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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현피’가 뭐기에

피 튀기는 ‘현피’의 맨얼굴

온라인상 언쟁이 현실 칼부림으로…조직 결성해 원정도 불사

피 튀기는 ‘현피’의 맨얼굴

“야, 이 ××, 너 진짜 뒤질래. 현피 뜨자.” “상대가 게임 중 빡치더니 현피 뜨자고 당장 찾아온대요. 무서운데 어떻게 하죠?”

‘현피’를 모르면 알아들을 수 없는 대화다. 현피는 ‘현실’의 ‘현’과 ‘PK’(Player Killing·상대 선수의 캐릭터 죽이기)의 ‘P’를 조합한 단어로, 온라인상의 경쟁 상대가 실제 만나 싸우는 것을 뜻한다. 게임 캐릭터를 자신의 분신이나 자아의 일부로 여기는 누리꾼이 게임에서 질 경우 분노해 상대방과 실제 결투를 하는 것이다.

현피보다 자주 쓰이는 단어로 ‘번개’(온라인상 지인을 실제 만남)가 있는데, 현피는 ‘싸움을 위한 번개’라고 볼 수 있다. 기성세대에겐 아직 낯설지만 10~30대 젊은층, 게임 마니아, 인터넷 포털사이트 ‘디시인사이드’나 ‘일간베스트’ 이용자에겐 친숙한 단어다.

현피라는 단어는 2000년대 초반 온라인 롤플레잉게임 ‘리니지’의 유행으로 생겨났다. 게임회사 넥슨에 다니는 A(32)씨는 “리니지에 한창 빠져 있던 고교 시절 현피라는 말을 처음 들었다”며 “워낙 인기 있던 게임이라 캐릭터 간 싸움이 치열했고, 온라인상에서 분이 안 풀린 사람들이 실제 거리로 나와 ‘맞짱을 뜨는’ 문화가 생기면서 툭 하면 ‘현피 뜨자’는 말이 오간 것으로 기억한다”고 말했다.

현피는 영화 소재가 될 만큼 뚜렷한 사회 이슈로 자리 잡았다. 3월 12일 개봉한 영화 ‘소셜포비아’는 혈기왕성한 20대 청년들의 현피 이야기다. 이 영화는 개봉 사흘 만인 14일 누적 관객 수 11만1829명을 동원해 독립영화 사상 최단 기간 관객 수 10만 명을 넘겼다. 18일 현재 누적 관객 수는 17만5400여 명이다. 영화 시나리오와 연출을 맡은 홍석재 감독은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 중독된 아이들의 세계를 그리고 싶었다”며 “현피라면 각본을 쓸 만한 흥미진진한 소재라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복수에 집착한 ‘묻지 마 살해’

현피는 언뜻 보면 ‘마이너 문화’로 치부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인터넷 문화가 실제 폭력을 초래한다는 면에서 점차 심각한 사회 문제로 인식되고 있다. 현피는 성별과 연령, 폭력 수위를 가리지 않는다. 2008년에는 대구의 초등학생 20여 명이 온라인게임 중 욕설을 주고받다 실제로 만나 ‘집단 난투극’을 벌였고, 2012년에는 서울 서대문구 창천동 한 공원에서 대학생이 온라인에서 만난 고등학생에게 살해된 사건이 있었다. 2월 5일 서울 양천구에서는 여성 2명이 SNS 페이스북 사진 댓글을 두고 시비가 붙어 서로를 폭행했다. 양천경찰서 형사팀 관계자는 “1990년대 PC통신 시절부터 조금씩 발생하던 현피가 SNS 및 인터넷 문화 확산으로 점점 늘어나는 추세”라고 밝혔다.

피 튀기는 ‘현피’의 맨얼굴

20대 청년들의 ‘현피’를 그린 영화 ‘소셜포비아’.

현피로 발생하는 폭력은 다른 폭력 사건과 구분되는 특성이 있다. 첫째, 처음 본 사람에게 마구잡이로 분노를 표출한다. 2014년 11월 경기 수원에서 일어난 현피 칼부림 사건의 속성이 그렇다. 경기 평택에 사는 정모(38) 씨는 모바일게임에서 만난 박모(30) 씨를 공격하려고 수원으로 갔다. 자신보다 나이가 어린 박씨가 온라인에서 반말을 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정씨는 박씨를 만나자마자 얼굴과 가슴을 구타했고, 박씨가 저항하자 미리 준비한 흉기로 박씨를 수차례 찔렀다. 박씨는 곧바로 병원에 실려갔고 정씨는 살인미수 혐의로 경찰에 구속됐다.

