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82

2015.04.06

AIIB는 평양에 제시할 새로운 당근?

6자회담에서 엉킨 ‘국제기구 차관’ 대안될 듯…문제는 중국 예속 심화

  • 황일도 기자·국제정치학 박사 shamora@donga.com

    입력2015-04-06 10:2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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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년 7월 1일 국가정보원은 1급 상당의 국가정보관(NIO) 제도를 신설해 민간전문가 4명을 영입한다. 그중 한 명이 북한 분야를 담당하는 J모 교수. 인선 과정에서는 주로 북한 군사나 정치 분야 전문가가 거론됐지만, 막판에 ‘발탁’된 것으로 전해진 J 교수는 국제금융 전문가였다. 북한 경제개발 과정에서 국제금융기구가 어떤 구실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논문을 다수 발표한 J 교수의 임명을 두고, 정부 주변에서는 “6자회담 진전에 따라 북한에 제시할 당근 중 하나로, 국제기구 차관 제공 방안을 마련하기 위한 포석”이라는 말이 회자됐다.

    2007년 2·13 합의를 통해 북핵 폐기 로드맵이 마련되는 과정에서 그림은 한층 구체화됐다. 합의 이후 진행되는 분야별 실무그룹 논의 사항에 북한의 국제금융기구 가입 문제가 공식 의제로 채택된 것. 북한은 1990년대부터 세계은행(WB)이나 아시아개발은행(ADB)에 가입해 개발차관을 지원받아 경제 인프라를 구축하는 방안을 희망해왔지만, 미국과 일본이 주도하는 이들 기구는 북한의 가입을 승인하지 않았다. 6자회담 과정에서 북한의 테러지원국 지정 해제가 핵심 이슈로 떠오른 이유였다.

    낙관론과 비관론

    이후 상황은 알려진 바와 같다. 2008년 이후 6자회담은 공전했고, 2·13 합의의 후속 논의 역시 허공으로 흩어졌다. 2008년 10월 미국은 북한을 테러지원국 지정에서 해제했지만 WB 가입 문제는 전혀 진전되지 못했다. ADB 주도권을 쥔 일본이 납치자 문제에 사활을 걸고 있다는 점 역시 걸림돌이었다. 그리고 7년이 지난 지금, 전혀 새로운 변수가 등장했다. 중국이 주도하는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의 출현이다.

    4월 초 현재 52개국이 참여하기로 한 AIIB는 말 그대로 ‘대박’을 쳤다. 동맹국들에게 참여 자제를 요청했던 미국이 머쓱해질 정도. 중국이 이 기구를 창설하기로 한 핵심 이유가 미국, 일본이 주도해온 WB와 ADB를 견제하기 위해서임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아시아 개발도상국과 저개발국가의 사회기반시설 건설 과정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한 ‘판 뒤집기’ 카드다.



    AIIB가 아시아 개발도상국에 어떤 조건으로 차관을 제공할지는 아직 알려진 바 없지만, WB의 경우를 보면 대략적인 수준은 가늠할 수 있다. 2007년 작성된 관련 보고서에 따르면, WB의 IBRD(국제부흥개발은행) 차관은 연금리가 5~7%, IDA(국제개발협회) 차관은 아예 이자가 없고 0.5~1.0% 취급수수료만 지급하면 상환기간 30~40년의 자금을 빌릴 수 있다. 후자의 경우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액수의 60~70%를 공짜로 주는 것과 같은 엄청난 혜택이다.

    최근 들어 소원해졌다 해도 북한과 중국은 여전히 북·미, 북·일 관계와는 비교할 수 없는 우방이다. 앞으로 6자회담을 통해 핵 폐기 반대급부에 대한 논의가 재개된다면 AIIB를 통한 차관 제공은 WB나 ADB 보다 훨씬 실현 가능성이 높다. 평양은 그간 외자 유치에 총력을 기울였지만 변변한 실적이 없는 상황. AIIB 차관을 종잣돈 삼아 기본 틀을 만들면 김정은 조선노동당 제1비서가 말하는 ‘경제강국’의 장밋빛 희망에 비로소 길이 열릴 수 있다.

