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94

2013.07.01

집단소송제는 글로벌 스탠더드

“기업에 엄청난 부담” 재계 주장은 엄살…가해자와 피해자 힘의 균형 맞추기 필요

  • 이지수 좋은기업지배구조연구소 연구위원·미국변호사 jisoolee@cgcg.or.kr

    입력2013-07-01 10: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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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가 미국에 살 때, 어느 날 편지 한 통이 배달됐다. 내용은 필자가 가입한 이동전화 통신사업자가 소비자들에게 부당한 피해를 입혔으며, 이에 따라 소비자단체가 소송을 제기해 승소했으므로 그 승소금액을 보낸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편지에 80달러짜리 수표가 동봉돼 그 돈으로 친구들과 외식을 했던 기억이 난다. 미국에 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생긴 일이라 참 재미있는 나라도 있구나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버렸다. 그것이 집단소송이었음을 안 것은 그 후의 일이다.

    오늘날과 같이 산업화가 발달한 상황에서는 환경오염 또는 잘못된 제품 등으로 ‘집단적 피해자’가 나날이 증가하게 된다. 그러나 개인 처지에서는 피해금액이 소액이라 개별소송을 제기하기엔 경제적 실익이 없다고 판단해 법률적 구제청구를 쉽게 포기한다. 또한 사업자나 가해자에 비해 소비자나 피해자는 질적, 양적으로 정보가 부족한 데다 교섭력도 떨어져 스스로 사안을 명백히 하고 손해를 보상받는 일이 사실상 어렵다. 따라서 변호사 등 전문가에게 도움을 받아야 하지만, 비용이 과다하다는 이유로 소송을 통한 피해구제 등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는 실정이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집단소송제도다.

    일반 절차법으로서 논의할 단계

    우리나라도 증권 관련 집단소송법을 제정한 지 8년이 흘렀지만 피해를 입은 다수의 소액주주를 위한 법적 구제수단으로 제구실을 하지 못한다는 지적을 받는다. 이는 도입 당시부터 남소(濫訴)로 인한 폐해를 지나치게 강조해 이를 방지하기 위한 장치를 너무 많이 뒀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증권 관련 집단소송법은 실패했다고 보는 것이 대체적인 의견이다.

    현재 국회를 비롯한 정치권에서는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공정거래법) 위반 행위와 관련한 집단소송제도 도입을 논의하고 있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가까운 시일 안에 소비자 집단소송뿐 아니라 환경 관련 집단소송에 대한 논의도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현 정부에서도 ‘공정거래법상의 집단소송제도 도입 및 증권 관련 집단소송제도의 개선’을 하나의 국정과제로 삼고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집단소송을 절차법적 문제로 접근하기보다 실체법적 문제로 접근하는 상황이 우세하다. 그러다 보니 통일성도 부족하고 법체계가 엉망이 돼간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집단소송제는 글로벌 스탠더드

    2011년 11월 30일 KT의 2세대(2G) 이동통신(PCS) 서비스 중단을 승인한 방송통신위원회의 결정에 대해 2G 가입자들이 집단소송을 제기했다. 최수진 변호사(오른쪽)가 2G 가입자 970여 명을 대리해 “KT의 PCS 사업폐지 승인을 취소하라”며 방송통신위원회를 상대로 서울 서초동 서울행정법원에 송장을 제출하고 있다.

    이제 우리나라도 개별 실체법 위주의 집단소송에 대한 논의보다 일반 절차법으로서의 집단소송을 논의해야 할 단계에 이르렀다. 주요 국가의 입법 사례를 살펴보더라도 우리나라처럼 개별 실체법적으로 접근하는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다. 집단소송이 발달한 미국이나 영국 등에서는 집단소송을 일반 소송법으로 규율함으로써 통일성과 정합성을 기한다. 일본에서도 최근 소비자 집단소송법에 대해 입법예고를 한 상태이고 향후 일반 소송법으로 논의를 진행, 발전시킬 것으로 예상된다. 즉, 이제 일반 절차법으로서의 집단소송제도가 글로벌 스탠더드라는 것에 이견을 달 사람은 별로 없다.

    우리나라에서 집단소송을 얘기할 때마다 재계는 늘 볼멘소리를 한다. 언제나 똑같은 불평을 늘어놓는다. 가뜩이나 경제가 어려운데 집단소송제도마저 도입한다면 기업은 더 어려운 상황에 처할 수 있고 국민경제는 도탄에 빠질 수 있다는 협박 아닌 협박을 한다. 과연 사실일까. 우리나라 대표 기업이라고 할 수 있는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는 이미 매출의 상당 부분을 해외에서 올린다. 이 얘기는 곧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의 제품을 구매한 미국, 영국 소비자는 그 피해자가 다수일 경우 언제든 집단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기업의 어려움을 늘 자기 일처럼 보듬어주는 착한 우리나라 국민은 같은 피해를 입더라도 이를 집단적 방법으로 구제받을 수 없다. 우리나라 기업이라고 키우고 그들의 상품을 수십 년 넘게 써줬는데 너무한 것 아닌가.

    기업 추가 부담 없어

    얼마 전 현대자동차가 미국 시장에서 자동차 연비를 과장 광고했다는 사실이 보도된 적 있다. 아니나 다를까, 며칠 후 미국 소비자단체들이 현대자동차를 상대로 집단소송을 준비한다는 기사가 났다. 그리고 현대자동차 측이 발 빠르게 피해자 집단과 합의하려고 노력한다는 후속 기사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왜 이와 같은 움직임이 없을까. 결국 재계 주장에 따르면 기업이 어려우니 좀 참아달라는 것이다. 외국 소비자들에게는 합의며 보상이며 다 해주면서 왜 우리나라 사람한테는 참으라고만 할까.

    아이폰을 제작해 세계적으로 히트한 애플이 우리나라 소비자를 우습게 알고 거만한 자세로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은 잘 알려진 얘기다. 이 사태를 보고 필자는 과연 우리나라에서 제대로 된 집단소송이 가능했다면 애플이 우리나라 소비자를 이렇게 우습게 볼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소비자들이 뭉치면 그 파괴력이 엄청날 수 있다는 사실을 무척 잘 아는 애플이기 때문이다.

    집단소송제도를 도입한다 해도 재계가 주장하는 바와 같이 기업에 엄청난 부담을 ‘추가로’ 주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집단소송제도가 ‘새로운’ 청구권을 인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기존에 인정되던 청구권을 원고들이 묶어서 행사할 수 있게 편의를 제공해주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기업에게 추가 부담을 주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이미 피해가 발생한 상황에서 기업에게 부담이 된다는 이유로 저비용으로 피해 보전을 할 수 있는 통로를 막는 것은 소송법의 크나큰 맹점일 뿐 아니라 글로벌 스탠더드에도 맞지 않는다.

    이제 ‘국민기업’ 운운하며 국민에게만 참으라고 강요하는 시대는 지났다.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 힘의 균형을 맞추는 것은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요구가 됐다. 심하게 한쪽으로 기울어진 우리나라의 갑을(甲乙) 관계를 바로잡기 위해서라도 하루빨리 일반적인 집단소송제도를 도입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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