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01

2013.08.19

여자가 떠나자 가슴으로 우는 남자

나쁜 남자 길들이기 ②

  • 마야 최 심리상담가 juspeace3000@naver.com

    입력2013-08-19 09:5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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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진오(55·가명) 씨의 상담이 종결된 지 6개월이 지났을 즈음 이번에는 강씨 자신이 연락을 해왔다. 나는 일로 무척 바빴고, 강씨의 상담을 까맣게 잊었기에 처음엔 강씨 목소리를 알아채지 못했다. 그 특유의 말버릇 “아니, 이렇습니다”라는 말을 듣기 전까지는.

    그가 찾아왔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띈 점은 차갑고 흔들림 없는 태도에 변화가 생겼다는 것이었다. 눈은 충혈됐고 깔끔하기 그지없던 옷차림이 흐트러져 홀아비를 연상하게 했다. 그토록 자신을 완벽하게 가꾸던 남자가 자신 돌보기를 소홀히 하는 듯했다. 인사하면서도 그의 모든 움직임을 놓치지 않으려 주시했다. 그가 입을 연 것은 입술을 여러 번 움찔거린 후였다.

    “저희 헤어졌습니다.”

    그 순간 위로의 말을 해야 할지, 헤어진 이유를 물어야 할지 감이 오질 않았다. 미간을 모으고 머릿속으로 질문을 고르는데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사실 제가 실연한 겁니다.”



    “아!”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감탄사에 나 자신이 당황하자 그가 한쪽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다시 침묵이 흘렀다. 그는 평소 어떠한 위로도 필요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때만큼은 위로를 받고 싶다는 욕망을 찐득하니 흘리고 있었다. 다만 그 욕망은 시베리아처럼 차가웠다. 따뜻한 커피를 내놓은 이유는 강씨와 침묵 속에서 앉아 있기가 불편했기 때문이다. 그는 형식적으로 커피 잔을 입에 가져다댔다. 그 와중에도 예의를 지키려는 그의 몸짓이 애처로웠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는 텅 빈 블랙홀처럼 섬뜩하면서도 애잔했다.

    다정했던 둘 사이에 도대체 무슨 일이?

    “그녀와 오해가 있었습니다. 그녀와 그녀 친구들 사이에 끼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때, 그녀가 결별을 통보해왔습니다.”

    “원래 솔직하게 모든 것을 말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십니까?”

    그의 눈동자가 좌우로 불안하게 움직이더니 왼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나는 그가 모든 것을 말하지 않는 성격을 가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았기에 저리도 철저하게 자신을 가리는 법을 배웠을까. 반은 짜증이 나고 반은 호기심이 솟구쳤다. 그가 하는 말의 행간이나 몸언어에 주의를 집중하는 것도 피곤했다. 아마 지인의 심정이 이랬을 것이다. 그녀는 직선적이고 열정적이며 거짓말하는 것을 경멸했고, 결정과 행동이 빨랐다. 그가 이런 식으로 뭉기적거렸다면 그녀에게 차이고도 남았다. 한편으론 그에게서 비쳐지는 고뇌의 무게가 그녀에 대한 그의 감정을 말하는 것 같아 숨이 막히는 느낌이었다. 도대체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가 돌아간 뒤 지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아마도 그녀 역시 그와 헤어지고 심한 가슴앓이를 하고 있을 터. 지난번 상담에선 그의 외로움에서 비롯된 나쁜 남자의 습성을 바꿨다면, 이번 회기엔 무엇을 상담목표로 잡아야 할까. 문득 그가 무엇 때문에 나를 찾았는지조차 묻지 않고 첫 상담이 끝났음을 깨달았다. 애꿎은 손가락만 뚝 소리 나게 꺾었다.

    그즈음 나는 명상에 빠져 있었다. 내담자를 만나는 데 명상이 큰 도움을 줬다. 어쩌면 나는 심신이 지쳐 있었는지도 모른다. 눈 뜨면 고통을 주렁주렁 단 채 나를 찾아오는 내담자들이 엮은 굴비처럼 나의 목을 따려고 기다린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그것이 나를 숨 막히고 진 빠지게 했다. 명상을 하면 심신이 안정되고 균형이 잡힌다고 해서 시작했는데, 하다 보니 어떤 특정 능력이 확장됐다. 바로 직관이었다. 그전부터 직관이 뛰어나다는 말을 교수님들과 선배들로부터 들어오긴 했지만, 명상으로 그 능력이 더 예민해지고 확대된 것이다.

    두 번째 시간, 그에게 나와 함께 명상을 하자고 청했다. 현대심리학을 한다는 사람이 명상 이야기를 꺼내니 처음엔 조금 의아한 눈치였지만, 그는 아무 말 없이 순순히 따랐다. 미리 준비한 요가 매트 위에 그를 앉힌 뒤 나도 그를 바라보고 바짝 다가앉았다. 머리가 좋은 그는 내 지시를 재빠르게 이해했다.

