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87

2013.05.13

씨·배다른 막장 패밀리, 그래도 우리는 한솥밥

송해성 감독의 ‘고령화가족’

  • 이형석 헤럴드경제 영화전문기자 suk@heraldm.com

    입력2013-05-13 11:2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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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씨·배다른 막장 패밀리, 그래도 우리는 한솥밥
    한국 영화에는 ‘콩가루 가족영화’ 계보가 있다. 원조격이라 할 만한 작품이 2003년 임상수 감독의 ‘바람난 가족’이다. 6ㆍ25전쟁 때 헤어진 가족을 잊지 못해 평생 술에 의지하다 간암 말기 선고를 받은 고령 아버지, 남편과 살가운 애정 없이 살다 초등학교 동창과 늦바람난 어머니, 운동권출신 인권변호사지만 아내 몰래 불륜을 저지르는 아들, 이웃집 고교생을 유혹해 맞바람을 피우는 며느리가 ‘갈 데까지 간’ 가족 구성원이다. 가족과 가부장제의 이면에 숨겨진 한국 사회의 위선과 욕망을 냉소하는 문제작이었다.

    2006년엔 김태용 감독이 ‘가족의 탄생’을 통해 기괴한 가족을 보여줬다. 이 영화에서 20대 남자가 어머니뻘인 50대 연상녀와 연애하고, 어엿한 유부남과 살림을 차린 헤픈 어머니와 그의 딸이 티격태격하며 살아간다. 그래서 결국 새파란 시누이와 연로한 올케, 올케가 전남편에게서 얻은 딸이 마치 ‘3대 가족’처럼 동거하고, 씨 다른 누이가 키운 청년이 ‘여인천하’ 집 막내의 남자친구 자격으로 인사를 간다. 이 영화에서 아버지는 부재중이며 남은 가족은 배다르거나, 씨가 다르거나, 아예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다.

    2007년 개봉한 정윤철 감독의 ‘좋지 아니한가’는 피로 맺어졌지만 남다른 비밀과 결격 사유를 가진 가족이 주인공이다. 거의 낙오자 군단 같은 가족 구성원 속에서 목소리를 잃어버린 채 살아가던 ‘고개 숙인 남편이자 허수아비 아빠’가 인생 최대의 섹스 스캔들 주인공이 되면서 벌어지는 일을 다뤘다.

    천명관 소설 원작… 콩가루 가족 리얼하게

    이들 ‘콩가루 가족영화’는 현대인의 욕망과 도덕을 가족이라는 낡은 틀로 묶을 때 일어나는 정신분열을 그리거나(‘바람난 가족’), 가족 서로에게 필요한 것은 ‘관심’이 아니라 ‘무덤덤함’이며(‘좋지 아니한가’), 그래서 가족이란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혈연공동체가 아닌 그저 밥상과 지붕을 공유하는 ‘특별한 동거인’(‘가족의 탄생’)일 뿐이라고 말한다.



    작가 천명관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고령화가족’은 한국 ‘콩가루 가족영화’의 적통을 잇는 작품이다. 일단 구성원을 보자. 장남인 44세 한모(윤제문 분). 과거 건달, 현직 백수로 해가 중천에 떠야 무릎 나온 트레이닝 바지춤에 손을 넣고 긁적이며 일어나는 한심한 인생이다. 홀어머니집에 얹혀산다.

    둘째 인모(박해일 분). 집안 유일의 대졸자로 한때 가족의 자랑거리였으나 데뷔작이 쫄딱 망한 뒤로 오갈 데 없는 영화감독이다. 바람난 아내에게 이혼 요구를 받으며, 결국 자취방 월세까지 밀려 어머니와 형이 사는 집으로 들어온다. 마지막 동거인으로 합류한 것은 35세 막내여동생 미연(공효진 분)이다. ‘눈탱이가 밤탱이’가 돼 여중생 딸 민경(진지희 분)을 앞세우고 어머니집을 찾은 미연은 두 번째 남편과도 불화 끝에 헤어지고, 새 남자친구와 세 번째 결혼을 계획 중이다. 어머니(윤여정 분)는 졸지에 과년한 자식들과 손녀까지 떠맡게 됐지만, 매일 저녁 삼겹살을 구우며 가족을 거둬 먹인다.

