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82

2013.04.08

사실상 개성공단 폐쇄 北, 심리적 충격 극대화 수 던져

물리적 피해 없이 부담은 고스란히 우리 측에 전가

  • 황일도 기자·국제정치학 박사 shamora@donga.com

    입력2013-04-08 10:4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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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상 개성공단 폐쇄 北, 심리적 충격 극대화 수 던져

    북한이 개성공단 통행제한 조치를 내린 4월 3일 오후 군용차량 한 대가 경기 파주시 남북출입사무소를 향해 가고 있다.

    “인민군은 그냥 군대가 아니다. 북한 경제, 특히 1차 산업의 핵심 구실을 맡는 노동력이기도 하다. 이제 곧 봄이다. 파종기가 오면 군 장병을 투입해야 때를 놓치지 않고 농사를 지을 수 있다. 전군에 걸쳐 현재와 같은 강도 높은 전투준비태세를 유지하기는 어렵다는 말이다. 한미 독수리연습이 끝나는 4월 말 이후에는 평양도 지금 같은 태도만 고집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본다. 그들 나름의 출구전략을 고민하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4월 2일 한 국책연구기관 관계자가 한 말이다. 평행선을 그으며 긴장을 높여가던 한반도 상황이 하염없이 장기화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었다. 이 무렵 당국자 사이에서는 5월 한미 정상회담을 계기로 정부가 난국을 타개할 남북·북미 협상 로드맵을 준비한다는 소식도 흘러나왔다. 대통령비서실 담당 비서관과 대선 과정에서 조언했던 전문가 그룹을 중심으로 핵 활동 중단과 평화협상 논의 시작, 인도적 대북지원을 잇는 그림을 그리고, 이를 4월 존 케리 미 국무부 장관의 방한과 5월 박근혜 대통령의 방미를 통해 미국과 조율한 뒤 평양과의 직접 접촉에 나설 것이라는 얼개였다.

    “제정신이 아니어야 안전해진다”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의 실행 플랜 차원에서 준비한다는 이 로드맵과 관련해 당국자들이 남긴 단서는 딱 한 가지였다. “북측이 그사이 일을 벌이지 않는다면….” 평양이 하루가 다르게 강도 높은 발언을 쏟아내기는 해도, 실제 물리적 도발로 이어지지만 않는다면 얼마든지 상황 반전이 가능하다는 시각이었다. 그러나 불길한 예감은 곧이어 4월 3일 개성공단 통행제한 조치로 현실이 돼 나타났다.

    ‘죽은 손(Dead Hand System).’ 냉전 기간 소련이 운용한 것으로 전해지는 미사일 발사 자동화 체계 이름이다. 방사능 피폭 여부와 충격파 등을 측정해 자국 영토가 핵 공격을 받았는지를 감지하는 이 무인 시스템은 피격 이후 정해진 시간이 지나면 따로 명령을 내리지 않아도 미국 주요 도시를 향해 전략핵을 탑재한 대륙간탄도탄(ICBM)을 발사하도록 설정됐다. 미국의 공격으로 모스크바가 완전히 초토화돼 최고결정권자나 군 수뇌부가 모두 궤멸한다 해도 워싱턴과 뉴욕 또한 핵 공격을 피할 수 없도록 만들겠다는 목적이었다.



    가장 눈여겨볼 대목은 소련이 이 시스템의 존재를 의도적으로 서방에 흘렸다는 점이다. 실제로 이 시스템을 작동하겠다는 의지보다는, 이를 통해 미국이 섣불리 소련을 공격할 수 없게 만들도록 과시하는 게 진짜 용도였던 셈이다. 아무리 효과적인 선제공격으로 소련을 궤멸해도 단 한 개의 수소폭탄만 살아남는다면 미국 역시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고 믿게 만듦으로써 애초에 공격 자체를 결심하지 못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상대가 나를 비이성적 존재라고 생각할수록 나는 더 안전해진다’는 핵 억제게임의 기본 공식은 이렇게 해서 완성됐다. 따라서 이 게임의 참가자들은 자신이 이성적이지 않다는 것을 끊임없이 과시해야 한다. 냉전 기간 소련은 핵무기 발사를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주체가 누구인지를 불분명하게 만들어 불안감을 높이는 전략을 취했고, 미국은 북미방공사령부(NORAD)의 자동화 시스템을 통해 핵을 맞으면 백악관 등이 따로 명령을 내리지 않아도 곧장 보복 핵 공격이 시작될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는 방식을 택했다. 쉽게 말해 ‘나는 제정신이 아니므로 얼마든지 같이 죽는 길을 갈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정신이 힘을 이긴다’는 믿음

