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39

2014.05.26

전파 간섭 위기 폭발, KBS 파행

기자·PD 물론 간부진까지 길환영 사장 사퇴 요구

  • 배선영 텐아시아 기자 sypova@tenasia.co.kr

    입력2014-05-26 11: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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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파 간섭 위기 폭발, KBS 파행

    KBS 기자협회 소속 기자와 앵커들이 5월 21일 서울 세종로 광화문광장에서 길환영 사장의 퇴진을 요구하는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왼쪽부터 조일수 KBS 기자협회장, 이영현 앵커, 박유한 앵커, 최문종 앵커.

    곪아 있던 상처가 끝내 터져버렸다. 세월호 사태가 공영방송 KBS 보도국의 오랜 고름을 터뜨린 계기가 됐다. 시작은 KBS 막내기자들의 반성문이었다. 2012년부터 2014년 사이 입사한 KBS 38~40기 취재 및 촬영 기자들은 5월 7일 사내 보도정보 시스템에 장문의 반성문을 게재했다. ‘(세월호 사태) 현장에 있었지만 현장을 취재하지 않았다’며 ‘보도본부장, 보도국장, 세월호 보도에 관여한 모든 기자들이 참석하는 토론회를 제안한다’는 내용이었다. 또 ‘KBS가 재난 주관 방송사로서 부끄럽지 않은 보도를 했는지 반드시 반성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결과를 9시 뉴스를 통해 전달하고 잘못된 부분은 반드시 사과해야 한다’고도 했다.

    뒤이어 김시곤 전 KBS 보도국장의 발언이 문제가 됐다. 그가 4월 말 한 회식자리에서 세월호 참사 희생자 수와 교통사고 사망자 수를 비교하는 발언을 한 것이 알려지면서 공분을 샀고, 유족들이 KBS와 청와대를 항의 방문했다. 결국 김 전 보도국장은 5월 9일 오전 이 발언을 해명하는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야 했다.

    이 자리에서 또 하나의 큰 파열음이 터져 나왔다. 김 전 보도국장은 문제가 된 ‘교통사고’ 발언은 사실이 아니라면서 “세월호 참사는 안전 불감증에 의한 사고였다. 따라서 이에 대한 뉴스 시리즈물을 기획해볼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를 했고, 교통사고 사망자가 여전히 한 달에 500명 이상 발생하는 만큼 이에 대한 경각심도 일깨워야 한다고 발언했을 뿐이다. 이 내용이 일방적으로 왜곡됐다”고 해명했다. 이어 그는 “언론에 대한 어떠한 가치관과 식견도 없이 권력 눈치를 보며 사사건건 보도본부의 독립성을 침해해온 길환영 KBS 사장이 즉각 사퇴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이후 자신 역시 보도국장 자리에서 사임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한 치 양보 없는 노사 대치

    전파 간섭 위기 폭발, KBS 파행

    5월 21일 서울 여의도 KBS 신관에서 KBS 노동조합원들이 길환영 사장의 사퇴를 촉구하는 결의대회를 하고 있다.

    이날 그의 기자회견에서 가장 논란이 된 건 길환영 사장의 보도본부 독립성 침해 발언이다. 2012년 ‘공정방송 실현’ 등을 기치로 94일간 파업한 바 있는 KBS는 아직도 내부적으로 정치권력의 보도 간섭에 대한 우려와 불만이 높다. 이런 가운데 길 사장이 청와대의 간섭을 받으며 보도를 통제해왔다는 김 전 국장의 발언은 파장이 클 수밖에 없었다. 김 전 보도국장은 이날 오후 방송된 종합편성채널 JTBC ‘뉴스9’과의 인터뷰에서도 길 사장이 평소 끊임없이 보도를 통제했다고 밝히며 “길 사장은 대통령만 보고 가는 사람이다. 권력은 당연히 (KBS를) 지배하려 할 것”이라고 답해 KBS를 들끓게 만들었다.



