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96

2013.07.15

등명(燈明)

  • 이문재

    입력2013-07-12 17: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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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명(燈明)
    등명 가서 등명 낙가사 가서

    심지 하나로 남고 싶었다

    심지의 힘으로 맑아져

    작은 등명이 되고 싶었다

    어떤 지극함이 찾지 않아



    하얀 심지로 오래 있어도 좋았다

    등명리에 밤이 오고

    바다의 천장에 내걸린 수백 촉 집어등

    불빛에 가려진 깊은 밤 그늘이어도 좋았다

    질문을 만들지 못해 다 미쳐가는

    어떤 간절함이 찾아왔다가

    등명을 핑계 대며 발길질을 해도 좋았다

    심지 하나로 꼿꼿해지면서

    알았다 불이 붙는 순간

    죽음도 함께 시작된다는 것을

    좋았다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 그리워

    죽을 지경이라는 어떤 그리움이 찾아와

    오래된 심지에 불을 당길 터

    아주 오래전이었다. 길을 가다 마을 이름이 좋아서 그냥 들어가보곤 했다. 그 마을에 가면 그간 고여 있던 시가 흘러넘치기도 했다. ‘등명’도 그런 곳이었나 보다. 동네 이름을 부르면 마음이 환하게 밝아진다. 우리 동네에 ‘아멘 기도원’이란 버스정류장이 있다. 새로 난 도로 뒤쪽에 폐선이 된 ‘아멘 기도원’이 요즘 나의 등명이다. 거기에서 서성거리며 이 시를 떠올렸다. ─ 원재훈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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