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45

2014.07.07

남재준 前 원장 교체 또 다른 이유

알고 보면 박근혜 대통령과 1년 3개월 긴장관계

  • 이정훈 월간 ‘신동아’ 편집위원 hoon@donga.com

    입력2014-07-07 09:5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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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재준 前 원장 교체 또 다른 이유

    취임 직후인 2013년 3월 22일 오후 박근혜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기념사진 촬영에 앞서 남재준 국정원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일본과 밀월관계에 들어간 북한이 동해로 미사일을 쏘아대는 등 도발이 심상치 않다. 사실상 2기 내각을 구성한 박근혜 대통령은 어떠한 대북·안보 정책을 펼칠 것인가. 청와대 측은 김관진 국방부 장관을 국가안보실장으로 지명하면서 대북 강경기조를 유지할 것이라고 했지만, 과연 그러할지는 지켜볼 필요가 있다.

    그것에 대한 답을 구하려면 박 대통령의 안보관과 대북관부터 알아야 한다. 많은 국민은 그를 강한 보수로 알고 있지만 진실은 꼭 그렇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1기 내각이 유지되는 동안 박 대통령은 상당한 인기를 누렸는데, 그렇게 된 이유로는 남재준 국가정보원장의 이른바 ‘좌익 척결’이 첫손에 꼽힌다. 그랬던 남 원장을 박 대통령은 세월호 사고 와중에 특별한 이유 없이 해임했다. 왜 그랬을까.

    적잖은 국민은 박 대통령이 남 전 원장을 상당히 신임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권력 내부 사정에 밝은 이들의 이야기는 다르다. 둘 사이는 상당한 긴장관계였다는 것이다. 야인 시절 남 전 원장은 5년 이상 두 달에 한 번꼴로 정치인 박근혜를 만나 안보문제를 건의해왔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가장 결정적일 때 그를 내쳤다가 다시 불러들이는 등 냉정하게 대해왔다는 것이다.

    2007년 노무현 정부는 69만이던 병력을 2020년 50만으로 줄인다는 내용 등의 국방개혁법을 통과시켰다. 그에 따라 24개월인 육군 의무병 복무기간을 단계적으로 줄여 2014년 18개월(1년 6개월)로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복무기간이 21개월로 줄어 있던 2010년 한국은 천안함, 연평도 사건으로 발칵 뒤집혔다. 그해 12월 이명박 정부는 국무회의를 열어 복무기간을 당분간 21개월로 유지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논공행상 때 남재준은 ‘찬밥’신세



    2012년 18대 대통령선거전이 시작되자 민주당 문재인 후보는 ‘기다렸다’는 듯이 복무기간 18개월론을 들고나왔다. 그에 대해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는 의견을 밝히지 않았다. 남 전 원장의 영향을 받은 탓이었다. 남 전 원장은 50만으로의 감군을 규정한 국방개혁법이 안보를 위태롭게 한다고 봤기 때문에 국방개혁법을 폐지해야 한다는 지론을 갖고 있었고, 이를 지속적으로 박 후보에게 ‘주입’해왔다.

    그런데 대통령선거 전날인 12월 18일 박 후보가 180도 돌아섰다. “하사관(부사관) 증원 등을 통해 임기 내에 18개월로 단축하는 것을 추진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그러나 이때는 박 후보의 공약집이 이미 발표된 다음이었기 때문에 이 선언은 공약집에 들어가지 못했다. 소식통들은 이 선언이 있기 전 박 후보와 남 전 원장이 이 문제를 놓고 심각하게 다퉜다고 말한다. 그 때문에 선거에서 승리한 박 당선인이 논공행상을 따질 때 그는 완전한 ‘찬밥’ 신세였다는 증언이 있다.

    당초 두 사람은 박 후보가 집권하면 남 전 원장이 안보실장을 맡아 안보 틀을 짠다는 묵계 비슷한 것을 갖고 있었는데, 그것이 깨져나갔다는 것이다. 박 당선인은 안보실장에 김장수, 국방부 장관에 김병관, 국정원장에 이병기를 지명하려고 했다. 앞의 두 사람은 바로 수락했지만 이씨가 강력하게 고사했다. 그 바람에 국정원장을 지명하지 못하고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와중인 2013년 2월 12일 북한이 ‘핵개발 완료’를 증명하는 3차 핵실험을 감행했다.

