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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 취업, 고시가 되다 02

‘스펙’ 안 본다고? 말장난일 뿐

구체적 채용 기준 없어 더 혼란스러운 구직자들

‘스펙’ 안 본다고? 말장난일 뿐

‘스펙’ 안 본다고? 말장난일 뿐
대기업 입사지원서에서 ‘스펙’난이 사라지고 있다. 최근 SK그룹이 올 상반기 대졸 신입사원 채용에서 ‘탈(脫)스펙’을 선언했다. 이번 3월 SK그룹 공개채용(공채) 지원자는 이력서에 외국어 성적, IT(정보기술) 활용 능력, 해외연수 경험, 수상 실적, 인턴 경험, 논문 내용을 쓸 필요가 없다. 증명사진도 부착하지 않는다. LG그룹은 2014년 하반기 공채부터 입사지원서에 공인어학시험 성적 및 자격증, 수상 실적, 봉사활동 내용과 가족관계, 현주소 등의 입력란을 없앴고, 현대자동차는 이번 상반기 대졸자 서류전형에서 동아리·봉사활동 기재란을 삭제했다.

그 대신 자기소개서나 면접, 영어회화 능력 평가 비중은 올라가는 추세다. LG그룹 관계자는 “지원자의 자기소개서 평가가 더 중요해질 것”이라고 밝혔다. 기아자동차는 이번 상반기 공채에서 1박 2일 심층면접을 도입했고, 현대자동차는 영어 면접 난도를 일상 대화에서 토론 수준으로 높였다(표 참조).

회당 10만 원 취업 특강도

채용시장의 ‘스펙 줄이기’ 현상은 직무에 대한 이해도와 전문성, 실제 영어 활용 능력이 있는 지원자를 가려 뽑겠다는 의도다. 기업들은 불황으로 채용 인원이 줄자 ‘바로 현장에 투입할 수 있는’ 인재를 원하고 있다. 이에 실제 업무 능력과 연관이 적은 일부 ‘스펙’은 아예 보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SK그룹 관계자는 “구직자의 업무 적합성을 파악하고자 출신 대학과 전공, 학점 등 최소한의 항목만 남겼다. 인재 선발 시 창의성과 역량에 집중할 것”이라며 “일부 ‘스펙’을 삭제함으로써 구직자의 부담과 사회·경제적 비용이 줄어들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과연 그럴까. ‘탈스펙’ 현상은 제2의 취업 사교육시장을 형성하고 있다. 기자가 만난 구직자들은 각종 ‘취업전문학원’으로 몰리며 또 다른 경쟁에 허덕이고 있었다. 3월 8일 서울 강남역 부근 A학원. 서류전형 대비반, 금융계 취업반, 대기업 인·적성검사시험 대비반 등을 운영하는 곳이다. A학원의 한 직원은 “스펙이 낮아도 자기소개서, 면접에서 높은 점수를 얻으면 대기업에 취업할 수 있다”며 학원 졸업생 중 2014년 대기업 공채 합격자의 명단을 보여줬다. 대학별 이름과 학점, 나이, 토익점수 등이 나와 있었다. 이 직원은 “지난해 합격자 중 수도권과 지방 소재 대학 출신이 40% 이상”이라고 홍보했다.

오후 3시 금융계 취업반 수업이 끝나자 수강생 30여 명이 강의실에서 나왔다. 20대 초반부터 30대 중반까지 연령이 다양했다. 수강생 정모(27) 씨는 성균관대 졸업생으로 토익점수 900점 이상, 학점 4.3 만점에 3.7, 인턴 경험도 2곳에서 했다. 그는 더 쌓을 ‘스펙’이 없던 차에 A학원에 등록했다. 이전부터 가고 싶었던 금융계 취업에서 탈락하자 마지막 수단으로 선택한 것이다. 정씨는 “학원에 오기 전에는 ‘우물 안 개구리’였다”고 말했다.

“대학 경력개발센터에서 무료로 들은 취업 강의와는 확실히 다르다. 금융계 취업에 유리한 지식, 면접 태도를 전문적으로 배울 수 있다. 같은 반 수강생들의 ‘스펙’이 비슷해 더 열심히 노력하게 된다. 한 달 수강료는 40만 원이지만 수업을 안 들으면 홀로 뒤처질 것 같아 아르바이트로 학원비를 충당하고 있다. 현재 기업 재직자의 특강도 있는데 1회에 10만 원이라 고민 중이다.”

인근 B학원 수강생 이모(26·여) 씨는 지방대 졸업생. 취직이 안 되자 100만 원을 내고 소수정예(10명 이하)로 운영되는 취업반에 등록했다. 기업 인사팀 경력이 있는 강사들이 자기소개서, 면접 방법, 기업 분석 기법을 알려준다. 수강생의 손짓이나 눈짓, 목소리 톤을 교정하고 수강생의 인생에 대해 대화하는 과정에서 자기소개서에 쓸 소재를 이끌어낸다. 관심 있는 기업의 인재상을 구체적으로 알려주기도 한다. 수강 기간은 ‘원하는 곳에 취업이 될 때까지’다.

