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16

2013.12.09

피 부르는 색깔 전쟁… 혼돈의 태국

親탁신파 vs 反탁신파 7년째 충돌… 푸미폰 국왕 이번에도 중재자 구실 하나

  • 하정민 동아일보 국제부 기자 dew@donga.com

    입력2013-12-09 14:21: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부정부패 혐의로 해외 도피 중인 탁신 친나왓(64) 전 태국 총리의 사면 문제를 놓고 태국 사회가 내전이나 다름없는 극한 분열 양상을 보인다. 11월 30일 시작된 친(親)정부 시위대와 반(反)정부 시위대의 유혈 충돌로 최소 4명이 숨지고 수십 명이 다쳤다.

    사태가 장기화할 조짐을 보이자 친탁신파(레드 셔츠)와 반탁신파(옐로 셔츠)로 갈린 태국 사회가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다. ‘레드 셔츠’는 농민, 도시 빈민층, 태국 북부 주민이, ‘옐로 셔츠’는 부유층, 도시 엘리트, 군경, 태국 중남부 주민이 대부분이다. 각각 ‘프롤레타리아(레드)’와 ‘왕(옐로)’을 의미하는 색깔을 택했기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

    탁신 사면안 통과로 반탁신파 집결

    ‘색깔 전쟁’이라는 이름이 붙은 양측의 갈등은 2006년 탁신 총리 실각 이후 7년째 지속된 난제(難題)인 데다 그 배후에는 태국의 뿌리 깊은 빈부 격차와 계층 갈등이 자리한다. 태국 국왕이나 군부가 개입해 사태를 일시적으로 진정시킨다 해도 근본 원인을 치유하지 않는 한 태국의 정정 불안은 계속되리라는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잉락 친나왓(46) 총리는 2011년 7월 총선에서 승리하며 태국 최초 여성 총리가 됐다. 미인대회 출신으로 빼어난 미모와 세련된 화술을 지닌 잉락 총리는 그 자신의 인간적 매력을 앞세워 집권에 성공했다. 하지만 정계 경험이 전혀 없어 그가 총리직에 오른 직후부터 오빠인 탁신 전 총리가 ‘수렴청정’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많았다.



    실제 그는 오빠의 후광에서 벗어나지 못한 모습을 자주 보였다. 잉락 총리는 일부 정책에서 탁신 전 총리와 의견을 달리하기도 했으나 큰 틀에서는 탁신 전 총리의 정책을 그대로 승계했다. 특히 물심양면으로 탁신 전 총리의 복권을 위해 노력해왔다.

    집권 2년이 지나 어느 정도 안정기에 접어들었다고 판단한 잉락 총리는 올해 하반기부터 본격적으로 탁신 전 총리의 사면과 귀국 허용을 골자로 한 법안 제정을 추진해왔다. 당연히 야권이 거세게 반발했다. 11월 1일 잉락 총리와 집권 푸어타이당이 사면법을 통과시키자 태국 전역에서 대규모 반정부시위가 일기 시작했다.

    태국 상원은 이 사면안을 부결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야권이 총리 불신임 카드로 잉락 총리에 맞섰다. 푸어타이당이 장악한 태국 하원이 11월 28일 민주당 등 야권이 제출한 총리 불신임안을 부결하긴 했지만 사태는 쉬 진정되지 않았다. 이때부터 반탁신파 시위대가 방콕 시내 주요 정부 청사를 점거하고 정부 공권력과 본격적으로 맞서자 일촉즉발 상황이 연출됐다.

    옐로 셔츠 vs 레드 셔츠 잇단 충돌

    피 부르는 색깔 전쟁… 혼돈의 태국
    태국의 현 상황을 이해하려면 ‘옐로 셔츠’와 ‘레드 셔츠’의 대립이 본격화한 7년 전으로 돌아가야 한다. 2006년 1월 총리직에 있던 탁신과 그 일가는 친그룹 핵심 계열사인 친코퍼레이션의 주식 49.6%를 싱가포르 국부펀드 테마섹에 팔았다. 친그룹은 탁신 전 총리가 2001년 초 총리가 되기 전까지 소유했던 태국 굴지의 재벌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탁신 일가가 약 20억 달러(약 2조1000억 원)라는 막대한 차익을 얻고도 세금을 한 푼도 내지 않은 사실이 드러나자 민심이 등을 돌렸다. “사리사욕을 위해 태국 국부(國富)를 외국에 넘겼다”는 비난이 거세졌다.

