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월 23일 이대홍(82·사진) 할아버지는 동료들과 강원 춘천시에 사는 한 국군포로의 병문안을 다녀온 참이었다. ㈔6·25국군포로가족회에 따르면 이 할아버지는 탄광에서 일하다 2006년 10월 혈혈단신 귀환했다(국방부에 따르면 탄광에서 일한 국군포로의 마지막 탈북은 2010년 이뤄졌다).
현재 기댈 수 있는 건 돈뿐이다. 그는 귀국 당시 정부보상금 4억8000만 원(보수 소급액 3억1000만 원, 주거지원금 1억7000만 원)을 받았다. 거기에서 탈북 브로커에게 6000만 원을 줬으며, 자신의 전사통지서를 받고 제사를 지내준 조카에게 성의 표시를 한 뒤 남은 돈과 매달 나오는 군인연금 120만 원으로 생활한다. 국군포로 대부분이 보상금을 가족에게 맡겼다가 떼인 것에 비하면 상황이 양호한 편이다.
아오지탄광에서 53년
그의 둥지는 서울 구로구 조카네 집. 일주일에 사흘은 쉼터에 들르고 나머지 나흘은 6·25참전유공자회, 교회 노인대학에 간다. 탈북 직후 가족이 있는 경남 마산에서 살았지만 친구들과 여생을 보내고 싶어 상경했다. 자신이 북으로 간 뒤 태어난 가족과 정이 쌓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국군포로라고 하면 경계부터 하는 사람들의 시선이 불편했다.
경남 진주가 고향인 그는 소학교를 마친 뒤 부산에서 목수 일을 했다. 그러다 영장이 나와 1952년 입대해 제주도에서 96일 동안 훈련받았고, 그해 9월 전선에 배치됐다. 정전을 한 달 앞둔 53년 6월 28일 백마고지(강원 철원 부근)에서 소대원들이 적군 총에 맞아 사망하고 그를 포함한 3명은 포로가 됐다.
처음에는 강원 이천 중공군 부대에서 정신교육을 받았다. 이후 9월 평안남도 강동수용소에 수용됐고, 북한군이 “북에 남을지 남으로 갈지 말하라”고 묻기에 “가족이 있는 고향으로 가고 싶다”고 답했다. 하지만 기차는 북으로 향했고, 그때부터 함경북도 경흥군 아오지탄광에서 53년 동안 살았다. 함께 잡혀온 국군포로는 600여 명에 달했다.
삶은 팍팍했다. 내무성 건설대란 군대에 배치돼 3년 동안 ‘반 교육, 반 노동’을 했다. 한 중대가 사상교육을 받으면, 다른 중대는 탄광에서 일하는 식이었다. 탄광에서 3교대로 일하는 것이 만만치 않았지만 탈출은 시도하지 않았다. 탈주자들이 잡혀오는 걸 보고 묵묵히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고 여겼다. 군복 입은 국군포로가 도망가 잡히지 않는 건 불가능했다.
이후 1956년 ‘내각결정 43호’에 따라 부대가 해산했다. 생활은 조금 자유로워졌다. 부대가 아닌 합숙소에 있는 각자 방에서 생활했기 때문이다. 정부로부터 정착금도 받아 세간 몇 가지도 샀다. 시간이 갈수록 ‘남한에 돌아가기는 어렵다’는 판단이 들어 59년 결혼했다. 그의 아내는 아버지가 월남해 성분이 좋지 않아 그간 짝을 찾지 못한 상태. 하지만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아내가 아들을 낳고 1년 만에 결핵으로 사망한 것이다. 탄광에 아기를 데리고 다니면서 키워봤지만 역부족이었고, 결국 4개월 만에 재혼했다.
두 아내, 외아들 북에 묻어

‘좋은 사람들의 쉼터’에 걸린 국군포로 사진.
전처소생만 고이 키워준 두 번째 아내도 1998년 영양실조로 사망했다. 그는 만 60세 때 탄광에서 정년퇴직한 뒤 청년합숙소 경비로 일하며 끼니를 해결했고, 아들도 탄광에서 밥을 벌어먹었다. 하지만 아내는 아들이 부양가족 몫으로 받아온 식량 300g만 먹고선 연명할 수 없었다. 끝내 그는 아오지탄광에서 살다 탈북한 사람의 소개로 브로커를 만났고 주저하지 않고 탈북했다.
그가 남한에 돌아온 뒤 가장 먼저 한 일은 복무한 군대사단에 가서 전역신고를 한 것이다. 하지만 꿈에 그리던 남한에 왔건만 전혀 기쁘지 않다. 그는 국군포로 문제에 무관심한 정부에 묻고 싶다. “남으로 돌아오기 위한 비용(브로커)을 정부가 아닌 국군포로에게 부담 지우는 게 마땅한 일인가.” “만약 당신네 아버지나 형이 국군포로로 북에 억류됐다면 이렇게 무관심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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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동아 889호 (p24~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