    사실상 개성공단 폐쇄 北, 심리적 충격 극대화 수 던져

    박근혜 대통령(뒤편 가운데)이 4월 1일 서울 용산구 국방부 청사에서 열린 국방부와 국가보훈처의 업무보고에 앞서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 김관진 국방부 장관, 김장수 대통령국가안보실장, 주철기 대통령외교안보수석비서관(시계 방향) 등이 배석했다.

    3월 이후 한반도에서 벌어진 남북 사이의 ‘기 싸움’은 이러한 미·소 간 ‘비합리성 과시 전략’을 고스란히 차용한 것에 가깝다. 먼저 ‘워싱턴 핵 불바다’와 ‘전쟁상태 돌입’이라는 초강경 발언을 통해 평양은 경험이 없는 젊은 지도자 김정은이 과연 합리적인 판단을 하는 것일까 의심스럽게 만들어 불안을 증폭하는 효과를 노렸다. 반대로 김관진 국방부 장관이 전방부대를 시찰하면서 했던 “(북한이 도발하면) 쏠까요 말까요 묻지 말고 선 조치 후 보고하라”는 발언은 북한이 도발할 경우 청와대나 군 수뇌부가 개입하지 않고 자동적으로 전면전 수준까지 확대될 것이라는 경고다. 4월 1일 국방부 업무보고 석상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남긴 “다른 정치적 고려를 일절 하지 말고 초전에 강력 대응해야 할 것”이라는 발언 역시 같은 맥락이다. 이쪽에서 주저할 것이라고 기대하지 말라는 으름장이다.

    이렇게 남과 북이 주고받은 말의 수위는 하루가 다르게 높아졌지만, 4월 초까지만 해도 북한이 보여준 행보가 그다지 정교하지 못했던 것 역시 사실이다. 끊임없이 ‘더 센’ 표현을 찾아 쏟아내는 흐름이 일종의 패턴처럼 굳어져 충분히 예측 가능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북한군의 실제 동향에는 특이사항이 없다는 한미 군 당국의 분석과 일상생활을 이어가는 평양 현지 분위기가 외신을 타고 전해지면서 “말만 거칠 뿐 행동에 나서지는 못할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분석이었다. 교묘하기 짝이 없는 행보로 남측을 골탕 먹였던 김정일 국방위원장 시절과는 달리, 평양 수뇌부가 일종의 매너리즘에 빠진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4월 3일 시작된 개성공단 통행제한 조치는 지금까지의 흐름과는 전혀 성격이 다르다. 먼저 북측이 이와 관련해 ‘존엄’이라는 표현을 꺼내 들었다는 사실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3월 30일 ‘조선중앙통신’은 중앙특구개발지도총국 대변인 담화를 인용해 “괴뢰역적들이 개성공업지구가 간신이 유지되는 것에 대해 나발질을 하며 우리의 존엄을 조금이라도 훼손하려 든다면 공업지구를 가차 없이 차단, 폐쇄해버리게 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나흘 뒤 조치를 사전에 예고한 말이었다.

    북한 체제 내에서 ‘존엄’이라는 말이 뜻하는 바는 흔히 생각하는 자존심과는 차원이 다르다. 물리적 능력에서 열세일 수밖에 없는 북한 체제가 상대를 이기려면 ‘충성심’과 ‘혁명정신’ 같은 정신적인 면에서 압도적 우위를 점해야 한다는 게 김일성의 만주 유격대 시기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북한 정책결정 그룹의 기본 사고방식이기 때문이다. 거꾸로 말하자면 이러한 정신적 자산이야말로 경제적 이익이나 물리력보다 더 중요한 요소이고, 이를 유지해주는 존재가 바로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지는 ‘수령’이라고 북한 공간문헌은 수십 년 세월 동안 강조해왔다. 이들에 대한 외부의 비판이나 비난, 즉 ‘최고존엄’에 대한 모독은 군사적으로 공격해오는 것보다 더 가혹하게 보복해야 할 행위라는 고유의 사고방식도 이렇게 탄생했다.