이씨는 “수강료가 비싸지만 어쩔 수 없다”며 “‘학원에 진작 올걸’ 하는 후회가 든다”고 말했다.

“외부에서 얻을 수 없는 기업정보를 학원에서 알 수 있다. 내가 가고 싶은 회사가 개인적 성향보다 협동력을 중시한다는 것과 집중적으로 육성하는 분야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회사 인터넷 홈페이지에 올라온 인재상과 연혁을 달달 외웠던 시간이 아깝다. 올해 상반기가 지나도 취업이 안 되면 150만 원이라도 내고 강사에게 일대일 과외를 받아야겠다.”

‘스펙’ 안 본다고? 말장난일 뿐

‘탈스펙’ 채용이 확대되고 있지만 취업 경쟁은 더 심화될 전망이다. 입사지원서에 일부 ‘스펙’을 삭제한 SK그룹, LG그룹, 현대자동차그룹 본사.

업무 역량도 ‘스펙’ 없이는 못 쌓아

취업교육의 양극화도 뚜렷해지고 있다. 학원비를 낼 여력이 안 되는 구직자는 자기소개서 대필업체에 몰린다. 자기소개서도 톡톡 튀어야 눈에 띄니 구직자의 실력으로는 쓰기가 어려워진 것이다. 인터넷 포털사이트 블로그의 ‘L 대필업체’에 문의했다. 기본 4항목(성장 과정, 지원 동기, 인생 중 힘든 시기를 극복한 이야기, 업무에 대한 포부) 2500자에 10만 원을 받는다고 했다. 구직자가 대강의 자기소개서를 써 e메일로 보내면 인생의 성공과 실패담을 더 극적인 내용으로 수정하는 식이다.

취업학원에 다닐 여유가 안 되는 구직자는 “뭘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답답해한다. 이화여대 졸업 후 외국계 금융회사 인턴으로 일하는 김모(24·여) 씨는 기업들의 ‘탈스펙’ 전형을 비판했다.

“기업이 남다른 능력과 스토리를 원하는 이유는 알겠다. 하지만 구직자 나이가 대부분 스물대여섯인데 그 인생 동안 드라마틱한 성공과 실패가 얼마나 있을 수 있겠나. 나는 대학 입학 후 모든 등록금과 용돈을 스스로 벌었는데 ‘가난 극복 스토리’라도 이야기하라는 건가. 이전엔 기업이 ‘성실성’을 본다고 해서 학점 관리를 열심히 했는데 이제는 ‘창의성’이라니, 그것을 판단할 객관적 기준도 없고 뭘 준비해야 할지 몰라 혼란스럽다.”

가천대를 졸업한 윤모(26) 씨는 “기업이 중시하는 ‘직무 역량’은 인턴 경험에서 얻는 것인데, 인턴은 학벌이나 집안 배경 등 ‘스펙’으로 선발하는 것 아니냐”고 지적했다.

“학교가 ‘인 서울’(서울 소재 대학)이 아니라서 인턴십을 하기가 힘들었다. 같은 학교 친구들도 특별히 유능하거나 기업에 부모 인맥이 있는 경우에만 인턴이 됐다. 인턴 기회부터 ‘스펙’으로 걸러지는 것이다. 결국 직무 역량을 보는 것은 ‘탈스펙’이 아니라 ‘스펙 위 스펙’을 추구하는 것이다.”

‘탈스펙’이 ‘기업들의 말장난’이라는 비판도 나왔다. 지난해 상반기 현대자동차 공채 최종면접에서 탈락한 이모(25·여) 씨는 “스펙에 대한 기존 개념이 바뀌었을 뿐 실력 경쟁은 여전하다”고 말했다.

“현대자동차 서류전형에서는 공모전 참가나 수상 경력 등을 쓸 칸이 적었다. 하지만 면접에 갔더니 지원자들의 화려한 경력이 드러났다. 책을 냈거나 발명을 했거나 창업 경험이 있는 등 다들 쟁쟁하더라. 학력이나 영어 실력도 거의 비슷하게 높았다.”

반면 기업들의 채용방식 변화가 장기적 관점에서 긍정적이라는 평가도 있다. 취업컨설팅업체 ‘이커리어’의 홍준기 대표는 “탈스펙의 성과를 논하기는 이르지만 긍정적인 효과도 존재할 것”이라고 말했다.

“자기 경험에 가치를 부여하고 이를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능력과 조직 적응력이 뛰어난 입사자가 기업에서 오래 살아남고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탈스펙’ 채용은 바람직한 현상이라 볼 수 있다. 다만 구직자 간 경쟁이 더 치열해지고, 기업의 눈이 더 높아질 것은 분명하다.”

본격적인 채용 시즌이 됐지만 구직자들의 어깨는 무겁기만 하다. ‘스펙’을 보든 안 보든 취업 고개는 여전히 가파르다. 대기업들이 말하는 ‘과도한 스펙 쌓기 비용 줄이기’는 과연 현실화될 수 있을까.



주간동아 2015.03.16 979호 (p24~25)

  • 김지현 객원기자| bombo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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