 뜨게 되니 이게 은근히 내 안에 남아 있는 관음증을 자극한다. 암술과 수술이 보일 듯 말 듯할 때가 더 그렇다. 그 본보기가 콩과 식물 가운데 비교적 일찍 꽃을 피우는 완두다.

    완두는 한해 또는 두해살이식물로 추운 지방에서는 이른 봄에 심는다. 5월 초면 꽃을 피우기 시작해 덩굴을 타고 1m 이상 올라간다. 꽃을 피우고 꼬투리를 맺고, 또 이어서 계속 꽃을 피워 올린다. 얼추 한 달가량 이런 과정이 계속된다. 그런데 우리 식구가 완두를 심어온 지 20년이 다 됐지만 꽃술을 보기 어려웠다. 하얀 꽃잎에 폭 싸여 있어, 그 사이로 얼핏 비치는 연노란빛이 꽃술일 거라고 추측만 할 뿐.



    그러다 결국 참을 수 없는 호기심이 발동해 손을 대고야 말았다. 완두는 수정이 끝난 뒤 꼬투리가 제법 자라도 시든 꽃잎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문풍지에 손가락 구멍을 내는 심정으로 시든 꽃잎을 슬그머니 들췄다. 그랬더니 눈앞에 펼쳐지는 눈부신 세계여! 콩과 식물은 대부분 자화수정을 하지만 아주 가끔은 예상할 수 없는 환경에 적응하고자 타화수정도 한다. 이때 꽃잎은 중요한 구실을 한다. 꽃잎은 기판, 익판, 용골판으로 돼 있는데 각각 제 나름의 구실이 독특하다.

    기판은 맨 바깥 꽃잎. 꽃술이 어릴 때는 다른 꽃잎과 함께 꽃술을 감싸고 있다 서서히 일어서면서 꽃잎을 날개 모양으로 펼친다. 꽃밥이 익어갈 무렵에는 꽃잎을 코끼리 귀처럼 꼿꼿이 세워 곤충에게 알린다. 먹을 게 있으니 여기로 오라고. 익판은 기판과 용골판 사이 중간 꽃잎으로, 비와 찬 이슬을 막아주면서 곤충이 내려앉기 좋게 착륙장 기능을 한다. 용골판은 맨 아래 버선코 모양이며, 꽃술을 보자기로 감싸듯 폭 싸고 있다. 자나 깨나 꽃술을 보호해 수정이 잘되게 한다.

    그러니까 매개곤충이 기판에 나타나는 자외선을 보고 익판에 앉으면, 익판은 나긋나긋한 그 탄력성으로 살짝 아래로 내려가고, 이때 용골판에 싸여 있던 꽃술이 살짝 드러나면서 곤충 배에 닫게 돼 꽃가루가 묻는다. 완두는 정말 운이 좋아야 타화수정이 되는 거다. 이 세 갈래 꽃잎은 꽃이 지고 나면 하나 된 모습을 보인다. 그동안 해오던 모든 활동을 접고 오직 새로 자라는 꼬투리를 보호하면서 남은 꽃술조차 끝까지 지켜내는 것.

    은밀하게 나긋하게! 비단결 신방 차리다

    해충인 완두콩바구미(왼쪽). 완두는 5월 한 달 내내 꽃을 피운다.

    비단이불 꽃잎 속에서의 사랑

    앞뒤를 더듬어 보자면 이런 게 아닌가 싶다. 완두는 자화수정을 기본으로 하기에 비단이불보다 더 부드러운 꽃잎에 폭 싸인 상태에서 충분히 사랑을 나누면 된다. 신방이 넓지 않기에 암술과 수술은 서로한테 온전히 집중할 수 있다. 이 상태에서는 사랑밖엔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할 만큼.

    그러면서 신방인 용골판은 나긋나긋하기에 꽃술이 자라는 공간을 기꺼이 내준다. 꽃밥이 먼저 익고 이어 암술머리가 자라면서 꽃밥에 닿으면 꽃가루가 터진다. 하지만 사랑이 온전하게 이뤄진 것인지는 아직 장담하기 이르다. 수분이 됐다고 다 수정이 되는 게 아니기에.

    이제 세 갈래였던 꽃잎은 하나로 뜻을 모은다. 용골판뿐 아니라 익판과 기판까지 고스란히 꽃술을 감싸, 남은 꽃가루 알갱이 하나라도 허투루 버리지 않으면서 암술을 끝까지 지켜준다. 관계를 맺은 뒤 제 욕심 다 채웠다고 뒤도 안 돌아보는 여느 수컷과는 아주 다르지 않은가.

    은밀하게 나긋하게! 비단결 신방 차리다

    잘 영근 꼬투리 속 완두.

    나는 이렇게 시든 꽃잎을 살짝 들추고도 흥분이 되는데, 멘델은 원기 왕성한 완두꽃을 가지고 유전 실험을 수백 번도 더 했을 테니 그때마다 느낌이 어땠을까. 완두의 성생활에 깊숙이 개입해 귀중한 유전법칙을 발견한 멘델이 새삼 내게 거룩하게 다가온다.

    완두 : 한해 또는 두해살이 콩과 식물. 원산지는 지중해 연안으로 전 세계에서 재배되며, 멘델의 유전 실험으로 유명하다. 꽃은 흰색과 붉은색이 있고, 5월부터 한 달가량 핀다. 잎겨드랑이에서 꽃대가 나와 그 끝에서 1~2개씩 나비모양으로 핀다. 암술은 하나, 수술은 10개로 용골판이 꽃술을 폭 감싸고 있어 자화수정을 한다. 꼬투리에는 보통 5~7개, 가끔 8개의 열매가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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