    이 때문에 평양은 자신들이 경제 지원이나 이익을 노리고 핵개발이나 군사도발에 나선 것으로 비치는 상황을 극도로 경계해왔다. 오히려 경제적 반대급부가 눈앞에 다가와 있는 협상국면에서 도발적 행동을 감행해 수포로 만들어버리는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방식을 고의적으로 과시하기도 했다. 미국의 대북 식량지원이 구체화되던 2012년 4월 광명성 3호 로켓을 발사해 대화의 장을 깬 경우가 대표적이다. 당시 ‘조선중앙통신’은 “지금 미국이 몇 푼어치의 식량 ‘지원’ 보따리를 흔들면서 우리의 우주개발 권리를 빼앗으려고 획책하지만 그것은 한갓 어리석은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중략) 미·일상전의 특등주구인 리명박 장사치들의 계산법이나 제국주의자들의 셈법으로는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것이 사회주의 우리 조국의 위력”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평양이 머리를 쓰기 시작했다

    이렇게 놓고 보면 개성공단에 대한 북측의 통행제한 조치 역시 정확히 같은 맥락임을 확인할 수 있다. 3월 초순 발간된 ‘주간동아’ 878호를 비롯해 “북측의 다음 행보는 개성공단 사실상 폐쇄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가 제기됐지만 당국자들은 “달러 창구인 개성공단을 포기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견해를 계속 쏟아냈다. 위협을 과시하는 과정에서는 경제적 이익이 사라지는 것에 개의치 않는, 최소한 그렇게 보이려 갖은 애를 쓰는 북측의 사고방식을 주목하지 못한 셈이다. 특히 이러한 분석의 상당수가 김정은 조선노동당 제1비서를 구체적으로 지목했다는 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후계 체제를 서둘러 정당화하는 과정에서 이른바 ‘최고존엄’에 대한 평양의 집착이 한층 강화됐기 때문이다.

    한 가지 주목할 것은 4월 3일 북측 조치가 매우 정교하게 설계된 결정인 듯하다는 점이다. ‘나가는 것은 막지 않겠다, 그러나 들어오지는 못한다’는 평양의 통보에 매우 복잡한 계산이 담긴 까닭이다. 개성공단의 남측 근로자들이 원하는 경우 언제든 빠져나올 수 있으므로 당장 물리적인 신변 위협을 느끼는 상황은 아니지만, 정상적인 공단 운영이 불가능해져 사실상 폐쇄 위험에 직면한 입주 기업들로서는 조속한 시일 내에 관계개선 돌파구가 마련되기를 우리 정부 측에 요구하고 나설 수밖에 없다. 최소한의 조치로 남측의 처지를 극히 곤란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당장 우리 측 근로자들이 서울로 돌아올 수 없게 차단했다면 직접적인 충돌이 불가피했겠지만, 현 상황에서 정부가 택할 수 있는 카드는 정상화를 촉구하는 성명 발표 정도다. 반면 곧바로 ‘인질화 시나리오’를 떠올리는 국민이 몸으로 느끼는 심리적 충격은 핵전쟁 위협이 반복되던 그간의 분위기보다 훨씬 수위가 높다. 사실상 공단을 폐쇄하면서도 부담은 고스란히 남측에 전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는 분명 3차 핵실험 이후 매너리즘에 가까워 보였던 강경 일변도의 행동 패턴과는 차원이 다른 ‘회심의 한 수’이고, 평양 정책결정 그룹의 오랜 계산 끝에 나온 결과물이다. 굳이 따지자면 북한이 막가파식 대응에서 벗어나 ‘머리를 쓰기’ 시작했다는 점을 긍정적 측면으로 들 수 있을 것이다. 파국을 피할 수 없는 군사도발을 섣불리 감행하는 등 비이성적인 극단 행동을 벌일 것이라는 불안감은 일단 한결 줄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북측이 명확한 목표와 계산을 바탕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남측으로서는 매우 골치 아픈 상황이 왔음을 뜻한다. 턱없는 말을 쏟아내며 협박만을 가하던 상대가 갑자기 까다로운 심리전을 펼치기 시작했다고나 할까. 평양이 머리를 쓰기 시작한 만큼 서울도 차원이 다른 고민과 한층 복잡한 수 싸움에 몰리게 됐다. 출범 40여 일, 박근혜 정부의 외교·안보 참모들은 이제야 본격적인 시험대에 오른 셈이다. 게임의 막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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