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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난, 찜질방으로 퇴근”

30, 40대 샐러리맨 출퇴근비 아끼기 고육책…전세난과 장시간 노동도 한몫

  • 오소영 동아일보 인턴기자 pangkykr@naver.com

“오늘도 난, 찜질방으로 퇴근”

“오늘도 난, 찜질방으로 퇴근”
“주말 부부나 다름없죠. 아내가 언제까지 이해해줄지 모르겠어요.”

2월 6일 자정 무렵 서울 강남역 5번 출구 근처 찜질방. 데이트족이나 계모임 등으로 붐빌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찜질방은 30, 40대 남성 직장인으로 가득했다. 찜질방 흡연실에서 만난 이영진(35·가명) 씨는 일주일에 사나흘은 집이 아닌 회사 근처 찜질방에서 밤을 보낸다. 집이 경기 일산에 있어 야근 후 택시를 타면 택시비만 3만 원이 넘기 때문에 술을 마시지 않은 날에도 찜질방에서 자는 경우가 잦다. 결혼 4년 차인 이씨는 출퇴근 비용과 시간을 절약하려고 ‘자상한 남편’ 자리를 잠시 포기했다.

바야흐로 서울 찜질방이 샐러리맨의 또 다른 주거시설로 변모하고 있다. ‘직장인 찜질방족’은 크게 △장거리 통근 △업무 과다의 이유로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서울 직장인의 또 다른 주거시설

먼저 이씨처럼 집이 멀어 찜질방을 이용하는 경우다. 집이 멀다 보니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는 데다 자가용을 굴리면 교통비가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하루 1만~1만2000원이면 집보다는 못 하지만 시간이나 비용 측면에선 생활에 여유가 생기는 까닭에 찜질방을 선택하는 유형이다.



서울 강남구 선릉역 8번 출구 근처 찜질방에서 만난 대기업 차장 강지원(39·가명) 씨는 “한 달에 나흘은 이곳에서 잔다. 집이 경기 남양주여서 회식하거나 다음 날 동료와 출장을 갈 때면 찜질방을 이용한다. 자가용이 있지만 출퇴근만 왕복 2시간 이상 소요된다. 8만 원을 들여 기름을 꽉 채워도 일주일을 못 가니 차라리 찜질방이 편하다”고 말했다.

충남 천안에서 반도체 공장을 운영하는 조재섭(59) 사장도 강씨처럼 집이 멀어 찜질방을 이용하는 경우다. 서울 강남에 사무소를 차린 그는 주 2~3일 서울이나 수도권에서 일을 봐야 할 때면 찜질방을 이용한다. 서울에 머물 집이 없는 조씨는 “서울에서 집을 얻을까 생각도 해봤는데 워낙 월세가 비싸 포기했다”며 “회사 근처 지인의 원룸에 가기엔 마음이 불편하고, 서울에 집을 얻자니 집값이 만만치 않아 찜질방을 선택했다”고 귀띔했다.

강씨나 조씨와 달리 야근이 잦아 찜질방을 이용하는 경우도 있다. 역삼역 근처 세무법인에 근무하는 김범일(34·가명) 씨는 “세무신고가 몰리는 시즌에는 사흘을 직장 근처 찜질방에서 보낸다”고 털어놨다. 사는 집이 강남구에서 그리 멀지 않지만 자정이 넘은 시간에 집에 가는 것이 너무 피곤한 데다 할증료가 붙는 택시비도 부담스러워서다. 자가용이 없는 김씨는 영등포구에 있는 집까지 택시를 타면 족히 2만 원은 든다. 신혼 기간이지만 내 집을 마련하고자 하는 그는 한 푼이라도 아끼려는 마음과 다음 날 새벽같이 일을 시작해야 하는 부담에 찜질방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집이 멀고 야근도 잦은 직장인 가운데는 아예 찜질방을 원룸이나 오피스텔로 사용하는 사례도 있다. 주중에는 아예 찜질방에서 산다고 보는 게 맞을 정도다. 정보기술(IT) 업체 4년 차 프로그래머인 김정수(29) 씨는 월 18만 원인 찜질방 회원권을 살지 고민 중이다. 김씨는 “한 달에 평균 20일을 찜질방에서 잔다. 밤 11시가 넘어 일이 끝날 때가 많다. 집이 인천에 있는데, 서울 강남에서 집까지 택시비만 2만 원이 훌쩍 넘는다. 다른 대안이 없다”고 말했다. 이렇게 절약하는 택시비만 한 달에 40만 원이 넘는다.

