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84

2013.04.22

한자 쉽게 ‘속뜻 연구’ 20년 사비로 4권 펴낸 ‘사전 교수’

성균관대 중문학과 전광진 교수의 별난 ‘한자 인생’

  • 김진수 기자 jockey@donga.com

    입력2013-04-22 11: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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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자 쉽게 ‘속뜻 연구’ 20년 사비로 4권 펴낸 ‘사전 교수’
    “아빠, ‘=’를 왜 ‘등호(等號)’라고 해?”

    20년 전 어느 날 초등학교 4, 5학년이던 연년생 남매가 물었다. 아이들이 불쑥 던진 질문에 어안이 벙벙해진 아버지는 순간 뭐라 말을 못 했다. ‘아이들이 한자는 읽을 줄 아는데, 무슨 뜻인지는 모르는구나.’ 통상 한자어에 대한 딱딱하고 간략한 설명에 그치는 일반 국어사전의 한계를 절감한 아버지는 이내 결심했다. ‘모든 과목 교과서에 석류 열매처럼 송송 박힌 한자어의 속뜻을 풀이해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는 사전을 직접 만들고야 말리라.’

    3월에 신간 ‘선생님 한자책’ 펴내

    전광진(58) 성균관대 중어중문학과 교수(문과대학 학장·사진). 그가 ‘사전(辭典) 제작자’를 겸하기로 작심한 건 이처럼 우연한 계기에서 비롯됐다.

    “교과서에 실린 어려운 한자어들을 달달 외운다고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까요. 그건 기억이 아니라 단순한 암기(暗記)일 뿐이죠. 암기 효과는 오래 가지 않아요. 한자어를 구성하는 낱낱의 글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속뜻부터 제대로 알아야 단어를 쉽게 기억할 수 있고 공부하는 재미도 붙죠.”



    전 교수의 첫 결실은 10년 노력 끝에 2007년 펴낸 ‘우리말 한자어 속뜻사전’이다. 한자어 5만8000여 개의 속뜻을 담은 이 사전은 총 2100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 13쇄까지 찍어 5만 부나 팔린 스테디셀러다. 글자 그대로 우리말을 구성하는 한자(漢字)를 한 자 한 자 풀이함으로써 암기가 아닌 이해(理解), 즉 이유를 풀어 아는 학습 방식을 지향했다.

    용수철(龍鬚鐵)을 예로 들면, 국어사전은 그냥 ‘늘고 주는 탄력이 있는 나선형으로 된 쇠줄’이라고 정의하는데, 전 교수의 사전에선 용 룡(龍), 수염 수(鬚), 쇠 철(鐵)을 이은 한자어로 ‘용의 수염처럼 생긴 쇠줄’이라는 속뜻을 국어사전 정의와 함께 알려줘 훨씬 쉽게 기억할 수 있게 했다. 일반적으로 쓰는 의미 외에도 개별 한자의 뜻과 소리, 해당 한자어가 만들어진 배경에 대한 설명까지 곁들였으니 국어사전에 옥편을 더하고 ‘+α’의 학습 기능까지 갖춘 ‘멀티 사전’인 셈이다.

    사전 편찬에 대한 전 교수의 집념은 2008년 내놓은 ‘어린이 속뜻사전’과 2010년 출간한 ‘초중교과 속뜻학습 국어사전’으로도 이어졌다. 그가 한자어의 ‘속뜻’을 유독 강조하는 까닭은 뭘까.

    “학습의 최대 관건은 어휘력 확장입니다. 실제로 한자어 능력과 학력의 상관성을 연구해보니, 사용하는 어휘 수가 급격히 늘어나는 초등학교 3, 4학년 시기의 국어교육이 매우 중요하다는 결과가 나왔어요. 이때 어휘를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면 이후 언어교육은 소용이 없습니다. 하지만 일선 교육현장의 실상은 그렇지 못하죠. 어휘력은 곧 단어를 잘 활용할 수 있는 언어능력이고, 언어능력은 평생의 학습능력을 좌우합니다. 그러려면 어떤 한자어가 왜 그런 뜻을 갖게 됐는지를 먼저 알아야 해요. 그게 ‘속뜻 학습’이죠. 이런 방식으로 교육해 학생들이 자기주도 학습에 재미를 느끼면 학력이 신장되고 학교폭력이나 왕따, 자살 등도 훨씬 줄어들 겁니다.”

