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54

2014.09.15

밀레이가 그린 존 러스킨

여름휴가 같이했던 절친 한 치 앞 못 본 ‘운명의 삼각관계’

  • 전원경 문화정책학 박사·‘런던 미술관 산책’ 저자 winniejeon@hotmail.com

    입력2014-09-15 11:2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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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레이가 그린 존 러스킨

    러스킨의 초상, 1853년, 존 에버렛 밀레이, 캔버스에 유채, 78.7 X 67cm, 영국 옥스퍼드 애슈몰린 박물관.

    영국 TV에서는 19세기 영국 화가들 모임인 ‘라파엘 전파’에 대한 드라마가 종종 방송된다. 극도로 보수적이고 남성 중심적이던 빅토리아 시대의 숨 막히는 분위기에 반발했던 라파엘 전파 화가들의 화풍은 분명 독특했지만, 이들이 TV 드라마에 자주 등장하는 이유는 예술적 성취보다 남다른 연애행각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여기 소개하는 비평가 존 러스킨과 화가 존 에버렛 밀레이, 그리고 이 둘 모두의 연인이던 에피의 삼각관계를 빼놓을 수 없다.

    라파엘 전파는 빅토리아 시대 초반인 1848년 로열아카데미 출신의 젊은 화가 밀레이, 단테 게이브리얼 로제티, 윌리엄 홀맨 헌트 세 사람이 결성한 형제동맹이다. 이들은 로열아카데미가 가르치는 기존 화풍, 즉 라파엘로와 미켈란젤로 스타일을 무조건 모방하는 화풍에서 벗어나 라파엘로 이전 중세 화가들의 작품을 본보기 삼아 그림을 그리자는 강령을 정했다. 그래서 형제동맹 이름이 ‘라파엘 전파(Pre-Raphaelites)’다. 이들의 강령은 진실한 아이디어만 작품으로 옮기며, 자연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도덕적이면서 성스러운 주제만 취급한다는 것이었다.

    세 사람 중 선두주자였던 밀레이는 1851년 ‘오필리아’ ‘목수의 가게’ 등 영국 고전작품과 성경에서 영감을 얻은 그림을 연달아 발표했다. 보수적인 언론은 신성모독이니 누더기 같은 작품이니 하며 혹평을 퍼부었지만 오직 한 사람, 옥스퍼드대 출신의 비평가 존 러스킨은 ‘타임스’에 밀레이를 옹호하는 평을 실었다. 평단의 냉담함에 상처를 받은 밀레이가 러스킨에게 연락을 취하면서 두 사람은 절친한 친구가 됐다.

    1853년 러스킨은 가족 별장이 있는 스코틀랜드 트로삭스로 여행을 떠나며 밀레이와 동행한다. 이번 초상화는 이 여름휴가 때 그린 것이다. 밀레이는 특유의 세밀한 관찰과 꼼꼼한 붓질로 당대 최고 문장가이자 비평가였던 러스킨의 이지적 면모를 재현했다.

    그러나 이들의 스코틀랜드 여행은 엉뚱한 결과를 낳고 말았다. 밀레이가 러스킨의 아내 에피와 사랑에 빠진 것이다. 사실 이 연애행각에 대해 에피를 무작정 비난할 수만은 없을 듯싶다. 러스킨은 어린 시절부터 집안끼리 알고 지내던 에피와 1848년 결혼했다. 하지만 이들의 결혼은 사랑보다 집안 체면 때문에 이뤄진 것이었다. 러스킨이 밀레이와 교우관계를 맺을 무렵, 에피는 이미 애정 없는 결혼 생활과 시부모의 지나친 간섭에 신경쇠약 증세를 보이던 참이었다. 이 와중에 나타난 젊고 열정적인 화가의 구애에 그는 순식간에 넘어가고 말았다.



    여행 이듬해인 1854년 에피는 러스킨에게 결혼 무효 소송을 제기했고, 이 소송이 받아들여지면서 두 사람은 이혼에 이른다. 그리고 1855년 밀레이와 에피는 결혼해 이들이 처음 만났던 스코틀랜드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물론 러스킨과 밀레이의 우정은 영원히 깨지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밀레이가 그린 러스킨의 초상은 러스킨 본인에겐 잊을 수 없는 불행을 상기시키는 작품이 됐다. 그러나 이 작품의 예술적 가치를 무시할 수 없었던 러스킨은 작품을 차마 파기하지 못하고, 1871년 친구 헨리 오크랜드에게 줘버렸다. 이후 주인 없이 떠돌던 러스킨의 초상화는 20세기 말 영국 정부 소유가 됐고, 영국 정부는 이 작품을 옥스퍼드 애슈몰린 박물관에 영구 임대했다. 러스킨 처지에서는 자신이 학창 시절을 보낸 옥스퍼드의 박물관에 초상화가 전시되는 것이 그나마 작은 위안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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