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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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국가, 애국심에 대한 진지한 성찰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아메리칸 스나이퍼’

  • 강유정 영화평론가·강남대 교수 noxkang@daum.net

    입력2015-01-26 10: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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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 국가, 애국심에 대한 진지한 성찰
    영화계에서 보수적이라는 평가는 일종의 낙인과 같다. 한국 영화계만 그런 게 아니다. 할리우드나 유럽처럼 제 나름 이름을 걸고 영화를 찍는 작가주의 세계에서는 더욱 그럴 것이다. 그런데 여기 한 명의 예외가 있다. 바로 클린트 이스트우드다. 영화 연출을 시작한 뒤 그는 줄곧 공화당원 출신의 보수주의자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닌다. 그럼에도 멋진 보수주의자라는 평가도 함께 듣는다. 그런 그가 이번엔 정치적 성향과 무척이나 밀접한 소재를 다룬 영화 ‘아메리칸 스나이퍼’를 연출했다. 미국, 저격수, 이 두 단어가 연상케 하는 그 무엇, 그렇다. 영화 ‘아메리칸 스나이퍼’는 철저히 미국을 위해 총을 든 한 남자에 대한 이야기다.

    이 영화는 동명의 자서전을 원작으로 삼고 있다. 즉 실존인물이 주인공인 영화다. 주인공 크리스 카일은 서른 살이 넘은 나이에 미국 해군의 엘리트 특수부대 네이비실에 지원한다. 원래 카우보이가 되고 싶었던 그는 군인이 된 뒤 자신의 뛰어난 사격 실력을 발견한다. 그러다 거실 TV에서 9·11테러를 목격하고 미국인으로서 좌절감과 분노를 느낀다. 이후 중동에 파병돼 과격파 무슬림 160명 이상을 저격한다. 그가 죽인 적의 수는 이 정도지만 그가 구한 아군, 즉 미군의 수는 몇 배 더 많을 것으로 여겨진다. 말하자면 그는 미국의 영웅이 된 것이다.

    ‘아메리칸 스나이퍼’는 뛰어난 저격수를 묘사하지만 그를 규정하지는 않는다. 영웅이라고 과장해 칭송하거나 살인 기계로 폄하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그는 그저 한 명의 미국인으로서 조국을 사랑하고, 미국의 명예를 지키고자 했으며, 동료를 보호하려 했다. 그에게 최고 윤리는 곧 국가, 미국이었던 셈이다.

    ‘국가를 사랑한다’는 말에는 어떤 갈등이나 잘못이 없다. 하지만 이 평범한 서술문을 감독은 입체화한다. 가령 적의 동태를 살피는 저격수 크리스의 눈에 한 소년이 보인다. 소년은 지금 어떤 여성으로부터 폭탄을 건네받는 중이다. 소년 앞에는 미군 전차와 수십 명의 미군이 다가오고 있다. 크리스는 잠시 망설이지만 이내 소년을 저격한다. 그게 더 많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며 특히 아군을 살리는 길이기 때문이다.

    이런 장면도 나온다.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된 크리스가 다시 전쟁터로 가려 하자 아내가 눈물을 흘리며 잡는다. ‘당신은 남편이자, 아버지’라고 말이다. 하지만 크리스는 “아직 내가 해야 할 일이 있고, 지켜야 할 동료가 있다”며 다시 전장으로 떠난다. 그는 자신보다, 또 가족보다 국가를 더 생각한 애국자였다.



    이스트우드 감독은 주인공의 애국심을 보여주지만 그것이 그를 행복하게 했다고 말하지는 못한다. 크리스는 오히려 미국의 안전한 일상에서 더 큰 불안감을 느낀다. 전쟁 리듬이 몸에 밴 그는 평소에도 예민함을 버리지 못한다. 잔디 깎는 기계 소리에 긴장하고, 끼어드는 차를 마치 테러 차량처럼 경계한다.

    안타깝게도 크리스는 다른 참전 용사의 총탄에 목숨을 잃는다. 미국인을 살리고자 절치부심했지만 미국인에게 살해당한다. 이스트우드 감독은 이 아이러니를 보여줄 뿐 특별히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지 않는다. 크리스의 죽음으로 특정 감정을 유도하지도 않는다. 다만 그런 아이러니한 삶을 살았던 한 남자에 대해 한 번쯤 깊이 고민하게 만들 뿐이다. 과연 전쟁이란, 국가란, 애국심이란 무엇인가라고 말이다. 진정한 질문을 찾고 조용히 물어보는 힘, 어쩌면 진정한 보수란 쉽게 답을 내릴 수 없는 문제를 발견하고 사유하는 능력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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