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82

2015.04.06

‘잊지 않았다’고 말하지 마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어

인천 연안여객선 허술한 인원 점검과 고박, 여전한 안전불감증

  •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입력2015-04-06 09:5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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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잊지 않았다’고 말하지 마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어

    카페리 화물칸에 고박되지 않은 채 다닥다닥 적재돼 있는 화물차들. ‘화물고박기준’에 따르면 선박에 차량을 실을 때는 전후좌우 600mm 이상의 간격을 둬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두 가지 헛된 믿음에 빠져 있다. 기억(사람, 사물, 행위, 민족 등에 대한 기억)의 영속성에 대한 믿음과 (행위, 실수, 죄, 잘못 등을) 고쳐볼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 그것이다. 이것은 둘 다 마찬가지로 잘못된 믿음이다. 진실은 오히려 정반대다. 모든 것은 잊혀지고, 고쳐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작가 밀란 쿤데라는 소설 ‘농담’에 이렇게 썼다. 4월 1일 인천항을 출발해 덕적도로 향하는 카페리 위에서 이 구절을 떠올렸다. 뿌연 안개가 세상을 뒤덮은 아침이었다. 배 아래서는 검은 물결이 선체를 흔들며 일렁였다.

    ‘잊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1년 전 4월 15일 세월호가 인천항을 떠나던 날, 인천 하늘에 자욱했던 안개를. 깊은 밤, 뱃전을 때렸을 검은 파도를. 그 배와 그 안에 탔던 이들이 영영 돌아오지 못하게 된 뒤 1년 동안 수많은 사람이 이날의 상처를 기억하며 가슴을 쳤다. ‘고치겠다’는 다짐도 수없이 했다.

    4월 1일 배에 오른 건 이 두 가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여전히 세월호를 기억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 힘으로 정말 변화를 이뤄냈는가.

    인천항에 드리운 안개



    ‘여객선 세월호는 (중략) 농무로 인하여 정상적인 운항계획보다 약 2시간 30분 늦은 2014년 4월 15일 21시 05분경 선원 및 승무원 33명, 여객 443명, 화물 2,142.7톤 등을 적재하고 인천항 연안여객부두를 출항하여 제주항으로 항해하였다.’

    지난해 말 해양안전심판원 특별조사부가 펴낸 ‘여객선 세월호 전복사고 특별조사 보고서’(세월호 보고서)는 이렇게 시작한다. 4월 1일의 안개는 이 밤을 다시 떠올리게 하는 면이 있었다. 드문드문 빗방울까지 흩뿌려 이른 새벽, 차를 달리며 몇 번이나 인천항 연안여객터미널(터미널)에 전화를 걸어야 했다. 답은 한결같았다.

    “정시 출항 여부가 불투명합니다. 항구에서 안개가 걷힐 때까지 대기해야 할 수 있습니다.”

    출발 시간을 35분 앞둔 7시 25분에야 마침내 ‘출항 가능’ 판정이 내려졌다. 금세 터미널에 활기가 돌았다.

    세월호 사고 이후 인천지방해양항만청은 인천-제주 항로를 독점하던 청해진해운의 운항 면허를 취소했다. 이후 인천-제주를 잇던 뱃길은 끊긴 상태다. 청해진해운이 사용하던 터미널 2층 사무실에도 그새 다른 여행사가 둥지를 틀었다.

    이제 인천항의 중심은 백령도와 연평도, 덕적도 등 서해 섬을 오가는 5개 항로 여객선이다. 지난해 83만8922명이 이곳에서 배편을 이용했다. 2013년 106만3230명에 비해 21.1% 급감했지만, 상인들은 “이만한 게 어디냐”고 했다. 세월호 사고 직후 한동안 도서 지역 주민을 제외하곤 배를 타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4월 1일 아침에는 궂은 날씨에도 적잖은 이가 등산복을 차려입고 삼삼오오 터미널에 모여 있었다. 게시판에 ‘정상 출발’ 안내문이 뜨자 금세 발권 카운터 앞에 줄이 늘어섰다.

    세월호 사고 후 나타난 가장 큰 변화는 발권 절차가 까다로워졌다는 점이다. 신분증이 없으면 표를 구매할 수 없다. 한 명이 여러 장의 표를 살 때도 탑승자 전원의 신분증을 제시해야 한다. 각각의 연락처도 전산에 입력한다. 과거엔 별도 확인 절차 없이 승객이 직접 탑승권에 신상정보를 적게 해 허위 부실 기재가 많았다.

