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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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전설을 남기고 떠났다

1968~2014년 신해철

  • 김작가 대중음악평론가 noisepop@daum.net

    입력2014-11-03 13:4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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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왕…전설을 남기고 떠났다
    사진을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수북이 쌓인 흰 국화 더미에 한 송이를 더하고 두 번의 큰절과 한 번의 반절을 한 후에야 시선을 올렸다. 눈꺼풀이, 그리 무거울 수 없었다. 2007년 재즈 앨범 ‘The Songs For the One’을 낼 무렵 찍은 사진이 놓여 있었다. 그 흑백 사진을 그는 마음에 들어 했다. 그 사진을 흰 국화가 둘러쌀 날이 이렇게 빨리 올 거라고 생각도 못 했을 것이다. 그나 다른 사람들이나.

    눈물이 왈칵 밀려왔다. 이를 꽉 깨물었다. 그래도 눈가가 뜨거웠다. 농담 같았던 부고 소식이 현실이 됐다. 1990년대를 통과해 2000년대를 살아온 이들의 인생 한 페이지가 뜯겨져 나갔다. 신해철은, 그렇게 떠나갔다.

    자신의 장례식장에서 울려 퍼질 거라 공언했던 1999년 작 ‘민물장어의 꿈’이 빈소에 계속 울렸다. 그가 간 다음 날 음원차트 1위에 올랐다. 그의 첫 음원차트 1위곡이었다. 죽은 후에야 1위에 올랐다는 사실과 대중이 그를 추모하는 방식, 두 가지 생각이 아이러니하게 교차했다. 담배연기가 유난히 폐 속 깊이 빨려 들어오는 밤이었다.

    장례식장서 들려오는 ‘민물장어의 꿈’

    그를 처음 만난 날이 떠올랐다. 하필 그 사진을 찍은 무렵이었다. 서울 공덕동에 있던 그의 회사 싸이렌 뮤직의 대표실이었다. 사무실 느낌은 아니었다. 거대한 서재이자 AV룸이었다. 대충 헤아려도 1000권은 됨직한 책과 천장을 넘을 듯 LP, CD가 빼곡히 차 있었다.



    책은 장르를 가리지 않았다. 철학과 역사, 사회와 정치 등 여러 방면에 걸친 목록이었다. ‘87’로 시작하는 그의 학번이 쓰여 있는 두툼한 ‘철학개론’과 ‘반지의 제왕’ 같은 판타지 소설이 한 책꽂이에 나란히 꽂혀 있었다. ‘강식장갑 가이버’를 비롯한 초인 만화도 적잖았고, 테이블 쿠션 밑에는 일본 성인만화 한 권이 굴러다녔다.

    학창 시절 교재를 제외하고 다른 책들의 목록을 살펴본 어느 기자가 신해철은 공상을 좋아하는 것 같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럴 만도 했다. 서가에 꽂힌 적잖은 책이 현실에 실재하는 것보다 상상과 비현실을 다루고 있었다. 1980년대 전반기 서울 청계천을 누비며 사 모았을 ‘빽판’(복사 LP)부터 요즘 한국 인디밴드들의 음반까지, 음악 애호가로서 한 남자의 역사가 줄을 서 있었다. ‘어둠의 방’이라 불린다는 신해철의 집무실은 그의 감성과 이성의 나무에 다름이 없다.

    그 나무를 바탕으로 신해철은 줄곧 ‘대드는’ 삶을 살았다. 단정한 대학생 머리를 하고 리드 보컬과 리드 기타, 심지어 키보드까지 종횡무진 누비며 ‘그대에게’를 부르는 모습은 그를 데뷔와 동시에 스타덤에 올려놓았다. 1988년 겨울, 대학 2학년 때였다. 이듬해 무한궤도의 처음이자 마지막 앨범을 끝으로 솔로로 데뷔했다. ‘그런 슬픈 표정 하지 말아요’ ‘재즈 카페’ ‘나에게 쓰는 편지’ ‘내 마음 깊은 곳의 너’가 줄줄이 히트했다. 음반은 불티나게 팔렸다. 여학교 앞 문방구에서 그의 브로마이드는 가장 앞줄에 전시됐다.