    2006년 6월 한자어 능력과 학력 신장의 함수관계를 연구한 논문 ‘한자의 특질을 통한 LBH 교수학습법 개발’을 발표한 전 교수는 자신이 말하는 ‘이해→사고→기억’으로 이어지는 3단계 학습방법에 ‘LBH(Learning By Hint)’라는 명칭을 붙였다. 여기서 ‘Hint’는 속뜻을 일컫는다. 한자라는 문자가 그 자체로서 이미 뜻을 암시하는 힌트를 지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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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자 교육에 대한 열정이 가득한 전 교수지만, 그런 그도 첫 ‘작품’인 ‘우리말 한자어 속뜻사전’을 펴낼 땐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교열 및 조판 비용에만 7000만~1억 원가량 들어 문을 두드린 출판사 6곳 모두가 퇴짜를 놨기 때문. 결국 그는 자신의 아파트를 담보로 1억5000만 원을 대출받아 직접 ‘LBH교육출판사’를 설립해 사전을 펴냈다. 출판사 대표도 그의 부인(56)이 맡고 있다.

    전 교수는 올해 3월 또 한 번 ‘대형사고’를 쳤다. 자신이 만든 사전의 독자층을 초중고교생에서 선생님으로까지 확장한 것. 바로 ‘선생님 한자책’ 출간이다. 총 1392쪽 분량의 이 사전은 한국어문회가 정한 한자능력 2~8급 배정 한자 2355자를 중심으로 풀이와 한자어를 예시해 누구라도 쉽게 이해하고 익힐 수 있게 한 것이 특징. 특히 첫 글자를 중심으로 한 전순(前順) 어휘와 끝 글자를 중심으로 한 역순(逆順) 어휘를 함께 열거해 해당 한자를 이용한 조어(造語)를 100% 파악할 수 있게 했으며, 한자에 상응하는 영어 단어도 제시해 영어 학습 효과도 노렸다.

    그가 ‘선생님 한자책’을 낸 이유는 ‘2009 개정 교육과정’에 따라 올해부터 초등학교 교사들이 ‘창의적 체험활동’ 시간에 의무적으로 한자를 가르쳐야 함에도 전국 10개 교육대학에서 한자를 필수과목으로 가르치지 않는 데다, 교원 임용시험에도 한자 과목이 없어 한자 지식이 부족한 교사들이 넘쳐나서다. 반응은 좋다. 1쇄본 2000부가 이미 동났다.

    “선생님부터 한자를 많이 알아야 독서 및 독해 지도가 가능해집니다. 그리고 독서가 독해로 발전하는 단계에서 가장 강력한 학습도구가 바로 사전입니다. ‘왕대밭에 왕대 난다’는 속담은 괜한 옛말이 아녜요.”

    그래서일까. ‘선생님 한자책’엔 ‘읽을 줄 알아도 속뜻을 모르면 알쏭달쏭 머리만 더 아파’로 시작하는 일명 ‘속뜻학습송(song)’도 수록됐다. 작사자는 물론 전 교수 본인이다.

    전 교수는 사전 출간 외에도 2008년부터 현재까지 초등학교 교사, 학생과 학부모를 대상으로 LBH 학습법 무료 특강을 재능기부 형식으로 해오고 있다. 100여 회 특강에 참석한 연인원은 1만여 명. 4월 21일엔 국립서울현충원에서 대한민국전몰군경유족회 자녀들에게 특강할 예정이다.

    전 교수의 원래 취미는 서예. 하지만 3년 전부터 드럼에 빠졌다. 그에게 ‘사전 제작자’를 겸업하게 한 아들(31)과 딸(30)이 결혼할 때 멋들어지게 축하 연주를 해주고 싶어서다.

    ‘나무는 뿌리가 깊어야 하고 사람은 생각이 깊어야 한다’는 지론으로 한자 교육에 천착해온 그에게 혹 아쉬운 점은 없을까.

    “내가 만든 사전들로 내 아이들을 직접 가르치지 못한 거랄까요? 걔들이 다 커서야 사전이 나왔거든. 이젠 훗날 손자손녀들이 태어나면 가르쳐야죠, 뭐(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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