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96

2013.07.15

러드 “이젠 팀워크 총리로 불러주오”

호주 노동당 대표 경선, 와신상담 3년 만에 복귀

  • 윤필립 시드니통신원

    입력2013-07-15 10:4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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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드 “이젠 팀워크 총리로 불러주오”

    외교부 장관 시절이던 2010년 11월 2일 방한해 이명박 당시 대통령을 만난 케빈 러드 호주 총리.

    자신의 후계자가 모의한 ‘당내 쿠데타’로 불명예스럽게 총리직에서 쫓겨났던 호주 노동당 소속 케빈 러드(56) 전 총리가 6월 26일 3년 만에 복귀했다. 9월 14일 예정된 차기 총선을 3개월 앞두고, 자칫 정치생명이 끝날 수도 있는 위기상황에서 마지막 승부수를 던진 끝에 기사회생한 것.

    이날 캔버라 국회의사당에서 열린 노동당 대표 경선에서 도전자로 나선 러드는 자신을 축출하고 총리가 됐던 줄리아 길라드 총리를 57대 45로 물리쳤다. 이로써 지난해 2월과 올 3월에 열린 두 차례 당권 도전에서 큰 표 차이로 패배했던 러드는 2전3기 끝에 권토중래했다.

    그가 두 차례 당권 도전에서 치욕에 가까운 패배를 당하면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록스타에 버금하는 대중적인 인기 덕분이다. 그는 해리 포터라는 별명을 얻게 된 친근한 외모와 명쾌한 대화술을 바탕으로, 집권 초기에 얻은 70% 이상의 지지율을 1년 남짓 유지하면서 ‘미스터 70%’로 불리기도 했다.

    배신한 길라드 밑에서 외교부 장관 맡기도

    ‘선거의 달인’으로 불리던 자유-국민 연립당 소속 존 하워드 전 총리의 기세에 눌려 11년 6개월 동안 4연패의 늪에 빠졌던 노동당의 ‘구원투수’로 등장한 러드는 2007년 총선을 대승으로 이끌면서 호주 정치사상 최연소 총리(당시 49세)가 됐다. 또한 2008년 닥친 국제 금융위기를 과감한 경기부양책으로 극복해 세계적으로 주목받기도 했다.



    승승장구하던 러드는 뜻밖의 ‘당내 쿠데타’를 당한 뒤, 자신을 배신한 길라드 총리 밑에서 외교부 장관으로 재직하며 와신상담 재기 기회를 노렸다. 그는 1기 임기인 3년도 채우지 못한 최초의 총리라는 불명예를 떨쳐내려고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한 번 잃어버린 당권 혹은 당심(黨心)을 되찾아올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입헌군주제와 내각책임제를 동시에 채택한 호주에서는 당 소속 의원들이 당 대표에게 청원(petition calling)할 경우 대표는 이를 수용할 의무가 있다. 그리고 집권당 경선에서 승리한 당대표는 의회에서 총리로 선출된다. 이웃나라 일본과 비슷한 제도다. 그렇다면 왜 노동당의 메시아였던 러드는 동료 의원들에게 팽당했을까.

    그 답을 얻으려면 호주 정치계에 만연한 계파정치와 노동당의 뿌리인 노동조합의 파워게임을 살펴봐야 한다. 이른바 극우에서 극좌까지 아우르는 호주 정치계의 이념 스펙트럼은 그 폭이 아주 넓다. 자유방임에 가까운 시장경제와 백인우월주의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극우 성향의 정당들, 그리고 정통 마르크시즘을 모토로 삼은 호주공산당(CPA)이 공존한다.

    양대 정당인 자유당과 노동당의 사정도 비슷하다. 보수 성향의 자유당은 강경, 중도, 온건파로 나뉘고 진보를 표방하는 노동당은 우익, 중도, 좌익으로 나뉜다. 이를 토대로 큰 틀의 계파가 형성되고, 출신 지역에 따라 합종연횡하면서 복잡한 양상을 띤다.

    러드는 노동당 우파로 분류되지만, 노골적으로 계파정치를 적극 반대하는 처지여서 계파 실세들에게 미움을 샀다. 반면 길라드는 노동당 좌파에 속하지만 우파 실세들과 쿠데타를 공모해 총리직에 올랐다가 최근 동일한 세력에 의해 팽당했다. 그와 손잡았던 우파세력이 3년 만에 러드 지지로 돌아섰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6월 27일자 ‘시드니모닝헤럴드’는 칼럼을 통해 “러드 등에 비수를 꼽았던 세력이 이번에는 길라드의 등을 찔렀다. 결국 그들은 양손에 피를 묻혔다”고 비판했다. 바로 이 대목에서 호주 계파정치의 전횡을 읽을 수 있다. 2010년 6월 24일에 벌어진 ‘한밤중의 쿠데타’를 회고해보면 그 실상이 더욱 또렷하게 드러난다.

    ‘독불장군’ 당내 쿠데타로 축출당해

    러드 “이젠 팀워크 총리로 불러주오”
    당시 러드 총리는 갑자기 밀어닥친 국제금융위기 타개 방법으로 경기부양책을 채택했다. 그 결과 불가피하게 발생한 재정적자를 만회할 요량으로 슈퍼광산세 등을 신설해 큰 기업들과 갈등을 빚었다. 광산업 부호들이 직접 시위에 나서고, 일자리 위협을 이유로 우파 노동조합이 동조하는 양상을 보이자 러드의 지지율은 40%대로 떨어졌다.

