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95

2013.07.08

섹스 혐오증 혹은 섹스 중독 후유증

근친 성추행 상처

  • 마야 최 심리상담가 juspeace3000@naver.com

    입력2013-07-08 11: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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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은색 양복을 입은 사내 둘이 그의 팔을 양쪽에서 잡고 상담실을 나갔다. 휘적거리던 그의 뒷모습이 닫힌 문 위로 한동안 잔상을 남겼다.

    김진(27·가명). 모 재벌가의 2남3녀 중 2남으로 세 번째 자살시도를 했고, 이후 정신병원에 감금돼 1년 3개월간 치료받은 뒤 6개월 전 나왔다. 상담의뢰서에 딸려온 의사진단서엔 ‘Major Depressive Disorder(단극성 기분장애·우울증), OCD(강박증)로 약물치료 병행 요함’이라고 써 있었다. 꽤 유명한 심리상담 전문가가 맡은 환자였는데, 그분이 긴급히 서너 달 외국에 나가 있어야 해 내게 이관된 경우였다. 김씨의 수행비서는 김씨가 정신병원에서 감금 치료를 받기 전 있었던 기행들을 무표정한 얼굴로 하나하나 늘어놓았다. 마약섹스파티, 과속질주, 폭력, 성추행, 중독에 가까운 섹스행각….

    첫 상담에서 김씨는 창백한 얼굴에 몽롱한 눈동자, 멍한 표정이어서 대화가 불가능했다. 향정신성 약물은 무기력, 몽롱함, 집중장애 같은 부작용을 낳을뿐더러, 우울증 처방제인 SSRIs에 속하는 프로작, 팍실, 루복스 등은 치료제가 아닌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제다. 세 번째 상담에서 김씨의 정신과 주치의와 협의해 약물복용을 중단했다. 7번의 상담으로 알아낸 사실은 극도로 불안할 때마다 섹스를 해야 불안이 해소된다는 점, 퇴원한 후부터는 섹스 대신 사람 크기의 인형을 계속 쓰다듬는 것으로 반복적 행동이 대치됐다는 점 정도였다.

    김씨는 보디가드들과 수행비서의 철저한 감독, 감시 하에서 생활했다. 김씨는 집안의 골칫거리이자 숨기고 싶은 자식이었다. 상담 과정에 부모형제의 참여는 기대할 수조차 없었다. 치유가 지난할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했다. 어쩌면 김씨 부모에겐 김씨의 치유가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저 문제만 일으키지 않는다면 김씨가 그렇게 살아도 무방하다 생각하는지도 몰랐다.

    온전한 수용이나 사랑 경험 없어



    김씨는 아주 오랫동안 방기됐고 온전한 수용이나 사랑을 경험해보지 못했다. 그는 나의 관심을 의심했고, 언제든 자신이 버려질 것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나의 첫 번째 목표는 김씨로 하여금 내가 김씨를 버리지 않으리라는 점을 신뢰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김씨 내면의 작은 아이는 따뜻한 누군가의 손을 한 번도 잡아본 적이 없어 외롭고 불안했다. 내가 내미는 손을 잡고 싶어 하면서도 한편으론 내가 김씨를 버릴 것이고, 그 때문에 상처를 받으리라고 생각해 내가 좋아질 것 같은 자신의 감정을 증오했다. 그런 복합적 정동(情動)으로 김씨와 나 사이의 심리적 거리는 좁혀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김씨가 안쓰럽고 애틋하면서도, 한편으론 그의 행동에 짜증스러움과 분노와 증오를 느꼈다.

    별다른 진전도 없이 상담은 중반으로 넘어갔다. 김씨가 치유된다는 확신이 점점 옅어졌다. 그런 착잡한 심정이 들던 날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어머니에게 먼저 전화를 걸지 않는 성격이지만 그날따라 뭔가에 끌린 듯했다.

    “엄마, 저예요. 식사는 하셨어요? 네, 저도 먹었어요. 좀 있으면 상담하는데 시간이 좀 남아서 그냥 전화드린 거예요. 사실은….”

    어머니 목소리를 듣는 순간 의도하지 않았지만 김씨 이야기를 털어놓고 말았다.

    “그 아이, 내게 데려오렴. 따뜻한 밥 먹이고, 시장에 데려가고, 자장가도 불러주고…. 한 일주일만 데리고 있으면 다 낫는다. 우리 딸을 힘들게 해서 밉기도 하지만, 그 아이 잘못이 아니니, 속 끓이지 말고 엄마에게 데려와. 상담비 달라는 말 안 할 테니.”

