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79

2015.03.16

여신으로 부활한 이루지 못한 사랑

보티첼리 ‘비너스의 탄생’

  • 황규성 미술사가 samsungmuseum@hanmail.net

    입력2015-03-16 11:5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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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신으로 부활한 이루지 못한 사랑

    비너스의 탄생(The Birth of Venus), 산드로 보티첼리, 1485년, 이탈리아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소장.

    르네상스 명화 가운데 ‘봄’ 하면 떠오르는 그림은 산드로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1445~1510)의 1485년 작 ‘비너스의 탄생’일 것입니다.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비너스가 탄생한 순간을 그린 그림으로, 바다의 물거품에서 탄생한 비너스가 조개껍데기를 타고 키프로스 섬 해변에 도착한 순간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림 크기는 가로 278cm, 세로 172cm 정도로 가로가 긴 직사각형 구도입니다. 화면 중앙에는 부채살 모양의 커다란 조개껍데기 위에 금발의 비너스가 나체로 서 있습니다.

    조개껍데기 위 비너스는 멍한 시선으로 정면을 바라보며 수줍은 듯 오른발을 살짝 뒤로 빼고 서 있습니다. 비너스의 왼쪽 어깨는 오른쪽 어깨보다 아래로 처져 있는데, 오른손으로는 자신의 가슴을 가리고, 왼손으로는 무릎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카락을 잡아 음부를 가리고 있습니다. 머리와 상반신, 하반신이 세 번 휘어진 삼곡(三曲)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불그스름한 양쪽 볼과 입술은 사랑스럽고, 양감 묘사가 거의 없는 피부는 백옥같이 하얗게 채색돼 창백하지만, 신비롭고 마치 바람에 날아갈 듯 가볍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비율이 맞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비너스의 신체 비율이 10등신에 가까운 데다 고개는 왼쪽을 향하지만 시선과 자세는 정면을 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보티첼리는 시모네타 베스푸치라는 여인을 짝사랑했습니다. 시모네타는 당시 피렌체를 대표하는 손꼽히는 미인이었지만 불행히도 약혼한 상태였고 폐결핵을 앓고 있었습니다. 어느 따뜻한 봄날 시모네타는 세상을 떠났고, 보티첼리는 그녀를 영원히 기억하고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많은 작품에서 시모네타는 아름다운 여신으로 등장합니다.



    다시 그림으로 돌아와, 화면 왼쪽에는 바람의 신 제피로스와 그의 연인 클로리스가 서로를 끌어안은 채 비스듬히 하늘을 날아오르고 있습니다. 거의 나체 상태인 두 사람은 목에 하늘빛 큰 천을 망토처럼 묶고 있고, 그 천들이 바람에 날리면서 신체의 중요 부위만 가리고 있습니다. 제피로스는 비너스를 해변으로 보내기 위해 두 볼이 한껏 부풀어 오를 만큼 있는 힘껏 입으로 꽃바람을 불고 있습니다.

    제피로스는 크고 검은 날개를 단 채 바다 위를 날고, 클로리스는 두 손으로 그의 허리춤을 꼭 껴안고 있습니다. 두 사람은 마치 공중을 달리는 것처럼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그 주위에는 10여 개의 분홍빛 꽃이 흩날리며 봄의 정취를 느끼게 해줍니다.

    화면 오른쪽 섬에서는 봄의 여신 플로라가 해변에 도착한 비너스에게 봄처럼 고운 분홍색 망토를 걸쳐주려 하고 있습니다. 오른손을 높이 들어 펼친 분홍색 망토에는 데이지와 수레국화 등 봄꽃 장식이 빽빽하게 수놓아져 있는데, 서두르다 보니 망토가 바람에 흩날립니다. 그리스?로마 신화에선 제피로스에게 안겨 있는 클로리스가 후에 봄의 여신 플로라로 변합니다. 따라서 한 화면에 둘을 분리해 그린 것은 비너스의 탄생과 함께 봄이 왔음을 의인화해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황규성은 고려대와 동국대에서 미술사를 전공하고 삼성미술관 리움에서 선임연구원으로 근무했다. SC제일은행이 추진한 ‘시각장애인을 위한 명화해설 서비스 - 착한도서관 프로젝트’를 수행했으며, 눈으로 직접 볼 수 없는 이들을 위해 명화를 해설하는 기법으로 ‘주간동아’에 ‘그림 읽어주는 남자’를 연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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