    실패한 인생들이 다시 돌아왔으니 집 안이 조용할 날이 없다. 어머니는 강박증처럼 매일 삼겹살을 사다 불판을 피우지만 정작 술자리 안주는 서로에 대한 비난과 경멸이다. 가족 사이에 오갈 수 있는 온갖 욕설과 조합 가능한 최악의 상황이 이어진다. 가방 끈 긴 둘째아들은 형한테 입만 열면 “야, 자” 하며 대놓고 무시한다. 막내여동생은 돈 좀 벌어온다고 두 오빠에게 걸핏하면 발길질이다. 형제가 한 동네의 같은 여자를 두고 ‘작업’을 걸고, 조카는 삼촌들에게 말끝마다 반말에 속어다. 큰오빠는 막내여동생에게 “너는 머리가 아니라 아랫도리가 문제”라고 걸고넘어지고, 막내여동생은 “오빠, 또 내 지갑에 손대면 죽여버린다”고 하는 지경까지 이르면, 정말 답 안 나오는 막장이라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그래도 매일 밥상머리에 모여 앉아 같은 찌개 냄비에 숟가락 담그며 지지고 볶던 중, ‘참을 수 없는 막장스러움’에 치를 떨던 민경이 가출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일대 소동이 벌어지면서 결국 이 콩가루 가족 구성원 각각의 출생 비밀이 밝혀진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형제 모두 씨 다르고 배다른 존재였으며, 이 모든 희비극의 기원은 어머니였던 것이다. 아울러 어머니가 매일 사들고 왔던 삼겹살의 특별한 미스터리도 풀린다. 서로의 비밀을 모두 알고 이제 갈 데까지 간 삼남매는 가출한 민경을 찾으려고 사력을 다한다. 과연 가출한 소녀는 무사히 가족 품에 안길까.

    “삼겹살 구워 놓았다… 어여 들어와라”

    씨·배다른 막장 패밀리, 그래도 우리는 한솥밥
    가족 구성원의 개성이 뚜렷하고, 배우들의 연기는 보는 맛이 좋다. 연기파라는 호칭이 무색지 않은 배우들이 과거 출연작에서 연기했던 캐릭터를 변주하는 모습을 보는 재미도 크다. ‘바람난 가족’에서 바람난 노모 역을 맡았던 윤여정이 모든 비밀을 잉태한 어머니로 등장해 관록의 연기를 보여주고, ‘괴물’에서 말만 많고 무능한 ‘지식인 청년’으로 분했던 박해일은 이 영화에서도 자존심만 오롯하고 현실에선 낙오자일 뿐인 인물을 구현한다. ‘가족의 탄생’에서 남성 편력 모친과 늘 티격태격하던 공효진 역시 다시 한 번 콩가루 가족의 일원이 됐고, 늘어진 배를 두드리며 소파에서 뒹구는 윤제문의 생활 밀착형 연기도 무릎을 치게 만든다. MBC TV 시트콤 ‘지붕 뚫고 하이킥’에서 ‘빵꾸똥꾸’를 외치던 꼬마 진지희는 어느새 ‘중2병’을 앓는 소녀가 됐다.

    ‘고령화가족’은 한마디로 콩가루 집안의 막장드라마라 해도 할 말은 없지만, 가족을 야만적 인습이라고 냉소하지 않고 그렇다고 인류의 영원한 안식처로 미화하지도 않으면서 새로운 공동체로 재구성한다. 가족 그 자체에 대한 섬세하고 유쾌하며 따뜻한 반성이자 긍정이다. 영화는 말한다.

    “집 나간 가족이여, 삼겹살 구워 놓았으니 얼른 들어와라. 과거는 묻지 않겠다. 우리는 가족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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