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87

2015.05.11

한양도성 성돌에 새겨진 조선 역사

수백 년 된 길잡이와 함께 걷는 서울 성곽길의 매력

  • 정석 서울시립대 도시공학과 교수 jerome363@uos.ac.kr

    입력2015-05-11 13: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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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양도성 성돌에 새겨진 조선 역사

    한양도성 모습.

    책에 적힌 것만 역사가 아니다. 오래된 건물과 장소, 옛길도 역사다. 산과 강과 언덕, 작은 물길도 유유히 흘러온 우리 역사라 할 수 있다. 그러니 2000년 넘는 역사를 지닌 서울의 연륜을 제대로 느끼고 맛보려면 시야를 좀 더 넓힐 필요가 있다.

    서울 곳곳에 우리 역사를 제 몸에 꼼꼼히 새겨둔 유산이 있다면 믿겠는가. 한양도성 성돌에 새겨진 글씨들, 이른바 ‘각자성석(刻字城石)’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흥인지문 북쪽 길 건너, 낙산으로 이어지는 성곽 초입부 성벽을 보면 글씨가 새겨진 성돌이 유난히 많다. ‘이패장(二牌將)’ ‘삼패장(三牌將)’ 같은 관직 이름과 ‘전수선(全守善)’ ‘황승선(黃承善)’ 같은 사람 이름이 보인다. 한양도성의 보수와 관리를 담당한 기관 중 하나였던 ‘훈국(訓局·훈련도감)’이라는 글씨도 보이고, 왼쪽 끝에서는 성곽을 보수한 때를 알려주는 ‘강희 45년(1706년·숙종 32년) 4월 개축’이란 글씨도 읽을 수 있다.

    현재 이곳은 동대문교회가 이전한 뒤 성곽의 옛 모습을 복원하고 성곽공원을 조성하는 공사가 진행 중이라 담으로 가려진 상태다. 하지만 공사 관리자에게 부탁하면 담장 안 성돌에 새겨진 글씨들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각자성석은 동대문 북쪽 말고도 여러 곳에서 아주 많이 발견된다.

    우리 조상들은 왜 성을 쌓으면서 성돌에 글씨를 새겨 넣었을까. 무슨 내용을 누가 언제, 왜 새겼을까. 그리고 그 글씨들은 지금 얼마나 남아 있을까. 글씨를 읽어 내려가다 보면 자연스레 이런 호기심들이 생길 것이다. 본격적으로 각자성석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먼저 한양도성을 쌓은 내력부터 살펴보자.

    태조 때 시작해 조선 후기까지 보수 공사



    1392년 조선왕조를 연 태조는 1394년 8월 한양을 수도로 정하고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이라는 관청을 설치했다. 이 기관을 통해 당시 가장 시급했던 종묘와 사직, 그리고 궁궐을 짓는 공사를 일단락 지은 뒤 이듬해 태조는 성곽을 쌓는 대공사를 정도전에게 맡긴다.

    왕도의 자리와 경계를 정하는 데 우여곡절이 없었을 리 없다. 온갖 논란과 조정 속에 지금 같은 백악과 타락(낙산), 목멱(남산)과 인왕 내사산의 산등성이와 언덕을 잇는 18.6km 길이의 도성 경계 성곽이 만들어졌다. 성곽축조공사는 1396년 음력 1월 9일 시작해 49일간, 이어서 8월과 9월에 또 49일간 진행돼 총 98일간 이뤄졌다.

    그렇다면 당대 사람들은 이 대공사를 어떻게 진행했을까. 기록에 따르면 한양도성 전체를 600척(약 180m)씩 97개 구간으로 나눈 뒤 각 구간마다 ‘천자문’ 순서대로 이름을 붙였다. 백악의 동쪽 첫 구간부터 시계 방향으로 천(天), 지(地), 현(玄), 황(黃) 구간이 하나씩 생겨난 것이다. 백악 서측 끝에 있는 97번째 구간 이름은 조(弔)였다.

    구간 각각의 공사는 5도 백성에게 할당했다. 백악 정상부터 숙정문까지 9개 구간은 함길도에서, 숙정문부터 혜화문까지 8개 구간은 강원도에서, 혜화문부터 남산 잠두봉까지 41개 구간은 경상도에서, 잠두봉부터 돈의문까지 15개 구간은 전라도에서, 그리고 나머지 24개 구간은 평안도에서 공사를 담당하도록 한 식이다. 이 역사(役事)에 동원된 전국 5도 장정 수는 약 19만7000명에 달했다.

