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 20개로 담아낸 구텐베르크의 꿈

뮤지컬 ‘구텐버그’

  • 김유림 월간 신동아 기자 rim@donga.com

    입력2013-09-30 11:3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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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자 20개로 담아낸 구텐베르크의 꿈
    15세기 독일 구텐베르크의 활판인쇄술 발명은 유럽 사회에 혁명적 변화를 불러왔다. 한 글자씩 일일이 손으로 옮겨 적었던 성경을 대량 생산하면서 가난한 사람도 성경을 볼 수 있게 됐다. 활판인쇄술은 지식의 대중화와 도시 형성에도 크게 기여했다. 기득권의 강한 반발에도 활판인쇄술을 발명해낸 구텐베르크는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

    뮤지컬 ‘구텐버그’는 대박 뮤지컬을 꿈꾸는 두 청년이 구텐베르크의 인생을 통해 자신의 꿈을 펼치려는 이야기다. 초보 뮤지컬 작가 ‘버그’와 ‘더그’는 스타벅스와 양로원에서 일하며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공연하는 대박 뮤지컬을 만들겠다”는 꿈을 키운다. 이들은 ‘와인제조가였던 구텐베르크가 글을 못 읽어 고통 받는 마을 사람들을 위해 포도 압착술을 이용해 활판인쇄술을 발명했다’는 내용의 뮤지컬을 만들고, 이 작품의 투자자를 찾기 위한 ‘시연회’를 연다.

    막이 오르고 ‘버그’와 ‘더그’라고 적힌 모자를 쓴 두 청년이 관객에게 “당신들은 브로드웨이의 거물급 프로듀서”라며 “언젠가 브로드웨이에 올릴 뮤지컬을 선보이겠다”고 말한다. 수동적인 관객에게 중요한 직책을 맡기는 발상이 흥미롭다. 극장을 빌리는 것조차 힘들었던 두 청년은 시연회에 필요한 소품과 배우를 마련할 여유도 없었고, 결국 텅 빈 무대에서 20여 개 배역을 직접 소화해낸다.

    배역 변화를 알려주는 것은 오직 모자뿐이다. 모자를 바꿔 쓰면 배역이 바뀐다. 모자에는 주인공 구텐베르크와 수도승, 유대인을 증오하는 꽃 파는 소녀, 가슴만 크고 무식한 헬베티카 등 다양한 캐릭터가 적혀 있다. 모자 하나만 바꿔 썼을 뿐인데 배우의 표정과 목소리, 행동 모든 것이 바뀐다. 특히 여러 인물을 동시에 표현할 때 10개가 넘는 모자를 한 번에 쓴 채 하나하나 벗어가며 연기하는 모습을 보면 절로 탄성이 나온다.

    모두가 글을 읽을 수 있는 세상을 꿈꾸며 보잘것없는 포도 압축기로 인쇄기를 발명하려는 구텐베르크는 옛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인쇄기를 부수려는 수도사와 첨예하게 갈등한다. 극중극(劇中劇)은 해피엔딩이 아니지만, 관객은 이미 구텐베르크의 업적을 잘 알고 있다.



    이 작품은 기존 극중극 형식과 달리 ‘내부 작품’의 갈등을 ‘바깥 작품’에서 재현하는 수준에 머무르지 않고, 안과 밖의 주인공, 즉 구텐베르크와 버그, 더그를 동일선상에 놓는다. 결국 구텐베르크가 수많은 갈등에도 활판인쇄술을 만들어냈듯 두 청년도 언젠가는 꿈을 이룰 수 있으리라는 암시를 준다. 125분 동안 한 번도 무대를 떠나지 않고 땀을 뻘뻘 흘리며 연기하는 두 청년을 보면서 브로드웨이 투자자 역을 맡은 관객은 박수갈채를 보내게 된다.

    화려한 세트도, 소품도 없이 극을 끌고 가야 하는 만큼 두 배우의 어깨가 무겁다. 버드 역을 맡은 송용진과 더그 역을 맡은 정원영의 잘 훈련된 연기는 텅 빈 무대를 가득 채우고도 남을 정도다. 11월 10일까지, 서울 흥인동 충무아트홀 중극장 블랙.

    모자 20개로 담아낸 구텐베르크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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