    ‘잊지 않았다’고 말하지 마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어

    인천항 연안여객터미널 2층에 붙어 있는 선사안내도(왼쪽). 세월호 사고 후 청해진해운의 인천-제주 항로 운항면허가 취소되면서 이 사무실은 현재 다른 선사가 이용하고 있다.

    “대체 몇 명이 탄 겁니까”

    ‘4월 16일 낮 12시 30분께 세월호 선사인 청해진해운이 공식브리핑을 열고 총탑승객 수를 477명이라고 공식 발표했다. 오후 4시께 해양경찰청은 총탑승객 수를 459명으로 정정했다. 다시 청해진해운은 오후 5시 40분께 총탑승객 수를 462명으로 바꿨다. 이날 오후 10시께는 475명으로 변경했다. (중략) 18일 오후 신원을 알 수 없는 사망자가 발견되면서 결국 1명 더 늘어난 476명으로 바뀌었다.’

    지난해 4월 19일 통신사 ‘뉴시스’가 전송한 기사다. 당시 해양경찰은 정확한 승선 인원을 파악하고자 세월호 개찰구 폐쇄회로(CC)TV까지 확인하는 촌극을 벌였다. 탑승권 구매 시 신분증 확인은 이 문제를 풀기 위한 첫걸음이다.

    인천항에서는 탑승 전 다시 한 번 신분증을 검사해 탑승권 명의자와 승선자가 동일 인물인지 확인했다. 신분증 확인 담당 직원은 “신분증이 없는 사람은 절대 배에 태우지 않는다. 초반엔 그 문제로 실랑이가 벌어지기도 했지만 최근엔 다들 잘 알고 있다. 공항에서 여권과 항공권을 제시하는 것과 똑같다”고 했다.

    그러나 모든 항구가 이를 지키고 있는 건 아니다. 3월 31일 찾아간 인천 영종도 삼목선착장은 사정이 달랐다. 내륙과 신도(소요시간 10분), 장봉도(소요시간 30분) 등 연안 섬을 잇는 배가 수시로 오가는 그곳에서도 승차권 구매 시 신분증을 요구하고, 개인정보를 전산입력하는 건 다르지 않았다. 한 사람이 표 여러 장을 구매할 경우 매수만큼의 신분증을 요구하는 것도 동일했다. 하지만 승선 시 본인 확인 절차는 없었다. 다른 사람 신분증으로 표를 구매한 뒤 탑승할 경우 걸러낼 방법이 없는 셈이다.

    카페리에 승용차를 싣는 과정도 허술했다. 운전자가 직접 차를 몰고 배에 오르는 방식으로, 차 안에 무임승차 인원이 있는지, 구매한 표의 수와 승차 인원이 동일한지를 확인하는 이가 없었다. 세월호 사고 당시 탑승 인원 확인에 가장 혼선을 줬던 것이 바로 터미널 개찰구를 거치지 않고 화물차량과 함께 탑승한 승객, 이른바 무임승선객이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단속은 여전히 철저하지 않은 듯했다.

    인천항의 경우는 이 단계에도 안전장치를 뒀다. 덕적도행 카페리에 차를 적재하려고 가자 담당 직원이 탑승자를 모두 내리게 한 뒤 직접 차를 실었다. 그러나 덕적도 진리선착장에서 다시 인천항으로 돌아 나올 때는 사정이 달랐다. 삼목선착장과 동일한 방식을 따랐다. 차를 운전자가 직접 싣게 했고, 인원 확인 절차도 없었다. 승선권과 신분증을 비교 확인해 탑승자와 명의자가 동일 인물인지 점검하는 단계도 생략됐다.



    ‘2014년 4월 16일 08시 50분경 세월호의 비정상적인 급변침에 의하여 선체가 좌현으로 15~20도가량 급작스럽게 기울기 시작하였다. 고박이 부실하게 된 컨테이너나 일반 화물이 좌현으로 먼저 쏠리면서 횡경사가 계속되었고, 연이어 횡경사가 고박장치의 허용 한계범위를 넘어서면서 고박장치가 파손된 화물이 더욱 쏠리거나 넘어지게 되었다. 차량과 화물의 쏠림이나 전도는 선박의 복원력 한계를 초과하는 횡경사력을 발생시켰고, 점점 더 많은 화물이 좌현으로 이동되거나 전도되었다.’

    ‘잊지 않았다’고 말하지 마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어

    제주행 여객선이 출발하던 인천항 연안여객터미널 자리에 ‘진입금지’ 명판이 붙어 있다.

    해양안전심판원 특별조사부의 ‘세월호 보고서’는 사고 원인을 이렇게 분석했다. ‘고박(固縛)’은 화물을 단단히 묶는 것을 뜻하는 단어다. 세월호를 쓰러지게 만든 것이 궂은 날씨도, 강한 해류도, 적 잠수함의 공격도 아닌 ‘운항 미숙’(비정상적인 급변침)과 고박 불량이라는 얘기다.