    그는 도박을 걸었다. 아이돌의 삶을 포기하고 밴드를 결성했다. 넥스트의 1집 ‘Home’은 같은 해 발표된 서태지와 아이들의 ‘하여가’와 더불어 록의 불모지였던 한국 가요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그리고 다음 해 2집 ‘The Return of N.EX.T PART I : The Being’은 지금까지 그의 이미지를 로커로 쐐기 박은 작품이 됐다.

    마왕…전설을 남기고 떠났다

    10월 28일 서울 풍납동 아산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가수 신해철의 빈소.

    세상 모순에 거침없이 도전

    사실 넥스트 결성 자체가 도박이었다. 그룹을 하다 아이돌 가수가 되는 사례는 많았어도 인기 정점에서 밴드를 결성하는 사례는 국내 최초였기 때문이다. 당시 인터뷰에서 그는 말했다. “솔로 앨범 두 장을 내고 밴드로 전환하지 않았으면 오래 못 갔을 것이라는 의견에 동의한다. 하지만 결과론적인 얘기다. 솔로 두 장이 대박 터지니까 ‘이제 회사에서 뭐라고 못 하겠지. 자, 하자’ 이렇게 된 거다.” 도박 아닌 도박은 성공했다.

    넥스트 이후의 행보도 마찬가지였다. 윤상과의 테크노 프로젝트 ‘노 댄스’를 시작으로 ‘Crom‘s Techno Works’를 거치며 그는 테크노 뮤지션으로 변신했다. 이제 막 도리도리 댄스가 인기를 끌던 시절이었다. 본격적인 테크노는 국내에 상륙하기도 전이었다. 홍대 앞 댄스 클럽이 테크노 클럽으로 불리던 시절, 테크노는 그야말로 마니아 장르였지만 그는 이 앨범에서 ‘일상으로의 초대’를 내며 아무렇지도 않게 록에서 테크노로 옮겨갔다.

    마왕…전설을 남기고 떠났다
    하지만 뮤지션 신해철이 대중에게 갖는 파급력은 여기서 약화하기 시작한다. 세기말 가요계는 이미 아이돌의 독무대였다. 21세기, 음반이 급속도록 몰락할 때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건 뮤지션 진영이었고, 특히 록을 기반으로 한 이들이었다. 강력한 팬덤을 구축한 서태지, 보편적 감성에 기댄 유희열, 김동률 등보다 신해철의 자리는 빠르게 축소되는 듯 보였다.

    하지만 그는 그때도 대중과 타협하지 않았다. 2001년부터 시작한, 그의 라디오 인생에 막대한 지분을 차지하는 ‘고스트 스테이션’을 통해 음악뿐 아니라 자신의 말을 뉴스로 만들었다. 이 방송은 실로 ‘기괴’했다. 신해철의 세계이기도 했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달빛요정 역전만루홈런이 소개됐으며 하드코어 밴드 바세린이 차트 1위에 올랐다. 장기하의 ‘싸구려 커피’가 세 번 연달아 연주됐다. 생방송 도중 강병철과 삼태기의 ‘삼태기 메들리’를 틀어놓고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기도 했다. 21분 54초짜리 곡이었다.

    정작 이 방송의 진가는 그의 발언에 있었다. 다른 심야방송이 청취자의 달달한 사랑 고민을 소개할 때, 신해철은 라디오판 ‘100분 토론’을 혼자 써내려갔다. 주한미군, 서해 북방한계선(NLL), 노무현 대통령 탄핵, 이효리 표절 논란 등 그 어떤 사안에도 주저 없이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조심스러움 따위는 없었다. 그리고 그의 발언은 곧 인터넷 언론을 타고 뉴스가 돼 퍼져 나갔다. 라디오 프로그램을 통해 일종의 어젠다 세팅을 했던 유일한 DJ가 신해철이었다. 그의 ‘말’은 그렇게 2000년대를 관통해왔다.

