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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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빈 강정’ 국민연금 책임투자

운용사 투명 공시 - 대기업 위주 주식형 투자 탈피해야

  • 정현상 기자 doppelg@donga.com

    입력2013-07-15 09: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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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속 빈 강정’ 국민연금 책임투자

    국민연금공단은 5조2400억 원을 사회책임투자 형식으로 운용한다고 밝혔지만 사후관리를 잘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는다.

    ‘밀어내기’ 횡포로 사회적 지탄을 받은 남양유업에 대해 공정거래위원회가 7월 8일 과징금 123억 원을 부과했다. 대리점주에게 제품을 강매하고 욕설을 퍼부은 영업사원의 녹취록이 공개되면서 알려진 남양유업의 ‘갑(甲)질’은 도리어 부메랑이 돼 회사에 큰 타격을 입혔다. 이 사태 직전인 5월 6일 111만7000원이던 이 회사 주가는 6월 25일 84만7000원까지 떨어졌다. 한 달 반 기간에 주가가 약 24% 떨어진 것이다. 매출도 15% 이상 급감했다. 비재무적, 비시장적 요소로 여겨졌던 사회책임 문제가 기업의 재무상황을 크게 악화시켰고, 투자자에게도 큰 손실을 안겼다.

    문제는 이 사안이 남양유업에만 그치는 게 아니라는 데 있다. 공적인 돈을 관리하는 국민연금공단이 남양유업의 지분 5.4%(4월 말 현재)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민의 돈을 사회책임 논란을 일으킨 기업에 투자했다는 사실을 어떻게 봐야 할까. “국민연금공단이 보유 중인 지분을 당장 회수해야 한다”(신경민 민주당 최고위원)는 주장도 있을 수 있다.

    국민연금공단은 기금운용본부가 남양유업에 직접 투자한 지분은 0.36%이고, 5.04%는 국민연금공단으로부터 위탁받은 외부 자산운용사가 투자한 것이기 때문에 별문제가 없다고 주장한다. 국민연금공단 관계자는 “원래 남양유업은 우량기업이었고, 갑을논쟁으로 불똥이 튄 것일 뿐 큰 문제없다”며 수익이 최우선이라는 견해를 고수한다.

    주가 떨어지면 피해는 국민에게 돌아가

    이런 사회책임 문제는 남양유업 사례만이 아니다. 하루가 멀다 하고 기업의 크고 작은 환경·사회·지배구조(ESG) 책임 이슈가 터져 나온다. 삼성전자(경기 화성-불산 누출), LG실트론(경북 구미-불산 누출), SK하이닉스(충북 청주-염소 누출) 같은 기업들은 환경 이슈를 겪었다. SK그룹과 CJ그룹은 오너가 구속되는 사태를 겪으며 지배구조의 후진성을 드러냈다. 이들 기업에도 국민연금공단은 적지 않은 지분을 투자한다.



    그럼에도 국민의 돈을 운용하는 국민연금공단은 당장 눈에 보이는 재무적 여건만 고려하기 때문에 ESG 사안의 심각성을 반영하지 못한다. 지속가능경영 컨설턴트 K씨는 “투자하기 전 그 기업에 대해 더 면밀하게 알아봐야 한다. 정보를 공개하지 않거나 말을 듣지 않으면 의결권을 행사해서라도 혼을 내고, 사고 치지 않게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사건이 터져서 주가가 떨어지면 결국 그 피해는 연기금과 국민에게 돌아간다”고 말했다.

    글로벌 연기금은 투자한 기업에서 ESG 이슈가 발생하면 지분율을 낮추거나 회수하는 등 적극적인 조치를 취한다. 몇 년 전 해외 대형 연기금이 대량살상무기를 생산했다며 국내 한 방산업체에서 지분을 철회한 것도 비슷한 사례다. 미국 캘리포니아공공근로자연금(CalPERS)도 2002년 노동환경 등의 기준이 자사 투자 기준에 못 미친다는 이유로 인도네시아 등지의 증시에서 철수한 바 있다. 즉, 이들 해외 연기금은 효율적인 장기투자를 위해 ESG의 책임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다.

    국민연금은 그 특성상 기금의 장기 수익관리가 중요하다. 사회책임투자(SRI)는 공적 연기금의 목표 가운데 수익성, 안정성, 공공성을 달성하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수단으로 여겨진다. 일반적으로 SRI는 기업 환경, 사회, 경제의 위험요인을 평가해 이들 기준이 우수한 기업에 투자하는 방식으로 운용되는데, 국민연금공단은 2009년 유엔 책임투자원칙(UN PRI)에도 가입해 ESG 이슈를 투자 의사결정 시 적극 반영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국민연금공단은 3월 말 기준 405조9000억 원의 기금을 운용한다. 이 가운데 75조6000억 원을 국내주식에 투자한다. SRI는 1.3%인 5조2400억 원 규모다. 물론 5조2400억 원이라는 돈은 적지 않은 규모지만 세계 평균(21.8%)에 비해 매우 낮은 비율이고, 실상을 들여다보면 이마저도 SRI 원칙보다 수익률에 초점이 맞춰진다. 한마디로 속 빈 강정인 셈이다.

