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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로 본 법률상식

정부는 자국민보호 의무를 다하라

법무부의 상식 밖 범죄인 인도

정부는 자국민보호 의무를 다하라

최근 한 지상파 방송 보도를 보고 우리 정부의 범죄인 인도 관행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됐다. 보도 내용은 이랬다. 국제적으로 기술력을 인정받고 있던 H사 대표 이모 씨는 지난해 연말 민원 문제로 집 근처 경찰서를 찾아갔다 그 자리에서 바로 구속, 수감됐다. 이씨는 소음 발생과 전력 소모를 40%까지 줄인 압축기(터보 블로워)를 개발해 미국 14개 주정부 폐품처리장에 수출하면서 대통령 표창까지 받은 견실한 기업인이다.

이씨가 미국 주정부들과 납품계약을 체결한 2009년은 오바마 정부가 만든 경제부흥법(ARRA)이 시행되던 시기였다. 미국 관공서들은 이 법에 따라 무조건 ‘미국산(Made in USA)’ 제품만 납품받아야 했다. 이씨는 미 주정부들과 논의한 끝에 제품을 반제품 상태로 미국 지사로 수출한 후 현지에서 완제품으로 만들어 납품키로 했다. 하지만 실제 이런 방식으로 해보니 납품기일을 맞추기 어렵다는 문제가 발생했다. 이때 회사 경영 전반을 맡고 있던 이씨 동생이 국내에서 제품을 완전히 조립한 후 ‘Assembled in USA(미국에서 조립)’로 표기해 미국에 보내기로 했다. 잘못된 결정을 한 것이다. 결국 수출된 제품은 미국 세관에서 원산지 표시 위반 혐의로 적발돼 압류당했고, 회사는 막대한 벌금을 낸 후 조달계약이 취소되는 손해를 입었다. 이씨는 그것으로 모든 절차가 끝난 줄 알았다.

그런데 미 수사당국은 이씨가 까맣게 모르는 새 그를 ‘사기미수’ 혐의로 수사해 기소하고 배심원 재판까지 마친 후 2012년 중순쯤 우리나라에 범죄인 인도 요청을 했다. 범죄인 인도 요청을 받은 법무부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다 2년 반이 흐른 지난해 연말이 돼서야 법원으로부터 구속영장을 받아 그를 수배자로 등재했다. 이런 사정을 전혀 몰랐던 그는 경찰서를 방문했다 느닷없이 구속됐다. 곧이어 그에 대한 범죄인 인도 재판이 열렸고 법원의 인도 허가 결정으로 조만간 미국으로 송환될 처지가 됐다.

문제는 우리나라의 범죄인 인도법상 구속영장 발부 과정에 영장실질심사 절차가 없는 데다 범죄인 인도 재판도 단심으로 끝난다는 점이다. 범죄인 인도 대상자라고 반드시 구속할 필요는 없다. 범죄인 인도법에는 ‘임의적 인도 거절 사유’라는 조항이 있다. 우리나라 국민인 경우, 범죄행위의 일부라도 국내에서 행해진 경우, 범죄의 성격과 범죄인이 처한 환경 등에 비춰 인도가 비인도적인 경우 등이 거절 사유가 된다. 자국민보호 원칙이 강하게 적용된 조항이다. 그런데 견실한 기업가이자 엔지니어인 우리 국민을 원산지 표시 위반 정도의 사기미수죄로 당사자에게 변변한 항변의 기회도 봉쇄한 채 재판 한 번으로 미국에 인도하는 건 누가 봐도 수긍이 안 되는 대목이다.

우리나라 청년을 난자한 서울 이태원 살인사건 혐의자 미국인 페터슨은 지금도 범죄인 인도 요구에 불복해 수년째 미국에서 재판이 진행 중이다. 경기 수원 토막살인사건 피의자 중국인 오원춘도 구속영장 실질심사를 받은 다음 구속됐다. 그럼에도 우리 정부는 자국민 이씨에게 항변할 기회도 주지 않은 채 일사천리로 기소와 재판을 진행하고 미국으로 보내기로 했다. 정말 이례적인 일이다.



왜 우리 정부는 주권을 행사해 자국민을 보호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은 걸까. 만약 미국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미국은 자국의 촉망받던 기업인을 원산지 표시 위반 정도의 사기미수죄로 속전속결식 기소와 재판을 통해 우리에게 인도했을까. 미국은 합리성을 기초로 건국된 신뢰할 수 있는 국가다. 우리의 인도 거절 행위를 이해하지 못할 나라로 생각되지 않는다. 지금이라도 우리 정부는 자국민보호 의무를 다하는 조치를 취하기 바란다.



주간동아 2015.03.30 981호 (p31~31)

  • 남성원 법무법인 청맥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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