    이를 기회로 당내 우파 실세들과 노동당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우파 노동조합이 손을 잡았다. 그들은 러드 총리의 오랜 정치 파트너였던 길라드 부총리를 전면에 내세워 ‘당내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런 기미를 전혀 눈치 채지 못했던 러드 총리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국민은 분노했고 언론도 러드를 동정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연방의사당 앞에서 울먹이며 퇴진성명을 발표하는 러드를 지켜보던 그의 부인 테레사 레인이 “국민이 뽑아준 총리를 뒤에 숨은 노동조합 중진들이 쫓아내면 어떻게 하느냐”고 항변했지만 모든 상황이 끝난 다음이었다. 이날 ‘시드니모닝헤럴드’는 칼럼을 통해 “쥐들(Rats)이 총리를 몰아냈다”고 표현했다.

    거사가 진행되던 밤, 불과 1시간 전에 총리 사무실로 찾아와 ‘끝없는 충성서약’을 다짐했던 길라드가 돌변해 “당권에 도전하겠다”고 말하자 러드는 격노했다. 그는 ‘남성들의 리그’인 호주 정치판에서 큰 부담을 감수하면서까지 호주 최초의 여성 부총리로 임명하는 등 길라드에게 정치적 기반을 마련해줬기 때문이다.

    마침내 두 정치인의 운명이 걸린 아침이 밝았다. 길라드에게는 당권 도전이었고 러드에게는 재신임을 묻는 투표였다. 러드는 내심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지만 정작 의원총회 분위기는 딴판이었다. 계파 실세들이 길라드 지지를 표명했기 때문이다. 사태를 직시한 러드는 경선포기 선언과 함께 퇴임연설을 했다.

    러드는 우등생 출신이다. 유능한 외교관 경력을 지녔을 뿐 아니라, 정치 입문 후에도 패배를 모르던 정치인이다. 이렇듯 젊고 유능한 러드는 11년 6개월 동안 야당 신세를 면치 못했던 노동당을 집권하게 만든 걸출한 인물이다. 그런 공로를 기반으로 그는 소신껏 국정을 이끌었다.

    러드 “이젠 팀워크 총리로 불러주오”

    지난해 3월 27일 서울핵안보정상회의에 참석한 길라드 당시 호주 총리가 이명박 전 대통령과 악수하고 있다.

    내각책임제하의 총리가 아니라 마치 대통령중심제 국가의 대통령 같은 무소불위 지위를 누렸다. 러드는 결국 그 덫에 걸리고 말았다. 그가 신경질적으로 싫어하는 계파 리더들은 말할 것도 없고 장관이나 중진의원들과도 별다른 논의 없이 국가정책을 결정하는 독불장군이 된 것. 총리 집무실만 자정 이후까지 불이 켜지기 일쑤였다.

    러드는 소문난 일중독자다. 그런 특성은 어린 시절에 형성됐다고 한다. 그는 소년가장이나 다름없이 살면서 가족 생계비와 학비를 벌려고 닥치는 대로 일했다. 그러면서도 수석을 다투는 우등생이었으니 일(공부)중독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 러드는 11세 때 교통사고로 아버지를 여의면서 고생하기 시작했다. 그는 “불우한 어린 시절에 경험한 일이 사회 정의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고 회상했다.

    9월 차기 총선서 박빙 승부 예상

    러드는 외교부 공무원과 퀸즐랜드 지방정부 관리를 거쳐 1988년 하원의원에 당선돼 정계에 입문했다. 그는 호주국립대(ANU) 중국어과 출신으로 만다린어를 능숙하게 구사한다. 그는 시드니에서 만난 후진타오 전 중국 국가주석과 만다린어로 대화를 나눠 중국인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또한 사위가 홍콩 출신일 정도로 친(親)아시아 정서가 강하다.

    6월 28일 연방의사당에서 러드 28대 호주 총리의 취임연설이 있었다. 그는 연설을 갈무리하면서 “우리 모두는 인간이고, 가족이 있고, 감정을 갖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의회 안에서 서로에게 좀 더 친절하고, 더 신사답게 대하도록 애쓰자”고 말했다. 이는 거친 언변으로 소문난 토니 애벗 야당 대표를 향한 견제성 발언이었다.

    러드 총리는 최근 실시한 개각에서 호주 역사상 가장 많은 수인 11명의 여성 장관을 임명해 야당과의 차별화를 꾀했다. 야당 예비내각에는 여성이 단 2명에 불과하다.

    한편 인기몰이에 능한 러드 총리는 총선 캠페인에서 젊은 세대와 여성, 그리고 이민자를 집중 공략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를 바탕으로 호주 언론은 차기 총선에서 재앙에 가까운 참패를 면치 못할 것으로 보였던 노동당이 박빙의 승부를 펼칠 것으로 전망한다. 특히 ‘시드니모닝헤럴드’는 신임 총리가 허니문 기간을 잘 활용하면 승산이 높다고 예상했다.

    또 다른 변수는 노동당의 화합이다. 그는 당권 도전에서 승리한 후 의총 연설에서 “총리직에서 축출당한 뒤 깊이 반성하면서 팀워크의 중요함을 깨달았다”고 토로했다. 그는 이어서 “앞으로 노동당은 개인이나 계파보다 팀워크로 움직이는 정당이 될 것”이라며 “당이 결속하면 총선에서 이길 수 있다”고 역설했다. 지금 호주에선 3년 만에 복귀한 ‘21세기 풍운아’ 러드 총리의 행보에 국민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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