    세월호의 경우 출항 직전까지 차량을 싣다 출항 시간에 쫓겼고, 막판에 실은 승용차 10여 대의 경우 고박 작업조차 하지 못한 채 출발한 것으로 확인됐다. 선체가 크게 흔들렸을 때 이 승용차들이 한쪽으로 쏠리고, 다른 화물과 잇달아 충돌하면서 추가적인 화물 붕괴를 가져왔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세월호 사고 후 고박은 우리 해양계의 주요 화두가 됐다. 인천항과 덕적도를 오가는 카페리는 1층에 화물을 싣고, 2층과 3층에 선실을 둔 구조였다. 출항을 앞두고 직원들은 차량 앞뒤 바퀴에 끈을 건 뒤 선체 바닥 고리에 당겨 묶느라 분주했다. 이 배에는 최소한 고박하지 않은 차량은 보이지 않았다. 화물칸에 실린 모든 화물은 네 방향에서 선체에 고정됐다.

    문제는 고박 방식이다. 모든 로프가 차량 바퀴의 알루미늄휠에 걸려 있었다. 전문가들은 이 경우 고박의 안정성이 크게 떨어진다고 말한다. 바퀴 휠은 선체가 흔들릴 경우 쉽게 떨어져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휠이 떨어져나가면 자연히 고박이 풀리게 되고, 화물은 배 운항 방향에 따라 쏠리게 된다. 차량을 좀 더 적절하게 고박하려면 왼쪽 오른쪽 바퀴를 잇는 바퀴 축에 로프를 건 뒤 선체에 당겨 묶어야 하는데, 이는 상대적으로 번거로운 일이다(상자기사 참조).

    삼목선착장과 장봉도를 잇는 선박은 상황이 좀 더 심각했다. 2015년 1월 2일 개정된 해양수산부고시 제2015-1호 ‘화물적재고박 등에 관한 기준’(화물고박기준) 제14조는 고박에 대한 예외를 규정했다. △평수구역만을 항해하는 선박으로서 항해시간이 30분 미만인 선박 △평수구역 및 연해구역을 항해구역으로 하는 선박으로서 출발항으로부터 도착항까지의 항해시간이 1시간 미만이고 승용차, 12인승 이하의 승합차, 적재중량 1.5t 이하 화물차 등을 적재한 선박은 ‘차량의 미끄러짐을 방지할 수 있는 적절한 조치를 한 경우’ 차량을 묶어 매지 않아도 된다는 조항이다.

    이 영향인지 해당 선박에서는 고박 작업이 이뤄지지 않았다. 바퀴 앞뒤에 굄목(침목)을 받쳤을 뿐이다. 문제는 규정에서 벗어나는 대형 트럭에 대한 안전장치 역시 굄목이 전부였다는 점이다. 심지어 장봉도에서 삼목선착장으로 돌아 나올 때는 굄목조차 대지 않았다. 조원철 연세대 명예교수는 해당 사진을 확인하고 “해상 조건은 변화무쌍하다. 연안을 오가는 배라 해도 늘 위험에 노출돼 있다. 특히 바퀴가 큰 차는 굄목을 대놓아도 파도가 치면 타고 넘어가 다른 화물과 충돌할 수 있다. 그런데 아무 고박 장치 없이 이런 차를 싣는 건 안전불감증”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가만히 있으라”

    ‘평소 실질적인 비상훈련이 부족하였던 선장 등 선원들은 여객을 퇴선시키거나 객실 밖 집합장소로 대피하도록 안내하는 등 적절한 조치를 취하여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자신들부터 먼저 퇴선하는 등 선원들의 매우 부적절한 행위로 인하여 대규모 인명피해가 발생하였다.’

    다시 해양안전심판원 특별조사부의 ‘세월호 보고서’ 내용이다. ‘고박불량’으로 넘어간 배에서 304명(실종자 9명 포함)이 졸지에 목숨을 잃게 만든 건 부적절한 후속 조치였다. ‘세월호 보고서’는 이에 대해 ‘사고 당시 바다는 잔잔하였고 수온이 약 12도로 생존에 급박한 위험을 초래하지 않았고 (중략) 사고 발생 후 선장 등이 일반적인 선원의 상무에 따라 여객을 적절하게 대피시켰다면 인명 손실은 없었거나 있었더라도 극소수에 그쳤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고 기록했다.