    라디오를 넘어 그는 ‘100분 토론’에 단골로 출연하는 유일한 연예인이었다. 패널로 5번 등장해 간통죄 폐지를 주장했고, 대마초 합법화를 얘기했으며, 학교 체벌 폐지를 외치는가 하면, 불법다운로드를 근절하자고 역설했다. 진중권 등과 함께 보수 진영 논객을 마주해 명쾌한 언어와 논리로 언쟁을 벌이는 모습을 보며, 소년에서 시민이 된 그의 팬들은 환호했다.

    한국 정치사에서 중요한 분기점이 될 2002년 대통령선거에서는 노무현 후보를 공개적으로 지지해 TV 찬조 연설에 나섰고, 심지어 방송을 한 달 가까이 접은 채 그의 당선을 도왔다. 지금도 연예인이 정치적 발언에 나서는 걸 꺼리는 풍조에서, 그는 논란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소신을 접지 않았다.

    그 동력은 무엇이었을까. 돌이켜보면 일종의 자부심 같은 것이었을 게다. 자부심과 자신감은 인간 행동의 가속 페달이다. 유불리를 따지고 승산을 생각하는 데 몰입하다 보면 할 수 있는 일도 할 수 없게 되는 법이다. 욕망과 명분이 만나면 바로 움직이는 게 자부심 강한 이들의 특징이다. ‘삼국지’의 관우 같다. 데운 술이 식기 전 적장 목을 베어오겠다는 관우의 호언장담과 커피 한 잔 시켜놓고 녹음실에 들어가 식기 전에 다 불러버렸던 신해철의 모습은 정확히 일치한다.

    하지만 지나친 자부심은 피아(彼我)를 너무나 명확히 가른다. 팬만큼이나 적을 양산하는 것이다. 2002년 대선을 기점으로 보수층에서 급격히 그의 안티가 늘어났다. 연예인의 정치적 활동을 고깝게 보는 이들 역시 그에게 우호적이지 않았다.

    이런 스타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마왕…전설을 남기고 떠났다

    7월 16일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열린 ‘바른음원유통협동 조합 출범식’에서 격려사를 하는 신해철.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음악 산업의 위기에서 면책 받고 있는 대중을 비판했고, 과거사에 연연하는 한국인을 성토했으며, “우리 국민 수준이 높은 것도 아니고 우수한 것도 아닌데 자꾸 우수하다고 선전하고 가르치는 게 문제”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내가 속에 있는 얘기 다하면 아마 길거리에서 맞아 죽을지도 몰라요”라는 말을 했을 때, 그와 인터뷰를 하던 나는 녹음기를 끄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는 이토록 투사 기질을 가진 인간이었지만, 동료 음악인들에게만큼은 ‘선배’가 아닌 ‘형’이었다. 고스트 스테이션을 통해 인디 음악을 알리는 데 누구보다 앞장선 당사자였다. 1990년대 음악계를 빛낸 이들 중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많은 인디 음악인에게 ‘형’ 소리를 들었던 이가 신해철이다. 그리고 그런 감정은, 20대의 그에게 반했던 1990년대의 10대와, 30대의 그를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꼈던 2000년대의 20, 30대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는 미디어의 벽 안에 갇혀 있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위선과 거짓 겸손 같은 건 내팽개치고 누구에게나 직설화법으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그것이 조언이건 공격이건.

    그런 사람이 갔다. 김동률이 음원차트를 정복하고, 서태지가 ‘슈퍼스타K’에 출연하고, 이승환이 ‘히든싱어’에 나오는 딱 그 무렵에. 1990년대가 대중문화 중심으로 다시 돌아오고 있는 딱 지금에, 신해철이 갔다.

    앞으로도 우리는 계속 새로운 스타를 만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자기가 만든 음악으로 스타덤에 오르는 스타를 만나기는 힘들 것이다. 자신의 언어로 사회적 논란과 담론의 한복판을 헤쳐 나가는 스타를 만나기란 더더욱 힘들 것이다. 재능의 문제만이 아니다. 노력의 문제는 더욱 아니다. 시대의 문제다. 그가 살아왔던 시대는, 그것이 가능했던 시대였다. 시대의 혜택을 받았으되 시대를 책임지려 했던 한 사람이 갔다. 한 인생의 완결된 서사로 한 시대의 종언을 알리며, 신해철이 떠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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