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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

“우물 안 한국 정치학계 케이팝 경쟁력을 배워라”

‘한국적 정치외교 연구’ 학술대회 “서구 이론 추종 아닌 한국식 정치외교학 재창조해야”

“우물 안 한국 정치학계 케이팝 경쟁력을 배워라”

“우물 안 한국 정치학계 케이팝 경쟁력을 배워라”

11월 7일 한림국제대학원 한림홀에서 열린 추계학술회의 모습.

11월 7일 서울 강남구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한림홀에서는 ‘한국적 정치외교(사) 연구방법 모색’이라는 주제로 추계학술회의가 열렸다. 한국정치외교사학회(회장 김영명 한림대 교수)와 한글문화연대(대표 이건범)가 공동 주최한 이날 학술회의에서는 이진명 한국외대 교수가 ‘서구 정치외교사 연구방법 수용실태와 문제’를, 윤태룡 건국대 교수가 ‘한국적 정치외교(사) 연구방법 모색의 기본방향’을, 엄상윤 세종연구소 연구위원이 ‘한국적 정치외교(사) 연구방법 개발·적용의 실천방향’을 주제로 발제했고, 지정토론이 이어졌다.

발제자와 토론자들은 ‘그동안 한국 정치학계는 서구 이론을 그대로 도입해 한국의 정치 현상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었다”는 문제인식에는 공감했지만, ‘한국적 시각’이 꼭 필요한지, 한국적 연구 방법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두고는 의견이 엇갈렸다. 한 참석자는 “주로 서구에서 공부한 교수들이 중심인 한국 학계에서 ‘한국적’을 주장하는 것은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라며 “이런 학술회의를 연 자체만으로도 한국적 연구의 필요성에 대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됐을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주간동아’는 이날 학술회의에서 기조 발제한 엄상윤 세종연구소 연구위원에게 의뢰해 한국적 정치외교(사) 연구방법이 필요한 이유를 싣는다.



정치학계와 케이팝(K-pop). 뜬금없는 소리처럼 들릴 수도 있다. 정치학자들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학문적 이야기를 일반 독자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리 정치학계가 케이팝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한류가 세계 도처에서 선풍적 인기를 끌고 있다. 이런 한류를 케이팝이 주도하고 있다. 케이팝은 본래 우리 음악 장르가 아니다. 서구 팝송에 뿌리를 두고 있다. 케이팝은 서구 팝송에 우리 정서와 생각을 담아 ‘한국식으로 재창조’한 것이다. 세계인의 귀에 익숙한 서구 음악 장르를 빌리고 있을 뿐이다. 그런 케이팝이 세계 젊은이들을 열광케 하고 있다. 케이팝 때문에 한국을 궁금해하고, 한글은 물론 한국의 문화, 역사, 정치, 경제를 배우는 외국인도 늘고 있다.

케이팝의 발전 과정은 서구에서 수입한 지식이 어떻게 한국식으로 재창조되고 역수출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처음엔 서구의 노래와 춤을 수입해 소개하는 데 주력했다. 그러다 서구 팝송을 모방하거나 일부 기법을 수정해 우리 정서를 담아내는 노래와 춤을 선보였다. 그리고 마침내 한국식 팝송 기법을 독창적으로 창조해 우리 정서를 마음껏 담아내는 노래와 춤을 양산했다. 이런 노래와 춤이 케이팝이라는 브랜드를 달고 팝송 본산지인 서구를 비롯해 전 세계로 역수출되고 있다. 세계 시장에서 선두 경쟁을 벌이는 삼성전자 휴대전화와 현대자동차그룹의 차도 유사한 발전 과정을 거쳤다.

