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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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그러진 영웅’들은 스테로이드를 좋아해

  • 김원곤 서울대병원 흉부외과 교수 wongon@plaza.snu.ac.kr

    입력2013-05-27 10: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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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7년 이문열이 발표한 중편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그해 이상문학상을 수상하는 등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으며 92년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소설의 배경은 1950년대 말로, 한병태가 서울에서 작은 시골초등학교로 전학 오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런데 그 학교에는 학생들이 절대 복종하는 엄석대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좋은 체격과 우수한 성적에 선생님의 신임까지 받았다. 한병태는 그에게 한동안 저항해봤으나 결국 굴복하고 그의 보호를 받는 쪽을 선택한다.

    그러나 아이들이 6학년으로 올라가고 새로 온 선생님이 담임을 맡으면서 상황이 급변한다. 평소 엄석대를 석연치 않아 하던 선생님이 마침내 그의 놀랍도록 우수한 성적이 시험 부정에 의한 것임을 알아낸 것이다. 이후 엄석대는 몰락의 길을 걷게 되고, 어느 날 어디론가 사라진다.

    ‘한국현대문학대사전’은 이 작품이 엄석대의 몰락을 통해 절대권력의 허구성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동시에 한병태와 다른 학생들의 모습을 통해 부조리한 현실에 순응하는 소시민적 근성을 지적한 것이라고 해설해놓았다.

    ‘약쟁이’와 보디빌더의 질투심



    이만해서 소설 이야기는 그만하고 화제를 바꿔보자. 전문 보디빌더나 보디빌딩을 열렬히 사랑하는 아마추어 운동가가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이 하나 있다. 바로 ‘약쟁이’라는 말인데, 원래 마약 등을 복용하는 사람을 뜻하는 이 말은 스테로이드 같은 불법 약물을 상습적으로 복용하면서 몸을 키우는 사람을 빈정댈 때 사용된다.

    건강을 위해서든 멋있는 체격을 한 번 뽐내 보겠다는 목적에서든, 많은 것을 희생해가며 힘든 운동을 지속하는 사람 처지에서는 졸지에 마약 복용자와 같은 ‘약쟁이’ 반열에 오르는 일을 결코 용납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보디빌딩 국외자의 입에서 끊임없이 이 말이 오르내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단순히 멋진 몸을 시기하거나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질투심에서 만들어낸 근거 없는 말일까. 아니면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라는 속담처럼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는 말일까.

    답은 아쉽게도 후자 쪽에 가깝다. 잊을 만하면 기사화되는 보디빌더의 스테로이드 복용 보도와 징계 조치라는 악순환이 반복되면서 보디빌딩은 한때 대한체육회로부터 문제 스포츠로 지목될 정도였다. 몇 년 전에는 ‘유명 보디빌더들, 스테로이드 밀수 적발’이라는 참으로 민망한 기사까지 언론을 장식했다. 그러다 보니 전문 보디빌더 세계에서는 마치 오래전 상영된 리어나도 디캐프리오 주연의 영화 ‘캐치 미 이프 유 캔’의 제목처럼 적발될 때까지 약을 복용한다는 유언비어성 소문까지 횡행했다.

    그런가 하면 아마추어 선수 사이에서도 단기간에 눈에 띄게 몸이 좋아진 사람을 존경하고 부러워하는 대신 “틀림없이 그사이에 약을 복용했을 거야”라는 뒷담화로 애써 무시하려는 풍조까지 생겨났다. 또 일부는 마치 엄석대에 대한 동료 학생들의 추앙처럼, 스테로이드 복용자를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목적을 이루려는 멋있는 사람으로 떠받들기도 한다.

