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22

2014.01.20

겁 없는 그녀들의 발칙한 상상

연극 ‘하녀들’

  • 김유림 월간 ‘신동아’ 기자 rim@donga.com

    입력2014-01-20 10: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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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겁 없는 그녀들의 발칙한 상상
    영화 ‘하녀’에서 가장 고풍스러운 아우라를 내뿜는 사람은 바로 집사 윤여정이다. 절제된 움직임으로 조용히 집안을 돌보고 젊은 하녀 전도연을 제어하는 그의 모습에서 우아함과 고급스러움, 카리스마까지 엿보인다.

    단정한 메이드 복에 얽매였던 그는 주인이 잠든 후 변신한다. 담배를 꼬나문 채 고급 와인을 마시고 거품 목욕을 즐기며 “아더메치”라고 말한다. ‘아니꼽고 더럽고 메스껍고 치사하다’는 뜻. 관객은 그런 윤여정의 변화를 보며 일말의 쾌감을 느끼지만, 곧 그 감정은 진한 패배감으로 치환된다.

    이윤택 연출이 이끄는 연희단거리패가 5년 만에 무대에 올리는 연극 ‘하녀들’도 마찬가지다. 두 하녀 클레르와 솔랑주는 포악한 마담이 집을 비운 사이 각각 ‘마담’과 ‘하녀’를 연기하는 ‘놀이’를 시작한다. 항상 받들어 모셔야 했던 마담의 거만하고 충동적인 행동을 흉내 내며 하녀들은 깔깔 웃는다. 그들은 해방감을 느끼지만 이내 비참해진다. 그러던 중 자신들의 밀고로 감옥에 갔던 마담 애인이 가석방됐다는 소식을 듣고 두 하녀는 두려움에 휩싸인다. 밀고자 정체가 밝혀질 위기에 처한 두 하녀는 두려움에 떨다 마담을 독살할 계획을 세운다.

    이들의 고뇌는 자각에서 시작한다. 클레르는 ‘글을 아는 하녀’다. 상류층의 화려한 삶을 접하지만 누릴 수 없는 그는 불타는 욕망을 품고도 마치 ‘마음 없는 사람’처럼 행동해야 한다. 하녀들은 상류사회를 동경하고 비웃지만, 결국 가질 수 없다는 현실을 직시한 후 지극히 폭력적이고 비이성적으로 변한다. 그들에게 남은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추락뿐이다.

    이윤택 연출의 ‘하녀들’은 2002, 2009년 ‘하녀들’에 비해 가볍고 유머가 넘친다. 두 하녀는 몽상의 연기를 통해 인간의 결핍된 자의식을 표출하는데, 관객에게 전달되는 그들의 꿈은 억척스럽고 비참하기보다 순수하고 처절하다. 하녀들의 상상은 추악한 욕망이 아니라, 아름다운 이데아처럼 보인다. 현대인은 대부분 회사에서, 가정에서, 사회에서 스스로를 ‘약자’로 인식하고 불만을 갖기에 관객은 하녀들의 겁 없는 일탈을 통해 해방감을 느낄 수 있을 듯하다.



    ‘아더메치’한 세상에 정면으로 맞서지도, 순종할 수도 없는 주변인의 ‘반란’은 어떤 결말을 맺을까. 2009년 작가 장 주네 탄생 100주년 기념 ‘하녀들’을 공연했던 김소희, 배보람, 황혜림이 다시 호흡을 맞췄다. 1월 22일부터 2월 2일까지, 서울 종로구 혜화동 게릴라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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