    소식통들은 “그때까지만 해도 박 당선인은 북한에 대해 초강경은 아니었다. 대화를 하겠다는 의지를 갖고 있었다. 이 때문에 핵개발 완료를 증명한 3차 핵실험에 당황해했다”고 말한다. 그 때문에 강경 인사를 안보 책임자로 앉혀야 한다는 의견을 받아들여 외면해오던 남씨를 국정원장으로 지명했다(2013년 3월 2일). 이러한 ‘역사’가 있었기에 남 전 원장은 박 대통령을 철저히 의식했다. 남 전 원장은 절대로 ‘오버’하지 않으려 했다는 것이다.

    김장수 전 국가안보실장 등 다른 안보라인 주요 인사들은 언론인 등을 만나 우군(友軍)을 구축했지만, 남 전 원장은 업무와 무관한 이는 어떤 사람도 만나지 않으려 했다. 그때 청와대가 직면한 가장 큰 정치적 부담은 새누리당 정문헌 의원의 폭로로 불거진 서해 북방한계선(NLL) 관련 남북정상회담 대화록과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 문제였다. 이를 잘 알고 있던 남 전 원장은 2차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을 공개하고 RO(Revolutionary Organization·혁명조직) 사건을 수사하게 함으로써 일거에 해결해버렸다. 그리고 엄청난 정적(政敵)을 만나게 됐다.

    국정원 댓글 사건이 불거진 이후 민주당은 정부로부터 국정원을 개혁한다는 동의를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박 대통령은 국정원이 개혁안을 만들어오게 했다. 민주당은 유우성 사건을 계기로 2차 공격에 나섰다. 국정원 블랙요원들이 중국 측 문서 위조에 개입한 것이 드러났기에 남 전 원장은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청와대 측은 서천호 국내 담당 차장을 퇴임시키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이병기 후보자에 거는 기대

    남재준 前 원장 교체 또 다른 이유

    이병기 국정원장 후보자가 6월 15일 오후 서울 강서구 김포국제공항을 통해 입국한 후 차량에 오르고 있다.

    그리고 세월호 사고가 일어났다. 그러나 국정원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2011년 만든 국정원법 등은 국정원이 국내 문제에 개입해 컨트롤타워 구실을 하는 것을 금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는 청와대를 의식하며 ‘법대로’를 고수하는 남 전 원장의 스타일이 투영된 결과이기도 했다.

    그 시기 국정원 개혁 문제를 논의하려 국정원 측을 자주 찾은 한 청와대 인사는 노골적으로 불만을 토로했는데, 그에 대해 국정원 측은 “그렇게 하라는 것은 과거 국정원으로 돌아가라는 것 아니냐”며 완곡히 거절해야 했다고 한다. 그러한 일이 반복되다 남 전 원장은 통보를 받고 사표를 제출했고, 사표가 수리되는 형식으로 물러났다. 미리 짐을 싸놓고 있던 그는 사표가 수리된 날 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박 대통령은 본인의 고사로 주일본대사로 내보내야 했던 이병기 대사를 후임 국정원장으로 지명했다. 이 대목에서 소식통들은 “청와대가 진짜로 원하는 것은 국내 문제에 개입해 정리를 해주는 과거 국정원”이라는 말과 “세월호 국면 전환을 위해 남북대화를 재개할 것을 새로운 국정원장과 통일부에 바라고 있다”는 의견을 내놓는다.

    북한은 일본과 밀월에 들어가면서 연일 도발 수위를 높이고 있다. 이병기 후보자는 북한 도발을 잠재우고 대화를 해야 하는 매우 어려운 문제를 부여받게 된 것이다. 수교를 전제한 회담을 일본과 진행하는 북한이 우리 측 대화 요구를 수용할 가능성은 낮아 보이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이 때문에 우리가 거부했던 6자회담을 부활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주요 참여국인 미국이 일본을 지지하고 있어 6자회담 재개 가능성은 불투명하다. 이 후보자에 대한 박 대통령의 신임이 두텁다고 해도 ‘도로 국정원’을 원하는 청와대의 암묵적인 압박을 물리쳐야 하는 상태다. 그래서 박근혜 정부의 대북·안보 정책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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