    이렇게 완성된 한양도성을 전반적으로 고쳐 쌓은 이는 세종대왕이다. 세종은 1421년(세종 3년) 도성수축도감(都城修築都監)이라는 기관을 설치해 성곽 고쳐 쌓는 일을 시작했는데, 이때에는 전국 8도에서 약 32만 명의 장정이 동원됐다고 한다. 공사 기간은 38일이었다.

    성곽의 보수와 정비는 조선 후기까지 지속됐다. 조선 초기 백성을 동원해 성곽을 쌓고 보수했던 것과 달리 숙종 때부터는 정부 기관인 5군문(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 총융청, 수어청)에서 이를 맡았고, 이후에는 3군부(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가 관할 구역을 나눠 담당했다. 이러한 한양도성의 축성 및 보수작업 이야기는 당대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 ‘어영청등록’ ‘훈국등록’ 같은 각종 공문서에 자세히 기록돼 있다.

    한양도성 성돌에 새겨진 조선 역사

    1 동대문 북측각자. 흥인지문 북쪽 길 건너편에 있는 각자성석. 조선시대 관직명과 사람 이름 등이 새겨져 있다. 2 검자육백척. ‘천자문’의 49번째 글자인 ‘검(劍)’ 자 구간이 시작된다는 뜻이다. 3 경인삼월금시. 1710년 3월 금위영에서 보수 공사를 맡았던 성벽 구간의 시점임을 알리는 글씨. 4 칭자종야자. ‘칭(稱)’ 자 구간이 끝나고 ‘야(夜)’ 자 구간이 시작된다는 뜻으로, ‘칭’과 ‘야’는 ‘천자문’에서 각각 54번째, 55번째 글자에 해당한다.

    흥미로운 것은 우리 조상들이 성돌에도 이에 대한 내용을 충실히 기록해뒀다는 점이다. 성돌에 새겨진 글씨의 비밀을 하나하나 찾아 밝혀내고 있는 문인식 서울시 한옥조성과 과장은 최근 ‘서울학연구’에 발표한 논문을 통해 한양도성 각자성석의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줬다. 문 과장에 따르면 현재 한양도성에서 발견된 각자성석은 300개가 넘으며, 성돌에 새겨진 글씨는 대부분 판독이 가능해 새겨진 시기를 파악할 수 있다.

    각자성석 보물찾기

    자, 이제 300개가 넘는 각자성석을 찾아 한양도성 탐방을 떠나보자. 어디서부터 시작하면 좋을까. 남산과 응봉산이 만나는 계곡부에 우뚝 서 있는 반얀트리 클럽 앤 스파 서울(옛 타워호텔)은 출발점으로 삼기에 좋은 장소다. 용산구 한남동에서 국립극장으로 넘어가는 고갯길 정상에 조금 못 미치는 곳, 작은 주차장 경사지에서 쉽게 성돌을 발견할 수 있다. 이곳에 간다면 ‘경인삼월금시(庚寅三月禁始)’라고 적힌 성돌을 찾아보자. 경인년(숙종 36년·1710년) 3월 3군부 중 하나인 금위영에서 공사를 맡았던 구간의 시점임을 알리는 글씨다.

    같은 장소에 각자성석이 또 있다. ‘검자육백척(劍字六百尺)’. ‘천자문’ 49번째 글자인 ‘검(劍)’ 자 구간이 시작된다는 뜻이다. 흔히 ‘천자문’ 하면 ‘하늘 천 땅 지 검을 현 누를 황’을 떠올린다. 천자문은 이렇게 네 글자로 구성된 구(句)가 250개로 구성된, 그래서 꼭 글자 1000자가 담긴 책이다. 앞서 소개한 ‘검’은 이 책의 검호거궐(劍號巨闕) 부분에 쓰인 글자다.

    이 각자성석이 있는 자리에서 길을 건너면 남산으로 올라가는 성곽을 따라 좁은 길이 있는데, 그 길가에 또 글씨가 새겨진 성돌이 있다. 이번 글씨는 ‘칭자종야자(稱字終夜字)’. ‘칭’ 자 구간이 끝나고 ‘야’ 자 구간이 시작된다는 뜻이다. ‘칭’과 ‘야’는 ‘천자문’의 주칭야광(珠稱夜光)에 나오는 한자들로 각각 54번째, 55번째 글자에 해당한다.

    올봄엔 한양도성 순례를 떠나보자. 혼자여도 좋고, 좋은 사람과 함께라면 더욱 좋을 것이다. 걷는 도중 제 몸에 새긴 글로 자상하게 길안내를 해주는 ‘도성 길라잡이’ 각자성석까지 만난다면, 여정이 더욱 풍성해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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