    나는 말도 안 된다며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러나 내담자의 치유에 도움이 된다면 말이 안 되는 것이 어디 있겠는가. 그날 상담을 온 김씨를 데리고 다짜고짜 시장으로 갔다. 시장 골목을 느긋하게 걷다 허름한 국밥집에 들어가 4000원짜리 국밥 한 그릇을 시켰다. 김씨는 그런 곳은 처음인지 두리번거렸고, 나는 그가 숟가락을 들 때마다 김치를 올려줬다. 맛이 없는 듯 얼굴을 찡그렸으나 김씨는 국밥 한 그릇을 다 비웠다. 시장에서 파는 싸구려 야구모자를 사서 머리에 씌어줬고, 아이스크림을 사서 건넸다. 그가 아이스크림을 핥고 있을 때 아이스크림을 쿡 눌러 그의 입과 코가 아이스크림 범벅이 되게 만들고는 둘이 배를 잡고 웃기도 했다. 보디가드 2명은 우리보다 5m 뒤쯤에서 따라왔고, 우리는 어느새 손을 잡고 걷고 있었다.

    김씨는 그 뒤로 마치 엄마에게 일러바치는 아이처럼 일주일 동안 있었던 일을 손짓발짓을 해가며 말하고 수줍게 웃었다. 수영도 시작했고 과제로 내준 영화도 꼬박꼬박 봤다. 김씨의 우울증이 눈에 띄게 나아졌다. 그러나 횟수가 줄긴 했지만 불안증은 여전히 불한당처럼 급습했고, 그때마다 김씨는 인형을 쓰다듬어야 했다.

    상담 한 섹션(10회)을 더 연장하고 또 중반이 지났을 즈음, 부모와의 화해에 대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그러자 김씨의 동공이 갑자기 초점을 잃고 흔들리면서 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공황에 가까운 불안발작이었다. 김씨는 초점 없는 눈을 두리번거리며 인형을 찾는 듯했다. 상담실엔 아이들 치료에 쓰는 작은 인형이 있을 뿐이었다. 자꾸 마른 입맛을 다시고 손을 어쩌지 못해 신경질적으로 쥐락펴락하는 김씨 때문에 나도 당황했다.

    김씨의 증세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심해졌고 나도 점점 초조해졌다. 이런 상황에 어머니라면 어떻게 했을까. 그를 소파로 데려가 앉힌 뒤 그 옆에 나란히 앉았다. 부들부들 떠는 김씨를 끌어다 품에 안고는 등을 가만가만 쓸어줬다. 김씨가 내 등 쪽으로 팔을 돌려 내 등을 거칠게 쓰다듬기 시작했다. 덜컥 겁이 났지만 속으로 나는 김씨의 엄마라고 되뇌며 두려움을 누르고 토닥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부모와 화해, 격렬한 반응 왜?

    시간이 지나자 내 등을 쓰다듬던 김씨 손에서 힘이 빠지는 것이 느껴졌다. 20분쯤 지났을 때 김씨는 손을 툭 떨어뜨리며 내 품안에서 흐느껴 울었다. 그러곤 자분자분 이야기를 시작했다. 남편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김씨 어머니는 밤마다 김씨 방에 들어와 김씨의 몸을 더듬고 만졌다. 대여섯 살 이후부터 고등학생이 된 후 김씨가 완강히 거부할 때까지 김씨는 자기 엄마에게 성추행당한 것이다. 부모와의 화해 이야기가 나왔을 때 그토록 격렬한 반응을 보인 이유다.

    직접적인 성관계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때 경험은 김씨의 여성관과 성생활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김씨가 불안해지면 강박적으로 섹스를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김씨와 유사한 경험을 겪은 자식들은 섹스 혐오나 중독 양극단으로 가기 쉽다. 김씨가 부모와 함께 있어 좋을 게 하나도 없었다. 김씨에게 어머니를 용서하라는 말은 잔인한 것이었다. 상담이 종결되기도 전 김씨에게 영국 수도원으로 떠날 것을 강력히 권고했다. 김씨가 떠나고 석 달쯤 흘렀을 때 편지 한 통이 도착했다.

    “선생님, 저는 하나님께 봉헌하는 삶을 살기로 했습니다. 제 증세는 모두 사라졌어요. 저는 여기서 행복합니다. 수도사님들이 얼마나 재미있고 좋은 분들인지, 선생님은 상상조차 못하실 거예요. 선생님은 하나님이 보내주신 분입니다. 평생 잊지 못할 거예요. 고맙습니다.”

    어릴 때 근친에게 당한 성적 충격은 한 사람의 인생을 극적으로 바꿔놓기도 한다. 김씨가 행복하다고 해서 미소 지었으나, 수도사가 되기로 한 그의 결정엔 마음이 아팠다. 동봉한 사진 속에선 치렁치렁한 수도사복을 입은 김씨가 한 영국 수도사와 어깨동무를 한 채 환하게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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