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39

2014.05.26

‘사색의 길’ 걸었노라 도시 매력에 푹 빠져 행복했노라

독일 철학과 예술의 메카, 중세 고성도 잘 보존 여행자 발길 잡아

  • 백승선 여행 칼럼니스트 100white@gmail.com

    입력2014-05-26 13:5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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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색의 길’ 걸었노라 도시 매력에 푹 빠져 행복했노라

    철학자의 길 정상에 서면 네카어 강과 함께 카를테오도어 다리, 하이델베르크 성, 그리고 구시가지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독일 남서부 바덴뷔르템베르크 주 네카어 강(Neckar River)과 라인 강 본류가 합류하는 야트막한 언덕에 세워진 고도(古都) 하이델베르크. 교육과 문화 중심지이면서 독일 철학과 예술을 꽃피운 학문의 메카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중 연합군의 폭격을 면해 아름다운 중세 고성이 그대로 남아 있어 여행자들에게 낭만적인 독일의 모습을 발견하는 기쁨을 주는 도시다.

    하이델베르크는 칸트를 비롯해 괴테, 헤겔, 야스퍼스, 베버, 헤세, 슈만 등 세계 최고 철학자와 문학가, 예술가들이 즐겨 찾았던 도시로 그들의 흔적과 일화가 곳곳에 남아 있다. 특히 우리나라 어르신들은 1954년 뮤지컬 영화 ‘황태자의 첫사랑’촬영지로 기억하는 곳이다.

    중간중간 ‘철학자의 뜰’

    이 사색의 도시에서 가장 먼저 가볼 곳은 철학자의 길(Philosophenweg)이라 부르 는 산책로다. 하이델베르크 구시가지에서 네카어 강 건너편에 있는 낮은 하일리겐베르크(Heiligenberg·신성한 산)를 오르는 이곳은 오래전 하이데거나 헤겔, 야스퍼스 등 철학자들이 사색을 위해 즐겨 찾았다고 해서 이름 붙은 길이다.

    독일이 낳은 유명한 철학자와 문학가들이 사색에 잠겼다는 철학자의 길 위에서 나도 마치 철학자가 된 듯 잠시 눈을 감았다. 천천히 걸으면 1시간 정도 소요되는 이 길엔 중간중간 앉아서 쉴 수 있는 ‘철학자의 뜰’이 있어 잠시 숨을 고를 수 있다.



    중세 향기를 고스란히 머금은 낭만적인 고성과 유유히 흐르는 네카어 강이 가장 잘 보이는 곳이 철학자의 길 정상이다. 이곳에 서서 강과 함께 카를테오도어 다리(Karl-Theodor Brucke)와 하이델베르크 성(Schloss Heidelberg) 등이 있는 구시가지를 바라봤다. 전망이 정말 아름다웠다.

    ‘사색의 길’ 걸었노라 도시 매력에 푹 빠져 행복했노라

    하이델베르크 성에는 고딕 양식을 비롯해 르네상스, 바로크 등 다양한 양식의 건축물이 남아 있다. 특히 하이델베르크 성에서 가장 오래된 루프레히트 궁과 르네상스 건축양식의 걸작이라 일컬어지는 오트하인리히 궁이 유명하다.

    ‘사색의 길’ 걸었노라 도시 매력에 푹 빠져 행복했노라

    ‘철학자의 뜰’이라 부르는 작은 공원(위). 카를테오도어 다리는 ‘오래된 다리’라고도 부른다.

    철학자의 길에서 만나는 하이델베르크의 그림 같은 풍경은 마치 동화 속 마을 같았다. 특히 늦가을, 울긋불긋 물든 단풍과 함께 조화를 이루는 붉은 지붕과 석양에 노랗게 물들어가는 네카어 강이 어우러져 빚어내는 풍광은 결코 잊을 수 없다.

    그렇게 철학자들의 흔적을 따라 돌길을 걸어 내려오면 네카어 강에 놓인 카를테오도어 다리를 만날 수 있다. ‘오래된 다리’라는 뜻의 ‘알테 브뤼케(Alte Bruecke)’라고도 부른다. 처음엔 나무로 만들었으나, 홍수로 강물이 불어나거나 화재로 무너지는 경우가 많아지자 카를테오도어의 명령에 따라 1788년 지금의 돌다리로 다시 세웠다고 한다.

    이곳을 찾은 여행자들은 다리 위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 거리 악사와 아기자기한 공예품, 크고 작은 볼거리가 가득하기 때문이다. 시원한 강바람을 맞으며 바라보는 고성 모습도 특별하다. 이 카를테오도어 다리에는 철학자 칸트의 일화가 전해온다. 시계처럼 정확하게 생활한 것으로 유명했던 그는 매일 일정한 길을 정해진 시간에 맞춰 산책했다고 하는데, 사람들은 칸트가 카를테오도어 다리를 건너는 것을 보고 시계를 맞췄다고 한다.

    카를테오도어 다리 입구에 흰색 쌍둥이 탑이 세워져 있다. 돔 모양 지붕과 선명한 흰색 벽이 인상적인 쌍둥이 탑문(브뤼켄토어·Bruckentor)은 ‘다리의 문’이라는 뜻으로 외부 적으로부터 마을을 지키려고 방어용으로 설치한 것이라고 한다. 여행자들에겐 이곳이 구시가지 슈타인 거리로 통하는, 과거 속 하이델베르크로 들어가는 출입문과도 같다. 이곳을 지나면 중세 거리와 성당이 여행자를 시간여행 속으로 이끈다.