그런데 우리 정치학계의 현실은 어떤가. 서구 정치외교학 수입이 본격화된 지 60여 년이 지났지만, 우리 정치학은 아직 서구 정치외교이론을 수입해 소개하고 모방하는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아니, 서구 정치외교이론을 적극 추종하고 모방하는 것이 학문의 정도(正道)인 것처럼 여기는 풍조가 지배하고 있다. 학생들에게는 “수출해야 먹고산다”고 역설하면서도, 학자 자신은 수입에만 골몰한다. 물론 서구 정치외교이론 수입 그 자체가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서구 것이든, 어디 것이든 앞서가는 정치외교이론은 많이 수용하고 배워야 한다. 현대 정치외교학의 본산지가 서구라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한국의 정체성이 구현된 ‘한국적 정치외교이론’ 개발은 우리 정치학계에 부여된 중대한 사명이다. 한국 정치학계도 우리 정서를 마음껏 담아낼 수 있는 한국식 팝송을 독창적으로 개발한 케이팝의 정신을 적극 본받아야 한다. 그 이유는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우리 실정에 맞는 한국적 정치외교이론 개발이 긴요하다. 서구식 노래와 춤은 서양인의 정서와 체구에 맞춘 것이다. 우리 정서와 체구는 서양인과 다른 점이 많다. 따라서 우리 정서와 체구에 맞는 노래, 춤을 개발한 것이 바로 케이팝이다. 서구 정치외교이론은 대부분 서구의 정치외교 현상을 설명, 평가하고 대안을 모색하고자 개발된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정치외교 현상은 ‘한국적 특수성’이 매우 강하다. 분단의 질곡과 역사적 과제인 통일, 급속한 경제 발전과 민주화, 뿌리 깊은 정치 사회의 양극화와 남남갈등, 정치적 리더십의 부재, ‘여의도 정치’의 후진성, 미·중 사이에서 전략적 선택의 고민, 적과 친구의 양면성이 교차하는 남북관계 등등. 따라서 서구 정치외교이론을 적용해 우리의 정치외교 현상을 설명, 평가하고 대안을 모색할 경우 한계에 부딪히고 큰 문제도 야기할 수 있다.

둘째, 이념적 양극화와 편향성 극복을 위해서도 한국적 정치외교이론 개발이 필요하다. 팝송 기법은 노래와 춤이 작동하는 일종의 메커니즘이다. 노래와 춤을 모두 아우르면서 노래와 춤이 조화를 이룰 수 있게 해준다. 이런 기법이 없으면 노래와 춤이 따로 놀게 된다.

“우물 안 한국 정치학계 케이팝 경쟁력을 배워라”

엄상윤 세종연구소 연구위원.

학문 세계에서는 ‘이론’이 이런 기법 구실을 한다. 사회과학적 이론은 사회 현상이 작동되는 메커니즘을 ‘과학적으로’ 규명하는 기법이다. 과학적 기법은 유용성과 한계,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 장점과 단점을 모두 아우르면서 ‘합리적’이고 ‘균형 잡힌’ 분석, 평가, 대안 모색을 가능하게 해준다.

그런데 한국 정치학계는 우리 실정에 맞는 과학적 잣대가 아니라 ‘편향적 이념의 잣대’로 정치외교 현상을 분석, 평가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경향이 지배하고 있다. 특히 현대 한국 정치외교사의 경우 좌편향 혹은 우편향적 이념의 잣대로 분석 및 평가 결과를 미리 정해놓고 ‘짜맞추기식’ 분석을 시도하거나 ‘싸잡아 평가’하는 경향이 난무한다. 정치학자들이 한국 정치사회의 양극화를 조장하고 확대 재생산하는 데 선도적 구실도 하는 것이다.

노래만 혹은 춤만 춰야 한다고 주장하는 정치학자가 허다하다. 노래만으로는, 춤만으로는 우리 정치외교 현상을 균형 있게 이해할 수도 없고 적실성과 현실성이 탁월한 대안도 모색할 수 없다.