    건전한 보디빌더 애호가로선 참으로 억울한 이런 상황에서 무절제한 비난을 방어하기 위한 수단으로 가장 많이 동원되는 말이 하나 있다. 바로 “일반인은 불법 약물과 정당한 헬스 보충제를 구별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실 그렇다. 여기서 보충제란 상당한 과학적 근거를 가지고 몸을 만드는 데 도움을 주는 각종 영양 물질이나 대용식을 일컫는 말로, 당연히 합법적으로 판매하는 제품이다. 보충제는 보디빌딩이라는 운동에 뛰어든 사람치고 한 번 이상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세계적으로 보편화돼 있다. 그만큼 보충제 애용자 처지에선 보충제를 스테로이드 같은 약물과 동일시하는 것이 정말 싫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여기서 진짜 문제는 보충제를 스테로이드 복용의 방패막이로 사용하거나, 심지어 스테로이드로 만든 몸을 보충제 판매라는 상업적 목적으로 이용하는 사람이 있다는 점이다. 후자의 경우 그 이유는 간단하다. 보충제 시장이 상업적으로 엄청난 규모를 가진 이른바 황금알을 낳는 잠재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만큼 보충제 회사들 간 경쟁도 심해져 뛰어난 몸을 가진 모델을 찾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바로 이때 음성적으로 스테로이드를 사용해 몸을 키운 보디빌더가 첫 번째 모델이 된다.

    먹으면 힘 불끈 보충제의 유혹

    그러면 여기서 일견 전혀 관계가 없어 보이는 처음의 소설 이야기로 돌아가, 스테로이드와 보충제에 맞춰 설정을 한 번 바꿔보자.

    한갑태는 서울에서 작은 시골고등학교로 전학을 온다. 그런데 그 학교에는 뛰어난 성적으로 학생들의 부러움과 교사의 깊은 신임까지 받는 엄스테라는 학생이 있다. 그는 자신의 성과를 매일 학교에 들고 와서 먹는 간식 덕분으로 돌렸는데, 그 간식은 영양 성분이나 과학적 근거에서 전혀 하자가 없는 제품이었다. 그 간식을 파는 가게의 매상이 오른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얼마 후 이웃 반에 미국 학생인 로이드가 전학을 왔다. 그는 오자마자 첫 시험부터 놀라운 성적을 보였고, 그 비법으로 역시 자신이 먹는 새로운 간식을 꼽았다. 어찌된 일인지 학생들은 점점 로이드의 간식을 더 선호했다.

    그러나 아이들이 고3으로 올라가고 새로운 선생님이 담임을 맡으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평소 엄스테와 로이드를 석연치 않아 하던 선생님이 마침내 그들의 놀랍도록 우수한 성적이 해킹으로 시험 문제를 몰래 빼돌려 저지른 시험 부정에 의한 것임을 알아낸 것이다. 더구나 로이드의 경우 이렇게 빼돌린 시험 문제를 자기가 선전하는 간식을 사는 학생들에게 몰래 전달하기까지 해 학생들을 끌어들였다.

    스테로이드와 보충제의 관계도 기본적으로 이와 크게 다를 바 없다. 엄스테와 로이드가 먹던 간식이 좋은 성분을 많이 함유하고 또 실제로 그들이 우수한 성적을 보인 것도 사실이지만, 정작 그들이 성적을 올리려고 결정적으로 사용한 방법은 불법적인 것이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그들이 먹는 간식의 진정한 효과를 파악하기가 오히려 어려웠던 것이다.

    이와 비슷한 이유로 보충제 또한 그 효능을 정확히 평가하기가 쉽지 않다. 왜냐하면 모든 과학적 결론은 반드시 무작위로 추출된, 통계학적으로 동일한 비교 집단을 대상으로 이뤄져야 하지만, 스테로이드 없이 보충제만 사용한 집단과 그렇지 않은 집단과의 객관적인 비교가 현실적으로 쉽지 않기 때문이다. 심지어 보충제 가운데는 간식에 시험 문제까지 제공해주던 로이드의 방법처럼 일반 보충제 성분에 몰래 스테로이드를 섞어 만든 제품까지 있을 정도다.

    결론적으로, 어떤 이유에서든 보충제의 그늘 속에 숨어 스테로이드를 사용하는 사람이나 보충제를 상업적으로 악용하는 사람을 인정해서는 안 된다. 그들이야말로 정당한 보충제의 잠재적 가치를 흐려 놓는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엄스테’일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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