    세월호 사고 후 온갖 대책이 집중됐던 쪽도 바로 이 부분이다. 해양수산부는 지난해 5월 21일 보도자료를 내고 앞으로는 “여객선에 탑승한 여객을 대상으로 선박종사자가 직접 배 안에서 구명동의(조끼) 착용법을 시연 등을 통해 숙지하게 하고, 긴급 탈출 요령도 여객들에게 직접 설명하는 등 안전수칙을 강화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3월 31일과 4월 1일 이틀간 네 번의 배를 타면서, 단 한 번도 선박종사자로부터 안전교육을 받지 못했다. 인천항-덕적도 운항선의 경우 승선과 동시에 객실에 있는 TV를 통해 소화기 사용법 등에 대한 안내가 나왔지만, 소리가 작아서 잘 들리지 않았다. 상당수 승객이 갑판 등 객실 밖에 있는 상황에서 안전교육이 진행 중임을 알리는 장치도 전혀 없었다. 일부 객실 TV는 아예 꺼져 있기까지 했다.

    다행히 모든 배에는 승선자 수를 초과하는 구명동의가 비치돼 있었고, 소화기와 소화전함 등도 규정에 맞게 정비돼 있음을 확인했다. 하지만 ‘그림의 떡’에 불과했다. 삼목선착장과 장봉도를 잇는 선박의 구명동의함에는 ‘비상시 외에는 절대 손대지 마시오(적발 시 고발조치 및 손해배상 청구)’라는 경고문이 붙어 있었다. 인천항과 덕적도를 잇는 배의 구명장비 옆에도 ‘본 구명동의함은 비상시에만 사용하도록 지정된 인명구조장비입니다. 비상시 이외에 절대 무단으로 꺼내어 사용하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라는 안내가 나란히 있었다. 비상 상황에서 즉시 구명동의를 착용하려면 ‘비상시 이외’ 상황에서 착용법을 익혀야 한다는 ‘상식’은 배 안에서 쉽게 무시됐다. 선박종사자가 이를 직접 안내할 수 없다면, 최소한 승객들이 스스로 훈련할 수 있도록 견본이라도 꺼내 놓아야 하지 않을까.

    긴급 탈출 방법 안내도 없었다. 세월호 사고 당시 승선자들은 배가 침몰하는 상황이라는 것을 인지했음에도 ‘가만히 있으라’는 안내방송을 믿고 선실에서 대기하다 탈출시간을 놓쳤다. 당시 취재 과정에서 만난 전문가들은 “선박이 정상적으로 운항할 경우 파도의 영향으로 흔들리게 된다. 운항 중 배가 흔들리지 않을 때는 문제 상황이 발생한 것으로 인식하고, 즉시 구명동의를 입고 선실 밖으로 대피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 내용을 선내 안전교육 등을 통해 승선자들에게 널리 알려야 한다고도 강조했다. 그러나 이러한 수칙은 여전히 안내되지 않고 있었다.

    순전한 무사유

    ‘그는 어리석지 않았다. 그로 하여금 그 시대의 엄청난 범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게 한 것은, 결코 어리석음과 동일한 것이 아닌, 순전한 무사유였다. (중략) 이러한 무사유가 인간 속에 아마도 존재하는 모든 악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대파멸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사실상 예루살렘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이었다.’

    철학자 해나 아렌트는 이스라엘 예루살렘에서 열린 나치 전범 아이히만의 재판을 지켜본 뒤 펴낸 저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 이렇게 썼다. 이 책에는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1년 전 많은 어른이 뼈아프게 울면서 그간의 ‘순전한 무사유’를 반성한 건 무심함과 관행이 불러온 ‘대파멸’을 목도했기 때문이다. 많은 이가 그 고통을 잊지 않고, 우리 사회의 오랜 그릇된 관행을 고치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세월호를 기억하고 있나. 그날의 기억이 과연 우리의 삶을 변화시켰을까.

    여전한 안전불감증

    도움말 · 조원철 연세대 명예교수

    ‘잊지 않았다’고 말하지 마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어
    ▲ 바퀴 알루미늄휠에 로프를 걸어 차체를 고박한 모습. 선체가 흔들릴 경우 알루미늄휠이 떨어져나갈 수 있어 위험하다.

    ‘잊지 않았다’고 말하지 마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어
    ▲ 운항 중인 카페리 화물칸에 사람이 타고 있는 모습. 상당수 운전자가 연안여객선 내에서 자신의 차에 시동을 켜둔 채 앉아 있다. 차량 진동은 선박 운항에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

    ‘잊지 않았다’고 말하지 마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어
    ▲ 대형 트럭의 한쪽 바퀴에만 비스듬히 굄목을 놓은 모습. 이 경우 배가 흔들릴 때 차량을 제대로 지지하지 못해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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