    먼저 국민연금공단이 SRI 자금을 운용하는 절차에 구멍이 있다. 국민연금공단이 일정액을 위탁받아 SRI로 운용할 외부 자산운용사를 선정하는 경우를 보자. 운용사들은 국민연금공단에 SRI를 어떤 식으로 할 것인지 밝혀야 한다. 자산운용사들은 대부분 ESG를 평가할 수 있는 인력이 없어 외부 기관과 제휴해 응모한다. 보통 운용사들은 70%의 주식은 ESG를 반영하고 나머지는 수익률 중심으로 포트폴리오를 구성한다.

    문제는 이들 운용사가 국민연금공단으로부터 3, 6, 12개월 등 단기 단위로 운용 결과를 평가받는다는 데 있다. 이들 운용사가 수익률을 높이려고 편법을 쓰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즉, 사회책임을 다하는 기업이 아니더라도 수익률이 높으면 국민연금공단의 평가를 받기 전 편입해 수익률을 높이려 하는 것이다. 이종오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 사무국장은 “이런 맹점을 보완하려고 ESG를 어느 정도 반영했는지, 반영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운용했는지 등에 대해 투명하게 공시해야 사회책임투자 원칙이 제대로 적용된다”고 강조했다. 최근 국회에서 ESG 공시를 명시한 국민연금법 개정안을 논의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의결권 행사 구체적 가이드라인 만들어야

    ‘속 빈 강정’ 국민연금 책임투자
    둘째, 국민연금공단의 SRI 투자가 대기업 위주라는 지적이 있다. 대기업일수록 ESG 정보를 잘 공개해 SRI 평가 점수가 높게 나와 이런 결과가 나올 수밖에 없다는 현실적 한계가 있다. 2012년 6월 현재 국민연금공단이 기업에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는 지분 1% 이상을 보유한 상장기업은 567개에 이른다. 5% 이상 지분을 가진 기업만 해도 182개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국민연금공단이 중소기업에도 SRI 자본을 투입하겠다는 뜻만 있다면 중소기업의 ESG 정보공개를 유도해 대기업 편중의 자본시장을 바꿔나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

    셋째, 국민연금공단의 SRI 투자 유형이 모두 국내주식형뿐인 것도 문제다. 해외 연기금의 경우 국외주식, 국내외 채권, 국내외 부동산 등 다양한 투자 유형을 고려한다. 2012년 말 현재 국민연금은 주식 27%, 채권 65%, 대체투자 8% 비율로 자산을 구성하고 있다. 주식 비중을 높이는 게 세계적 추세지만 안정성을 우려하는 이들은 이에 반대한다. 그러나 수익성과 안정성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것이 바로 SRI 방식으로, 해외 주요 연기금들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넷째, 국민연금공단은 ESG 이슈와 연동해 의결권 행사를 강화하려고 하지만 그 가이드가 구체적이지 못해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 L 컨설턴트는 “캘퍼스의 경우 ‘투자 대상 기업의 온실가스를 공개해야 한다는 주주 의견이 나올 경우 찬성표를 던진다’ 같은 구체적인 가이드가 있다”며 국민연금도 의결권 행사에 대한 구체적 가이드를 개발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런 문제점을 해소하려고 국민연금공단은 3월 책임투자팀을 신설했다. 현재는 팀장을 포함해 3~4명으로 구성됐다. 국민연금공단 관계자는 “아직까지 활동 방향이나 원칙을 정하지 못하고 있으며, 해외 사례 등을 열심히 파악하고 있다”고 말했다.

    권순원 숙명여대 경영학부 교수는 ‘국민연금과 사회책임투자’라는 글에서 “해외 연기금들이 장기투자, ESG 스크리닝, 주주권 활용 등의 측면에서 역동적으로 변화함에도 우리나라에선 기금의 사회책임투자 전략에 관한 정책, 지표 및 피드백이 적극적으로 논의되거나 개발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기금 운용 시 ESG 요소 반영을 의무화하는 국민연금법 일부 개정안을 법제화한다면 이런 문제점을 개선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김영호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 이사장은 “연기금 같은 대규모 투자자가 어떤 구실을 하느냐에 따라 세상은 다른 모습을 할 수 있다. 지속가능한 투자, 지속가능한 기업, 지속가능한 사회는 결국 하나의 얼굴”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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