    ‘옐로 셔츠’의 전신 격인 국민민주주의연대(PAD)가 바로 이때 출범했다. 이들은 왕실 상징색인 노란색 옷을 입고 “국왕을 위해서라도 탁신이 퇴진해야 한다”며 시위를 벌였다. 왕실모독법이 존재하는 태국에서 왕실 권위는 그야말로 신성불가침이다. 서민층조차 왕실과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에게 대항하지 않는다. 하지만 탁신 전 총리는 종종 왕실 권위를 부정하는 듯한 발언을 일삼았고 이 전력이 문제가 됐다.

    탁신 전 총리는 2006년 9월 군부 쿠데타로 실각해 영국으로 도피했다. 하지만 2007년 12월 총선에서 탁신 전 총리 측근들이 만든 친탁신파 PPP당이 승리하고 2008년 2월 탁신 전 총리가 귀국하자 ‘옐로 셔츠’가 다시 결집했다. 이들은 PPP당이 ‘탁신의 꼭두각시’라며 총리실, 공항, 주요 정부 건물을 장악하고 대규모 반정부시위를 벌였다. ‘옐로 셔츠’가 자신의 측근을 공격하는 와중에 부정부패 혐의로 소송까지 잇따르자 탁신 전 총리는 2008년 8월 두 번째 해외 도피를 택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도시 빈민층, 농민, 탁신 전 총리 출생지인 태국 북부 치앙마이 지역 주민이 빨간색 옷을 입고 ‘레드 셔츠’로 집결했다. 집권 기간 탁신 전 총리가 저소득층을 위해 사실상 무상 교육과 의료 혜택을 대대적으로 제공했기에 서민은 아직 그를 지지하는 편이다. 6%가 넘나드는 국민총생산(GDP) 증가율을 기록했던 탁신 전 총리 집권기와 달리 그의 후임 총리들이 뚜렷한 경제 성과를 내지 못한 점도 서민의 탁신 향수를 자극했다.

    2008년 ‘반탁신’을 기치로 내건 보수 성향 정당인 민주당의 아피싯 웨차치와 총재가 총리로 등극했다. 아피싯 정권이 탁신 시절 서민에게 제공되던 각종 혜택을 줄이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레드 셔츠’가 폭발했다. 이들은 2010년 3월부터 5월까지 태국 전역에서 대규모 반정부시위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사망자 약 90명과 부상자 수백 명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태국이 입헌군주제를 도입한 1932년 이후 가장 참혹한 유혈사태가 됐다.

    푸미폰 ‘태국의 살아 있는 부처’로 추앙

    2010년의 아픈 기억이 가시기도 전 이번 사태로 다시 사망자가 발생했다. 11월 30일 밤과 12월 1일 새벽 사이 방콕 외곽 한 체육관에 모인 ‘옐로 셔츠’와 ‘레드 셔츠’가 시비를 벌이다 총격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옐로 셔츠’ 소속 일부 대학생과 이들을 진압하려던 경찰 등 총 4명이 숨졌다. 태국은 총기 소유를 허용하는 데다 불법 총기 소지자도 많아 총기 사고 우려가 매우 높은 나라다.

    태국 정부는 결국 12월 1일 방콕 시내에 경찰 2만 명과 군 병력 3000명을 투입했다. 군경이 반정부시위대 해산 작전에 나서는 동안 잉락 총리가 이들을 피해 모처로 급히 대피하는 소동까지 벌어졌다. 유혈 사태가 벌어지자 잉락 총리와 수텝 트악수반 전 부총리는 1일 방콕 모처에서 비밀리에 긴급 회동을 가졌다. 하지만 양측은 끝내 의견차를 좁히지 못했다. 수텝 전 부총리는 “이틀 안에 퇴진하라”며 최후통첩을 했고, 잉락 총리는 “절대 퇴진할 수 없다”며 맞섰다.