    호흡이 안정됐을 때 나는 그의 양손을 잡았다. 한 번도 해보지 않았지만 혹시라도 그의 생각을 읽을 수 있을까, 아니 적어도 그의 느낌이 전해질까 싶어서였다. 호흡이 깊어지자 등 전체가 따뜻한 안개에 감싸인 듯 뜨끈뜨끈해졌다. 오로지 그의 날숨과 나의 날숨이, 그의 들숨과 나의 들숨이 밀려오고 밀려가는 파도처럼 호흡을 맞췄다. 뜨거운 기운이 점점 온몸을 감싸더니 갑자기 이마 안에 뜨겁고 발광하는 무엇이 활짝 피어나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나는 점점 더 그가 돼 그의 혼란스럽고 복잡한 감정 속으로 빠져들었다.

    최선을 다하지 않는 사랑은 후회

    감정으로 마음이 아픈 것은 아니었는데,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나왔다. 희한하게도, 왼쪽 관자놀이 쪽으로 또 하나의 누선이 터진 듯 눈물이 흐르는 느낌이 들었다. 잡았던 그의 손을 놓고 왼쪽 관자놀이를 만져봤으나 어떤 액체의 기운도 없었다. 나는 명상이 끝날 때까지 수차례 흘리지도 않은 눈물을 닦으려고 왼쪽 관자놀이를 만졌다. 명상이 끝났을 때 언뜻 그의 이마 속 발광체를 본 듯했다. 순백의 접시꽃.

    “저는 비겁했습니다. 그녀의 지인들이 그녀에 대한 루머를 이야기했을 때 또다시 내 주변으로 유리벽이 솟는 걸 느꼈습니다. 그녀와 나는 마음과 몸이, 영혼과 육이 통한 상태였는데도 말입니다. 나는 그녀를 멀리하고 관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녀의 지인 가운데 그녀가 아끼는 후배가 있었습니다. 나는 어쩌면 그녀의 지인들이 하는 말을 믿어 그녀를 오해하기 시작했고 그녀가 음해했다는 그녀의 후배에게 마음이 갔던 것 같습니다. 얼떨결에 그녀를 부를 때 그 후배의 이름을 댔죠. 그것도 두 번씩이나. 그녀는 내게 물었습니다. 왜 자신을 후배 이름으로 부르냐고. 저는… 저는 솔직하지 못했습니다. 얼버무리려고 했죠. 그녀는 단박에 그것을 알아챘습니다. 그다음 날 결별 e메일을 받았습니다. 저는 진실하지 않으면 결코 명석한 그녀를 설득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죠. 그래서 솔직히 썼습니다. 그녀, 그리고 그녀의 후배가 죽은 아내의 현신 같았다고요. 그녀는 내 e메일을 읽고 처음으로 자기 이야기를 길고 길게 써서 보내왔습니다. 그리고 왜 우리가 안 되는지에 대해서도.”

    그는 울고 있었다. 나는 알 것 같았다. 내 지인은 늘 순정한 사랑을 꿈꿔왔다. 어떠한 불순물 하나 섞이지 않은. 그러나 이 세상에서 남녀의 사랑이란 그렇게 순정하지 않다. 그녀는 그것을 인정할 수 없었고 자신의 남자 마음에 어떠한 형식으로든 다른 여자가 들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토록 다정하고 열정적인 그녀는 순식간에 냉정해졌고 남자는 그제야 당황했다.

    하루 이틀이면 돌아올 줄 알았던, 늘 기다려주고 자신만을 바라보던 그녀는 더는 그 자리에 없었다. 그는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못했고, 그녀를 기다렸다. 그는 그녀가 돌아오지 않는 강을 건넜다고 말했다. 어두운 얼굴 위로 한 줄기 희망이 내비쳤으나 그뿐이었다. 그의 얼굴은 다시 깜깜한 밤이 됐다. 결국 나쁜 남자는 여자가 떠나야만 그 여자를 그리워하는 것인가. 나는 그의 움츠러든 어깨에 손을 얹었다.

    “더 내려놓으세요. 모든 것을 말하고 사죄하세요. 여자에게 가장 큰 상처를 주셨군요.”

    “그럼 그녀가 돌아올까요?”

    “그건 저도 모릅니다. 그러나 최선을 다하지 않은 사랑은 반드시 후회를 남기죠.”

    고작 한 말이 최선을 다하는 사랑이라니. 모든 것을 체념한 듯한 그의 얼굴을 보면서 나는 왼쪽 관자놀이로 눈물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아마도 누군가 내 이마에 머리를 기댄 채 울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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