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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 성폭력 사회 01

낯 뜨거운 ‘性희롱 한국’

교수, 의원, 차관 등 연이은 사건 사회적 논의 필요

  •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낯 뜨거운 ‘性희롱 한국’

“우리가 원하는 건 학교 이미지 실추가 아닙니다. 성추행, 성희롱 없는 깨끗하고 건강한 학교에서 수업받고 공부하고 싶을 뿐입니다.”

한혜인 공주대 총여학생회장은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힘을 실었다. 꼭꼭 씹어 내놓는 단어 사이에 지난 3개월간의 말 못할 고민이 담겨 있는 듯했다. 지난해 12월 이 학교 미술교육과 여학생 2명은 교수 2명으로부터 상습 성추행, 성희롱을 당했다며 교내 성폭력상담센터에 신고했다. 가해자로 지목된 이들이 혐의를 부인하자 그동안 침묵하던 다른 학생들이 나섰다. 미술교육과 학부생 및 대학원생 중 23명이 해당 교수들에게 성추행 또는 성희롱을 당했다고 실명으로 학교에 확인서를 제출했다.

한씨 등이 참여한 대책위원회가 꾸려지고, 교내 ‘성추행 및 성폭력 고충심의위원회’(심의위)도 조사를 시작했다. 심의위가 내린 결론은 두 교수를 중징계해야 한다는 것. 그러나 공주대는 차일피일 처분을 미루고 있다. 사실관계가 명확지 않다는 이유에서다.

사회지도층의 왜곡된 성의식

그사이 새 학기가 시작됐고, 가해자로 지목된 교수는 여전히 강단에 선다. 충남지역 한 로스쿨에서는 교수가 다수 학생이 모인 장소에서 여학생을 성추행했다는 주장이 제기돼 현재 조사가 진행 중이다. 고은태 중부대 교수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성희롱 논란이 채 잦아들기도 전 전국 곳곳에서 대학교수에 의한 또 다른 성폭력 사건들이 불거지고 있는 셈이다.



고 교수는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이사장 출신으로, 2009년 한국인 최초로 국제앰네스티 집행위원회 위원을 지낸 인물. 명망 있는 인권운동가가 SNS를 이용해 20대 여성을 성희롱한 사실은 우리 지식인 사회의 성폭력 불감증을 드러내는 사례로 관심을 모았다. 사건 발생 후 ‘한겨레’ 기자 출신 작가 고종석 씨가 역시 SNS를 통해 피해 여성의 과거 트위터 글을 공개하며 ‘리버럴한 여성’이라는 등의 비난 아닌 비난을 쏟아내 파장은 더 커졌다.

1987년 말 ‘남녀고용평등법’ 제정 이후 25년이 흐르는 동안 입법 및 정책적인 면에서 우리나라의 성평등지수는 크게 높아진 것으로 평가받는다. 94년 ‘성폭력 범죄의 처벌 및 피해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 95년 ‘여성발전기본법’, 99년 ‘남녀차별금지 및 구제에 관한 법률’이 차례로 제정됐고, 2005년 호주제가 폐지됐다.

그러나 우리 사회 구성원의 성평등 의식이 규범만큼 성장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최근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을 둘러싼 성추문과 심재철 새누리당 의원의 본회의장 ‘누드’ 검색 사건 등을 통해 사회지도층의 왜곡된 성의식이 드러나면서 이 문제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2001년 제정된 ‘국가인권위원회법’은 성희롱을 ‘평등권 침해의 차별행위’로 규정한다. 이 법에 따르면 성희롱은 “업무, 고용, 그 밖의 관계에서 (중략) 직위를 이용하여 또는 업무 등과 관련하여 성적 언동 등으로 성적 굴욕감 또는 혐오감을 느끼게 하거나 성적 언동 또는 그 밖의 요구 등에 따르지 아니한다는 이유로 고용상의 불이익을 주는 것”이다. 물리적 폭력이 수반되는 성폭행과 달리 ‘성적 굴욕감 또는 혐오감’ 등 주관적 감정에 따라 판단이 달라진다.

해외 선진국 법조문도 이와 유사하다. 김태선 중앙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캐나다 노동법은 ‘성적 언동으로 혐오감, 굴욕감을 일으키는 것’을, 호주 성차별법은 ‘합리적인 사람의 관점에서 모든 사정을 고려할 때 피해자가 모욕감이나 굴욕감, 위협감을 느꼈을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는, 환영받지 않는 성적 언동을 하는 것’을, 영국 성차별법은 ‘상대방인 여성의 성을 근거로 한 언동 또는 성적인 언동으로서 상대방 여성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것’을 각각 규제한다”고 소개했다.

홍성수 숙명여대 법학과 교수는 이러한 성희롱에 대한 규제가 충분한 사회적 합의나 여론 수렴 과정 없이 이뤄졌다고 지적한다. “법을 통해 성희롱 유형을 규정하려 하면 구체적 상황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시민의 느낌과 감정을 획일적 기준에 따라 강제로 재정립해야 한다”며 “정치엘리트나 행정·사법 관료에 의해 만들어진, 위로부터 강제된 규범은 시민의 생활 세계에 뿌리내리기 힘들다”고 덧붙였다.

성희롱에 대한 명백한 의식 차이

지난해 정부에 대한 날선 비판으로 큰 인기를 모은 인터넷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나꼼수’) 멤버들이 성희롱 논란에 휩싸인 것이 한 사례다. ‘나꼼수’ 멤버들은 여성 청취자들에게 수감된 정봉주 전 의원을 위해 비키니 사진을 보내라고 했다가 성희롱적 발언이라는 지적을 받았으나 끝내 사과를 거부했다. 반면 ‘나꼼수’ 지지자를 자임했던 작가 공지영 씨는 “매우 불쾌하며 사과를 기다린다”는 의견을 밝혔다.

이처럼 인식 차이가 큰 상황에서 저명인사의 성희롱 가해 행위에 대한 지적은 때때로 ‘다른 의도를 지닌 공격’으로 왜곡되기도 한다. 2011년 부산대에서 발생한 교수의 학생 성희롱 사건에서 가해자로 지목된 교수는 “외부세력이 특정 목적을 이루려고 근거 없는 말들을 지어내고 있다”며 끝까지 혐의를 부인했다.

2000년 유명 환경단체 사무처장이 대학생을 성추행한 사건의 경우, 가해자가 기소돼 유죄판결을 받았음에도 피해자는 “시민운동에 타격을 입히려는 음모에 동원됐다”는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 이 사건 등이 계기가 돼 2001년 꾸려진 ‘운동사회 성폭력 뿌리 뽑기 100인 위원회’ 활동가들은 당시 노동조합 간부 등 진보 진영에서 널리 알려진 인사들의 성폭력 사건을 고발하며 실명을 공개했다가 각종 명예훼손 소송 대상이 됐다.

그러나 사회지도층이나 명망가의 성평등 의식은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1993년 서울대 교수를 성희롱 혐의로 고소한 이른바 ‘우 조교 사건’은 2년 후 ‘여성발전기본법’에 ‘성희롱’ 관련 규정이 만들어지는 데 원동력이 됐고, 고(故) 장자연 씨의 성상납 폭로 유서와 신정아 씨의 자전 에세이 등은 성을 둘러싼 우리나라 정·관계의 어두운 면을 개선하는 데 기여했다. 최근 성희롱을 둘러싸고 빚어지는 각종 논란이 우리 사회의 성평등 의식을 한 단계 높이는 계기가 될지 지켜볼 일이다.

낯 뜨거운 ‘性희롱 한국’




주간동아 881호 (p26~27)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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