    쌍둥이 탑문을 지나면 만나는 구시가지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모이는 곳은 마르크트 광장(Marktplatz)이다. 광장의 절반을 차지하는 거대한 성령교회(Heiliggeistkirche)는 하이델베르크를 대표하는 교회이기도 하다.

    고딕 양식의 외관과 조화를 이루는 바로크식 첨탑 지붕이 아름다운 성령교회 역시 전쟁 중 파괴됐다가, 1985년에야 다시 문을 열었다. 교회 안에는 수천 권에 달하는 진귀한 책을 소장했던 비블리오테카 팔라티나(Bibliotheca Palatina)라고 부르는 궁정 도서관이 있다. 30년전쟁으로 소장본 대부분이 약탈당한 후 겨우 수백 권만 반환받아 현재는 하이델베르크대 도서관에 보관 중이다. 교회는 사진 한 장에 담을 수 없을 정도로 워낙 커서 하이델베르크 성에 올라서야 전체를 담을 수 있었다. 좁은 계단을 걸어 첨탑에 올라가면 구시가지를 볼 수 있는 전망대가 나온다.

    다양한 양식의 하이델베르크 성

    ‘사색의 길’ 걸었노라 도시 매력에 푹 빠져 행복했노라

    구시가지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성령교회(위)와 하이델베르크대 의 학생감옥.

    마르크트 광장에서 시간여행을 마치고 가파른 언덕을 올라 하이델베르크 여행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구시가지 산등성이에 자리 잡은 하이델베르크 성으로 향한다. 이 성은 영주들이 13세기부터 짓기 시작해 계속 증축했다. 그러다 30년전쟁을 거치면서 17세기 말 프랑스 군에 의해 파괴됐고, 지금은 복구보다 관리만 하고 있는 상태다. 성벽과 주요 건물들도 원형을 유지하고는 있지만, ‘복구하지 않은 것이 도시 느낌과 잘 어울린다’는 의견이 더 많다고 한다.

    하이델베르크 성에는 고딕 양식을 비롯해 르네상스, 바로크 등 다양한 양식의 건축물이 남아 있다. 그중 1607년 완공된 프리드리히 궁은 지하에 있는, 세계에서 가장 큰 와인통을 보려는 사람으로 늘 붐빈다. 또한 1400년쯤 세워진 하이델베르크 성에서 가장 오래된 루프레히트 궁과 르네상스 건축양식의 걸작이라 일컬어지는 오트하인리히 궁의 흔적을 볼 수 있다.

    하이델베르크 성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물로 알려진 프리드리히 궁전 지하에는 1751년 만들어진 22만ℓ의 와인을 채울 수 있는 세계 최대 크기의 와인통인 하이델베르크 툰(Heidelberg Tun)과 페르케오(Perkeo) 인형이 여행자들을 기다리고 있다.

    하이델베르크 툰은 전쟁 중 성안에 물이 부족해질 것에 대비해 물 대신 와인을 저장할 목적으로 아주 크게 만들어놓은 것이라 하는데 기네스북에 등재됐을 정도로 크다. 와인통 여기저기 각 나라 언어로 적혀 있는 낙서 아래엔 티롤 지방에서 건너온 빨강머리 난쟁이 페르케오 인형이 와인을 마시며 서 있다. 파란색 옷을 입은 그의 눈을 보면 사람들은 모두 웃을 수밖에 없다. 도시마다, 장소마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이 바로 독일 여행의 매력 중 하나이다.

    학생감옥에서 ‘젊음’ 발견

    이곳은 또 괴테와 그의 연인 마리안네 폰 빌레머의 사랑 이야기로 유명하다. 대작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탈고한 괴테가 1779년 하이델베르크에서 만나 열렬한 사랑에 빠진 여인이 바로 마리안네다. 그녀는 하이델베르크 성안의 허름한 담벼락에 괴테와 나눈 사랑의 감정을 이렇게 써놓았다. ‘진정으로 사랑하고 사랑받은 나는 이곳에서 행복했노라.’ 이 한 줄의 글이 하이델베르크를 로맨틱한 사랑의 도시로 바꿔놓았다.

    1386년 설립된 독일 최고(最古) 대학 하이델베르크대는 노벨상 수상자를 대거 배출한 것과 학생감옥(Studentenkarzer)으로 유명하다. 독일 최고 엘리트였을 하이델베르크대생 가운데도 규칙과 법을 어기는 학생이 있었고, 그것을 바로잡으려고 대학이 자체적인 제재수단의 하나로 만든 게 학생감옥이다.

    하지만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당시 학생들은 감옥에서도 자신의 의사를 낙서라는 수단을 통해 맘껏 표현했다. 눈에 보이는 벽과 천장은 어김없이 그림과 글씨, 문장이 뒤덮고 있다. ‘나도 영광스럽게 이곳을 다녀간다네.’

    수감(?)되는 것을 부끄러운 일이 아닌, 자랑스러운 일로 여기는 그들의 마음이 낙서에 담겨 있다. 1778년부터 1914년까지 실제로 운영됐다는 학생감옥에서 ‘젊음’의 신선함과 힘을 발견했다.

    이처럼 하이델베르크는 독일의 다른 도시나 유명한 고성과 비교하면 그리 화려하지도, 특별한 볼거리도 없어 보인다. 그러나 잘 보존된 역사 흔적을 찾아 매년 300만 명에 달하는 사람이 찾아올 만큼 인기가 높다. 철학자와 예술가는 물론이고 잠시 이곳을 찾은 여행자에게도 특별한 매력으로 다가오는 도시가 바로 하이델베르크다.

    ‘사색의 길’ 걸었노라 도시 매력에 푹 빠져 행복했노라

    하이델베르크 성에서 볼 수 있는 아름다운 풍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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