현실에서 처음 만난 사람에게 격분하는 이유는 뭘까. 이장주 중앙대 심리학과 겸임교수는 “관계의 역사가 없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이 교수는 “현실에서 아는 사람에게는 극단적인 행동을 하기 어려운데 이는 관계의 역사가 있기 때문이며, 관계의 역사가 있다는 것은 앞으로도 볼 일이 있다는 의미다. 하지만 현피의 경우는 관계의 역사가 없고 앞으로도 볼 일이 없기 때문에 흥분된 감정을 제어하기 어렵다”고 분석했다.

둘째, 먼 지역으로 ‘원정’도 마다하지 않는다. 2013년 7월 한 남성이 광주에서 부산까지 가서 여성을 살해한 사건이 있었다. 남성 백모(30) 씨와 여성 김모(30) 씨는 인터넷 커뮤니티 디시인사이드의 ‘정치사회갤러리’ 이용자였다. 비슷한 정치관을 공유하던 두 사람은 백씨가 김씨를 성적으로 조롱하면서 관계가 틀어졌고, 김씨는 백씨를 ‘명예훼손죄로 고소한다’는 내용의 고소장 사진을 온라인 게시판에 올렸다. 분노한 백씨는 채팅 사이트를 통해 김씨의 주거지를 알아낸 후 광주에서 버스를 타고 부산으로 가 김씨가 외출하는 틈을 노려 김씨를 무참히 살해했다.

곽대경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현피를 행하는 사람은 상대방이 어디 있든 상관없이 찾아갈 확률이 높다”며 “자신이 받은 상처를 되갚는 데 매달리기 때문에 남에게 복수하는 과정이 길어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특히 직업이 없거나 사회적 외톨이인 경우 복수에 더 집착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김씨를 살인한 백씨도 무직이었다.

셋째, 재빨리 조직을 결성한다. 특히 온라인게임의 경우 싸움 분파가 나뉘기 때문에 ‘동지’끼리 뭉치기가 쉽다. 온라인 특성상 모집 공고도 빨리 전파된다. 게임사이트 게시판에는 ‘현피 멤버 구해요. 유단자 이상만 연락 바람’ 등의 글이 올라오고 댓글 수십 개가 달린다.

2010년 9월 대구에서는 ‘리니지’를 인터넷 방송으로 중계하던 이모(24) 씨가 방송 도중 집단 구타를 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씨는 방송에서 상대 ‘혈맹’(게임 이용자들의 연합체)을 종종 비하했고, 이에 화가 난 이용자 8명이 수도권, 전라도 지역에서 대구까지 이동해 ‘조직’을 결성, PC방에 있던 이씨를 덮친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복수 자체가 목적인 만큼 싸움이 끝나면 흩어진다. 영화 ‘소셜포비아’에서도 여주인공에게 현피를 신청한 남성 10여 명이 분노 반 호기심 반으로 금세 뭉치지만, 뜻이 안 맞으면 조직에서 쉽게 탈퇴하는 모습을 보인다. 결성이 빠른 만큼 결속력은 떨어지는 ‘현피 집단’의 속성이다.

피 튀기는 ‘현피’의 맨얼굴
“재미난 볼거리” 10대 구경꾼들

해외에서도 현피가 발생한다. 2월 미국 앨라배마 주에서는 현피로 만난 10대 소녀 3명 중 1명이 총에 맞아 숨지고 2명이 중상을 입었다. 이들은 3주 동안 페이스북에서 이성 문제로 논쟁을 벌이다 싸움이 격화되자 실제로 만났는데, 소녀들과 친구였던 남학생 2명이 싸움을 지켜보다 총을 쏜 것으로 알려졌다. 2012년에는 중국에서 온라인게임으로 설전을 벌이던 10대 소년 12명이 난동을 부려 2명이 흉기에 찔렸고, 2007년 러시아에서는 자신의 게임 캐릭터를 죽인 데 화가 난 남성이 다른 남성 회원을 구타해 살해한 사건이 있었다.