이처럼 서울 강남 찜질방에선 연인 혹은 가족이 모여 이야기꽃을 피우던 모습은 구시대 풍경이 됐다. 이제 그곳은 비싼 월세 때문에 원룸이나 오피스텔을 구하지 못한 직장인의 ‘집단 난민촌’으로 변하고 있다. 일이 많아 집에도 가지 못하고 전셋값이 비싼 서울에서 밀려난 이들이 선택한 마지막 장소인 것이다.

서울 직장인 찜질방족의 출현 배경을 좀 더 면밀히 들여다보면 서울의 비정상적인 전세대란, 전 세계에서 가장 긴 근로시간 등이 밀접하게 관련돼 있음을 알 수 있다.

“오늘도 난, 찜질방으로 퇴근”

계속되는 야근과 비정상적인 전셋값 상승은 직장인을 찜질방 족으로 만드는 요인이다.

지난 5년간 서울 전셋값은 33% 가까이 올랐다. 강씨와 조씨처럼 비싼 전셋값 때문에 수도권으로 이사를 간 사람은 한 달에 수십만 원씩 드는 교통비가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전셋값 상승과 더불어 월세 중심으로 바뀌어가는 부동산시장도 직장인이 찜질방을 선호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된다. 패션업계에서 일하며 찜질방을 이용하는 이진혁(25) 씨는 “전셋값이 너무 비싸고 조건에 맞는 집은 월세밖에 없어 서울에서 수도권으로 집을 옮겼다. 집이 있는 인천에서 강남 직장까지 출퇴근하는데, 교통비를 감당할 수 없어 또 다른 고민에 빠졌다”고 말했다.

“일과 가정 양립 불가능”

한국 근로자의 살인적인 근로시간도 직장인 찜질방족을 늘리는 원인이 된다. 우리나라 임금근로자 기준 1인당 연간 근로시간은 2092시간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3개 회원국 평균 시간보다 420시간 더 많고 멕시코, 칠레 다음으로 세 번째로 높다.

물론 직장인이 찜질방족이 되는 이유가 천정부지로 오르는 전셋값과 교통비를 줄이려는 목적에서만은 아니다. 귀갓길 안전이나 가족을 위해 찜질방을 이용하는 직장인도 많다. LCD(액정표시장치) 공장을 운영하는 박성규(49) 사장은 결혼 20년 차지만 “회식 후 술에 취한 모습을 가족에게 보이기 싫어 주중 하루나 이틀은 찜질방에서 잔다. 아내도 연락만 잘 되면 걱정하지 않는다. 직장이 있는 강남에서 경기 수원 집까지 술에 취한 채 가는 것보다 찜질방에서 자는 걸 (가족도) 더 안전하게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2월 17일 자정 서울 중구 다동에 있는 한 사우나 입구. 한 시간 동안 직장인 열댓 명이 그곳으로 들어갔다. “하루 자려고 왔나”라는 기자 질문에 그들은 매우 당연한 듯 “그렇다”고 대답했다. 집을 두고 찜질방 혹은 사우나에서 자는 풍경이 어느새 당연한 것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설동훈 전북대 사회학과 교수는 “직장인 찜질방족이 느는 건 결국 일과 가정이 양립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뜻”이라며 “서울에 집을 못 얻어 찜질방에서 자는 사람이 늘어나는 건 주말에만 가족과 시간을 보내는 주말 부부 혹은 주말 가족을 양산하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주간동아 927호 (p34~35)

오소영 동아일보 인턴기자 pangkyk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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