셋째, 적실성과 유용성이 높은 대안 모색을 위해서도 한국적 정치외교이론 개발해야한다. 팝송 기법은 그 자체가 청중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아니다. 청중은 노래를 듣고 춤을 보면서 감동한다. 가사의 한 구절, 가수의 손짓 하나에 매료된다. 팝송 기법은 노래와 춤의 개발 방향을 제시해준다. 팝송 기법은 가사 후보에 오른 여러 단어와 춤 후보에 오른 여러 몸·손·발 동작 가운데 어떤 것을 버리고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하는지에 대한 판별 기준도 제공한다. 이런 방향과 판별 기준이 없거나 부실하면 감동을 주는 노래와 춤도, 노래와 춤의 멋진 조화도 기대하기 어렵다.

사회과학에서는 이론이 이런 기법 구실을 한다. 이론이 대안으로 수립, 추진돼야 정치외교 현상이 바뀔 수 있다. 이론은 대안 개발의 방향을 제시하고, 다양한 대안 가운데 특정 대안을 취사선택할 수 있는 판별 기준을 제공한다. 홉스, 로크, 루소의 사회계약설은 민주주의가 발전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줬다. 새뮤얼 헌팅턴의 문명충돌론은 탈냉전 이후 미국 외교정책의 기본 방향을 제시해줬다. ‘역사를 바꾸는 것이 학자’라는 말이 그냥 나온 게 아니다. 우리에게 적실하고 유용한 대안을 모색하려면 한국적 정치외교이론 개발이 선행, 전제돼야 한다.

따라서 케이팝처럼 우리 정치학계도 서구 정치외교학을 한국식으로 재창조해야 한다. 한국적 정치외교이론은 ‘한국적 특수성’에서 착안해 개발해야 한다. 서구 정치학자들은 한국적 특수성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다. 따라서 한국적 정치외교이론이 케이팝처럼 서구에 역수출되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한국식 팝송 기법을 재창조해 우리 정서와 생각을 마음껏 노래한 케이팝처럼, 우리의 정치외교적 사안들을 우리 시각과 방법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리고 우리의 정치외교 발전과 국가적 생존 및 번영을 기약하기 위해서는 한국적 정치외교이론 개발이 절실하다. 이런 이론들이 축적되면 한국적 정치외교학을 서구에 역수출하는 길이 열릴 수도 있다.

학계에선 이미 30여 년 전 ‘한국적 정치외교학’을 부르짖는 구호가 등장했으니 이런 이야기가 새로운 것은 아니다. 다산 정약용 선생과 그 제자들은 이미 200년 전 유사한 고민을 했고 몸소 실천했다. 그런데 요즘엔 이런 구호마저 사라지고 있다. 물론 ‘실천’하는 정치학자도 거의 없다. 수천 명의 정치학자 가운데 몇 명만이 실천적 노력을 하고 있다. 참으로 안타깝고 암울한 우리 정치학계의 현실이다.

이론 개발은 학자 개인이 오를 수 있는 학문의 최고봉이다. 서구 선진국의 경우 자기 이론이 없는 석학은 없다. 한국적 정치외교이론 개발은 악산 중 악산이다. 지난한 고통과 막대한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 힘들고 외롭고 배고프다. 세속적 출세에는 역행하는 길이기도 하다.

그래도 누군가는 사명감을 갖고 해야 한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케이팝도 그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아이돌은 어린 나이에 어깨 관절과 무릎 연골이 다 닳도록 연습한다. 작사·작곡가와 안무가는 밤을 새워 아이디어를 짜낸다. 기획사들은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한국적 정치외교이론 개발도 유사한 노력들이 합쳐져야 가능하다. 정치학자들은 한국적 정치외교이론을 개발하기 위해 엄청난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 한다. 한국적 정치외교이론의 개발을 장려하고 우대하는 방향으로 우리 학문 풍토가 바뀌어야 하고, 교수 임용 및 승진제도도 개선해야 하며, 정부의 전폭적 지원도 있어야 한다. 한국적 정치외교이론 개발이 우리 정치학계를 지배하는 분위기를 하루빨리 보고 싶다.



주간동아 2014.11.24 964호 (p68~69)

  • 엄상윤 세종연구소 연구위원 scare96@sejong.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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