    김 전 국장의 발언에 KBS 기자 200여 명이 비상총회를 연 것은 5월 12일. 이들은 길 사장이 사퇴하지 않으면 한국기자협회 차원에서 제작을 거부하기로 결의했고, 일주일 뒤인 19일부터 실행에 들어갔다. 그러나 길 사장은 기자회견과 사내방송 등을 통해 사퇴 의사가 없음을 거듭 밝히고 있다.

    전파 간섭 위기 폭발, KBS 파행

    길환영 KBS 사장이 5월 21일 서울 여의도 KBS에서 사내방송을 통해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길 사장은 특별담화를 통해 사퇴 거부 의사를 공식적으로 밝혔다.

    KBS 노사의 대치는 5월 22일 현재 일촉즉발 상황이다. KBS PD협회도 5월 23일 0시부터 24일 0시까지 하루 동안 제작 거부를 결의했고 이미 교양국, 예능국, 드라마국 등 프로그램 제작국 팀장이 모두 보직을 사퇴한 상태다. 총파업을 예고한 KBS 노동조합(노조)의 한 관계자는 “2012년 당시에는 KBS의 양대 노조 가운데 ‘전국언론노조 KBS본부’만 파업에 참여했지만, 이번엔 KBS 노조에 속한 조합원도 함께 파업할 예정이다. 그렇게 되면 방송에 큰 차질이 생기고 회사가 받는 타격도 상당히 클 것”이라고 밝혔다. 실제로 KBS 기자협회가 제작 거부를 시작한 19일 ‘KBS 뉴스9’은 19분 만에 끝났다.

    기자가 마이크와 카메라를 내려놓고, PD가 연출을 포기하기로 한 것은 그만큼 KBS 내부에 위기의식이 팽배해 있다는 뜻이다. KBS의 이번 사태가 세월호 참사의 한가운데서 언론인으로서 사명을 다하지 못했다고 느낀 막내기자들의 반성에서 시작됐다는 점에서 파장이 더 큰 것으로 보인다.

    KBS 노조 관계자는 “세월호 사태 이전부터 (권력에 의한) 부당한 통제를 느끼고 있었고 꾸준히 문제제기를 해왔다. 하지만 해결되지 않았고,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참사에 대한 보도조차 간섭과 통제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 앞에서 분노가 폭발한 것”이라고 밝혔다. 이런 분위기에서 김 전 보도국장의 발언이 나왔다. 이 관계자는 “우리가 늘 의심해왔던 것이 사실이었음을 그가 확인해준 셈이니 움직이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언론인으로서 자존심에 큰 상처”

    KBS 보도국의 한 기자는 “우리는 KBS 회사원이기 이전에 언론인이다. 우리 뉴스에서 정권에 부담이 되는 기사들이 나가지 않고 정권의 안위 보존을 위한 기사 위주로 편집되는 행태를 목격하면서 언론인으로서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다. 세월호 보도 과정에서 KBS라는 조직이 완전히 망가져 있음을 다시 한 번 절감했다. 이번만큼은 길 사장의 보도 개입이 청와대 지시에 의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혼자만의 충성에 의한 것이었는지 분명히 확인하고자 한다. 모든 사실이 명명백백히 밝혀진 다음, 그의 사퇴를 요구할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KBS 내홍은 간부진 사이에도 번지고 있다. 보도국 기자들뿐 아니라 경영직군 간부들까지도 사퇴 의사를 표명하며 길 사장 사퇴를 요구하고 나섰다.

    한편 2012년 총파업을 겪었던 MBC 역시 세월호 사고 보도와 관련해 기자 200여 명이 반성문을 발표하는 등 사측과 노조 사이에 갈등이 빚어진 모양새다.

    세월호가 침몰하고 한 달 넘는 시간이 흘렀다. 이 과정에서 지상파의 휘청거림은 이제 부인할 수 없는 사실로 다가왔다. 하지만 오래 곪은 상처가 터진 것은 어쩌면 치유의 시작일 수 있다. 그 싸움의 끝에서 지상파 보도국은 잃어버린 신뢰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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