    전문가들은 이번 사태가 12월 5일 푸미폰 국왕의 86세 생일을 계기로 전환점을 맞을 개연성이 크다고 본다. ‘태국의 살아 있는 부처’로 추앙받는 푸미폰 국왕은 68년째 재임하고 있는 세계 최장 집권 군주다. 재임 기간 쿠데타를 19번이나 겪은 그는 이때마다 탁월한 중재자 구실을 하며 사회 안정을 위해 노력해왔다.

    푸미폰 국왕은 매년 생일 때마다 정례 연설을 했다. 그는 올해 연설에서 반정부시위 중단 같은 직접적인 언급은 하지 않았다. 반정부시위대는 12월 6일 다시 시위를 재개해 태국 사태가 어떻게 전개될지 현재로선 예측하기 힘든 상태다.

    탁신은 누구인가

    ‘CEO형 정치가’ vs ‘부정부패 상징’ 평가 엇갈려

    태국 사회의 지난한 ‘색깔 전쟁’을 야기한 탁신 친나왓(64·사진) 전 총리는 2008년 8월부터 5년 넘게 해외 도피 생활을 하지만 여전히 태국 정국의 핵심에 서 있는 인물이다. 탁신 전 총리가 태국을 넘어 아시아 현대 정치사에 한 획을 그은 인물이라는 점에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지만, 그에 대한 평가는 극명히 갈린다.

    탁신 지지파는 그가 1990년대 말 아시아를 강타한 외환위기를 잘 수습하고 태국의 고속성장 기틀을 마련했을 뿐 아니라, 각종 개혁정책을 통해 소외된 서민층을 배려한 지도자라고 칭송한다. 하지만 반대파는 그가 대중과 영합하는 정책만 펼친 포퓰리스트이자 부정부패의 온상이라고 비난한다.

    1949년 태국 북부 치앙마이에서 화교(華僑) 후손으로 태어난 탁신 전 총리는 경찰관으로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경찰 고위간부의 딸과 결혼해 미국 유학길에 오른 그는 귀국 후 컴퓨터 납품 사업을 부업으로 시작한다. 사업이 예상 외로 번창하자 87년 자기 이름을 딴 친그룹을 설립해 본격적으로 사업에 뛰어든다. 90년대 초 무선전화통신 사업으로 대박을 터뜨린 그는 태국 굴지의 재벌로 부상한다. 이때 청백리로 유명한 잠롱 스리무앙 전 방콕 시장이 탁신 전 총리의 추진력을 높이 사 외무부 장관으로 천거했고 그는 부총리까지 지낸다.

    1998년 타이락타이(TRT)당을 창당하며 정계에 본격 뛰어든 탁신 전 총리는 2001년 초 총선에서 승리해 굴곡의 정치역정을 시작한다. 정계 입문 3년 만에 최고 권좌에 오른 그는 농가 채무 탕감, 저소득층을 위한 사실상의 무상 의료 서비스 등 파격적인 개혁정책으로 표심을 얻는다. 그 결과 4년 뒤 치른 총선에서 하원 500석 중 377석을 휩쓸며 재집권에 성공한다.

    그러나 2006년 9월 미국 방문 중 발생한 군부 쿠데타로 권좌에서 축출돼 영국으로 도피했다. 측근들이 만든 PPP당이 선거에서 승리해 2008년 2월 귀국했지만 부정부패 혐의로 인한 소송 문제로 8월 다시 해외로 도피했다. 두바이, 홍콩 등을 오가며 살던 탁신 전 총리는 2011년 7월 자신의 9남매 중 막내인 잉락 친나왓을 내세워 또다시 선거에서 승리했다.

    잉락 총리가 집권한 후 반탁신파의 반발도 거세졌다. 이래저래 탁신 전 총리는 태국 사회 갈등의 아이콘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