    전문가들 견해는 엇갈린다. 낙관론은 AIIB의 출현으로 당근이 한층 확실해진 만큼 핵 폐기로 이끌 가능성도 커졌다는 점에 주목한다. 비관론은 이미 세 차례의 핵실험으로 자신감을 축적한 북한이 경제적 반대급부 때문에 핵을 포기할 리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AIIB 차관을 논의하는 과정 자체만으로도 북한 경제의 개혁·개방 과정이 탄력을 받을 수 있다는 데 대해서는 전문가 대부분의 의견이 일치한다.

    3월 31일 미국 자유아시아방송(RFA)은 북한이 2월 진리췬 AIIB 임시사무국 사무국장에게 가입 의사를 타진했지만, 불가 통보를 받았다는 소식을 전했다. 북한의 금융·경제체제가 국제기구에 참여할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는 게 거절 이유였다는 것. 이를 두고 국내에서는 북·중 관계 균열의 결과물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었지만, 금융 전문가들 시각은 사뭇 다르다. 새로 만들어지는 국제기구가 ‘글로벌 스탠더드’를 의식하는 건 당연하다는 것. 실제로 국제통화기금(IMF)과 WB, ADB 등도 차관 제공 조건으로 해당 국가의 경제 상황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는 이자율, 통합재정수지, 중앙은행 통화계정 등의 통계자료를 요구한다.

    실크로드의 동쪽 끝

    뒤집어 말해 북한이 향후 AIIB 차관을 받으려면 이러한 통계를 작성해 제출해야 한다. 1960년대 이후 국내총생산(GDP)조차 제대로 공개한 적 없는 북한의 실상이 비로소 알려지는 셈이다. 주먹구구식 추론에 의존할 수밖에 없던 북한 경제의 투명성이 획기적으로 향상되는 것. 극단적으로는 지도자 1인이 마음대로 운용하는 자금이나 대량살상무기 개발 예산이 얼마인지 가늠해볼 잣대도 생긴다.

    이 과정에서 평양은 국제표준 수준의 재정 처리나 금융 시스템에 대한 지식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 한국이 겪었듯, 국제금융기구의 지원에는 경제 체질 개선이나 시스템 개혁 같은 조건이 따라붙는다. 최근 수년 사이 북한 당국은 중앙은행의 기능이나 재정·통화정책 등 경제 운용 노하우를 익히기 위해 적잖은 관료들을 해외에서 연수시키고 있다. AIIB 차관 도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작업 역시 빨라지고, 결과적으로 북한 경제의 ‘시장화’도 한층 탄력을 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남아 있는 우려는 중국의 ‘숨은 의도’다. 베이징이 AIIB를 통해 일대일로(一帶一路·One Belt One Road)라 부르는 실크로드 프로젝트의 자금을 조달할 계획이라는 사실은 이미 알려진 바와 같다. 최근 발표된 프로젝트 청사진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북한의 지리적 위치는 육상 실크로드의 동쪽 끝에 해당한다. 예컨대 장성택 전 북한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의 처형과 함께 중단된 중국의 나진항 개발계획에 AIIB가 뛰어든다면, 실크로드는 태평양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뜻이다.

    이 경우 한국과 러시아가 함께 추진하는 나진-하산 프로젝트의 운명은 장담하기 어려워진다. 당장 포스코와 현대상선 등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는 민간기업으로부터 낮은 수익률에 대한 불만이 새어 나오는 상황. 현재는 석탄 등 벌크(bulk)화물 운송 용도에 그치는 나진항을 컨테이너항으로 바꾸는 작업이 AIIB 주도로 이뤄진다면, 중국이 인근에 건설 중인 ‘창지투(長吉圖·창춘-지린-투먼) 개방 선도구’의 수송항이 될 공산이 크다. 지린성에서 만든 물건이 나진항을 통해 한반도 동해와 남해를 돌아 상하이로 운반되는 루트. 북한 경제의 중국 종속은 물론, 나아가 한반도 전체의 중국화가 가속화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AIIB는 평양에 제시할 새로운 당근?

    2014년 11월 24일 북한 나진항에서 진행된 남·북·러 3국의 시범운송사업 당시 대형 굴착기가 부두의 석탄을 중국 화물선에 선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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