현피는 폭력 사태를 방조하는 ‘구경꾼’을 양산하고 있다. 인터넷에서 현피 동영상을 검색하면 실제 현피 사건을 찍은 영상들을 볼 수 있다. 2013년 9월 인터넷 동영상 공유 사이트 유튜브에 올라온 영상 ‘디시인사이드 애니갤러리 코믹월드 현피’는 충격적이다. 10대 소년 2명이 길거리에서 거칠게 몸싸움을 벌이는 동안 30여 명의 아이들은 싸움 장면을 휴대전화로 촬영하며 웃고 있다. 아스팔트 길 위에 몸이 질질 끌리고 옷이 벗겨지는 상황에서도 누구 하나 이들을 말리지 않는다. 이장주 교수는 “온라인상의 싸움이 오프라인으로 연장되는 것은 이들에게 재미난 볼거리일 뿐”이라며 “구경꾼이 많아질수록 심리적으로 책임감이 분산돼 누군가가 나서 중재하기 어려운 상황이 된다”고 분석했다.

이러한 구경꾼 문화는 장난삼아 현피를 하는 10, 20대에게서 주로 발생한다. 신진욱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인터넷상의 폭력적, 극단적 담론이나 대인관계는 정체성이 아직 확립되지 못한 10대부터 20대 중반까지의 연령층에 강한 영향을 미친다”고 설명했다.

“한국 사회에서는 청소년의 심리적 강압과 스트레스가 큰 편이다. 그들의 내면에 쌓인 분노와 공격성은 일차적으로 온라인에서 표출되고, 그다음 실제 폭력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아이들이 아무 생각 없이 폭력을 방조하는 사태를 막으려면 가정과 학교에서 비폭력적 표현과 갈등 해결을 적극적으로 교육할 필요가 있다.”

홍석재 영화감독 인터뷰

“‘집단 현피’의 맹목성 고발하고 싶었다”


피 튀기는 ‘현피’의 맨얼굴
홍석재 영화감독(사진)은 1983년생으로 PC통신, 인터넷의 진보와 함께 성장한 세대다. 그는 2008 베이징올림픽 때 일어난 현피 사건에서 영화 ‘소셜포비아’의 영감을 얻었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놓친 우리나라 선수에게 한 여성 누리꾼이 비난조의 댓글을 달았고, 이에 분노한 남성 누리꾼들이 여성의 집 앞에 모인 사건이었다. 영화 ‘소셜포비아’ 역시 한 여성 누리꾼이 자살한 탈영병의 뉴스를 보고 ‘잘 죽었다’며 조롱하는 데서 시작한다. 이를 본 스무 살 남짓의 남성들이 여성의 ‘신상털이’를 하고 장난 반 호기심 반으로 현피 원정대를 꾸린다. 여성이 자살한 시체로 발견되면서 원정대 멤버들은 충격에 빠지고, 여성이 죽은 진짜 원인을 찾으려고 서로를 의심하며 또 다른 현피를 이어간다는 내용이다.

홍 감독은 영화를 통해 현피의 무엇을 드러내고 싶었던 걸까. 그는 ‘맹목적 집단성’을 강조했다.

“만약 한 사람이 일대일 현피를 신청했다면 실제 행동으로 옮기기 전 수없이 고민했을 것이다. ‘내가 뭐하는 거지?’라는 자문도 했을 테고. 하지만 현피가 명분을 얻고 집단화되면 이 집단은 스스로에게 쉽게 도취된다. 자신들의 행동이 합리적인지,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지 이성적인 판단이 없다. 다만 집단적 에너지를 쏟아내는 것 자체를 즐길 뿐이다.”

감독이 말하는 현피의 또 다른 속성은 ‘과시욕’이다. 그는 온라인상에서 ‘현피 뜨자’는 말은 수없이 봤지만, 누리꾼 ‘정모’(정기모임)에 나갔을 때 현피에 참여했다는 사람은 한 명도 못 봤다고 했다.

“온라인상에서 싸움이 붙으면 누가 더 ‘세게’ 나올 수 있느냐로 승자가 갈린다. 이때 익명성을 버리고 현실로 나오면 더 용기 있는 자로 인정받는다. 현피는 온라인 싸움꾼이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려는 가장 강렬한 행동이다. 하지만 이를 실제로 행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현피한다고 고지된 장소에 나가 보면 구경꾼만 모여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주간동아 2015.03.23 980호 (p30~32)

  • 김지현 객원기자 bombo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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