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77

2013.03.04

난, 자발적 프리터… 꿈은 뚱뚱하다

아르바이트로 생계 이으며 여행 등 취미생활로 자아 실현

  • 이시내 인턴기자 숙명여대 국문학과 4학년 198012o8@naver.com

    입력2013-03-04 14:3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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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 자발적 프리터… 꿈은 뚱뚱하다

    그림을 그리는 박현진 씨.

    구직 한파에도 직장을 그만두거나, 취직 준비를 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프리(Free·자유)와 아르바이터(Arbeiter·‘근로자’를 뜻하는 독일어)의 합성어인 ‘프리터’는 아르바이트로 적당히 돈을 벌면서 취미생활에 몰두하는 사람을 뜻한다. ‘21세기 한량’을 자처하는 박현진(33·남), 안 제임스(31·남), 박보선(28·여), 양선주(26·여), 조민지(26·여) 씨를 만났다.

    #1 기상

    양선주 씨는 아침 6시가 돼서야 잠자리에 든다. 한 번 잠들면 오후 3시가 돼야 일어난다. 집 근처 카페에서 새벽까지 아르바이트를 하는 탓에 밤낮이 바뀌었다. “올빼미족이다. 오전에는 자느라 전화를 못 받는다.” 새벽 1시에 한 전화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양씨는 재작년 교환학생 신분으로 일본에 다녀온 후 여행광이 됐다. 9월에는 일본이나 이탈리아 등지로 워킹홀리데이(외국 젊은이에게 특별 비자를 발급해 취업자격을 주는 제도)를 떠나 30세가 될 때까지 세계 각지를 떠돌 예정이다.

    “아르바이트하면서 비행기 값을 모으고 있다. 취직도 중요하지만 여행은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을 것 같다.”



    안 제임스 씨는 3년 전 회사를 그만둔 이후 하루 7시간씩 잔다. 회사에 다닐 때는 꿈도 못 꾸던 일상이다.

    “아침에 푹 잘 때가 가장 좋다. 전국 백수 대표라는 농담도 듣지만, 직장에 다닐 때는 모범 사원이었다. 28세에 팀장이 될 만큼 능력도 있었다.”

    안씨는 영화사에서 일했던 3년 동안을 “누군가가 만들어놓은 길 위를 걷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고 회상했다.

    “회사는 승진만을 바라보는 곳이다. 그게 끝없는 레이스처럼 느껴졌다. 오르고 올랐는데도 또 오를 곳이 있는 거다. 그렇게 꼭대기만 바라보다 내 인생이 끝날 것 같았다. 그것은 회사를 위한 시간이지, 나를 위한 시간은 아니지 않나. 지금은 내 목소리로 내 삶을 사는 느낌이다.”

    #2 아르바이트

    광주 소태동 ‘대안공간RGA’에서 그림을 그리는 박현진 씨는 아르바이트 경력 10년차다. 과외, 편의점, 휴대전화 대리점 등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아르바이트가 없다. 지금은 전남대에서 청소년을 대상으로 철학 강의를 하지만, 계절이 바뀔 때마다 하는 아르바이트나 다름없다. 아르바이트로 번 돈은 그림을 그리는 데 쓴다. 얼마 전에는 대안공간RGA에서 함께 활동하는 동료들과 ‘대인시장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도 했다. 시장 상인들 손을 그리는 작업이었다. 갤러리에 그림 몇 점을 전시할 정도로 규모도 컸다.

    “대학 다닐 때 다행히(?) 집이 일찍 망했다. 잃을 게 없으니까 두려움도 없었다.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지만 단순히 그림이 좋아서 이 길을 선택한 건 아니다. 다른 사람이 사는 것처럼 살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랬다. 좋은 대학 나와 좋은 직장에 취직해 정규직으로 살아가는 게 답은 아니다. 이런 식으로도 돈을 벌 수 있고, 살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안씨도 특이한 아르바이트 경력을 갖고 있다. 그는 아르바이트를 재미삼아 하는 호기심형 프리터다.

    “무엇이든 직접 체험해봐야 직성이 풀린다. 명절에는 백화점에서 배송 업무를 한 적도 있다. 돈을 벌려고 일한 게 아니라, 격한 노동을 해본 적이 없어서 했다. 비슷한 이유로 택시를 몰았던 적도 있다. 전공이 영문학이라서 번역 아르바이트도 한다.”

    #3 자유 시간

    프리터에서 방점은 아르바이트가 아닌, ‘프리(자유)’에 찍힌다. 2년간 B항공사에서 일한 박보선 씨는 지난해 11월 직장을 그만뒀다. 잦은 행사와 회식으로 스트레스를 받아 몸이 쇠약해졌기 때문이다.

    “행사 때마다 부서별로 댄스공연을 시킨다. 팀장이 단지 막내라는 이유로 내게 공연 준비를 맡기더라. 퇴근 이후에는 내 시간인데, 그 시간을 춤 연습하는 데 쓰라는 거다. 응급실까지 실려갈 정도로 스트레스가 컸다. 지금은 초중고 학생을 대상으로 과외를 한다. 월급은 회사 다닐 때와 비슷하지만, 내 시간은 2배로 늘어났다. 헬스클럽에 다니면서 체력관리도 한다. 스페인어 학원에 등록해 외국어도 배울 계획이다.”

    워킹홀리데이를 준비하는 양선주 씨도 “직장에 다니는 친구들이 월급을 많이 받아 부러울 때가 있다. 하지만 여행 갈 시간이 없어 쩔쩔매는 모습을 보면 돈은 좀 덜 벌어도 시간이 많은 내가 더 나은 것 같다”고 말했다.

    안씨는 사진을 찍거나 여행 에세이를 쓴다.

    “회사를 그만두고 여행을 많이 다녔다. 한 달 전에는 사진 작업을 위해 태국, 라오스 등지를 다녀왔다. 이를 바탕으로 여행 에세이를 쓴다. 학창시절부터 내가 쓴 책 한 권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직업은 없지만 시간은 있으니까 내가 하고 싶은 걸 다 해볼 생각이다.”

    #4 꿈

    난, 자발적 프리터… 꿈은 뚱뚱하다

    드라마 작가를 꿈꾸는 조민지 씨(왼쪽), 여행 에세이를 쓰는 안 제임스 씨.

    프리터라도 꿈은 있다. 아니, 프리터이기 때문에 품을 수 있는 꿈이 있다. 박현진 씨는 “어떤 회사에 들어가야겠다는 꿈은 없지만, 어떤 삶을 살아야겠다는 꿈은 있다. 그림이든 음악이든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먹고살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취업한 지 8년 된 대학 동기가 있다. 술 먹고 전화해 울면서 ‘왜 사는지 모르겠다’고 한다. 하지만 매번 결론은 ‘내일 출근해야 하니까, 그냥 잊겠다’이다. 회사에서 벗어난 삶을 상상할 수 없는 거다. 다른 방식의 삶도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좋겠다.”

    대학교 과사무실에서 아르바이트하며 틈틈이 글을 쓰는 조민지 씨도 취직 때문에 불안했던 시절이 있다.

    “대학 4학년 때까지만 해도 여군에 입대하는 게 목표였다. 다행히 졸업을 앞두고 부사관 시험에 합격했다. 그런데 졸업 요건인 토익 850점을 못 채워 합격이 취소됐다. 시험을 보려면 다시 1년을 기다려야 했다. 한심했다. 하지만 지금 와 돌아보니, 그 1년이 나 자신이 진짜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되돌아보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조씨는 시험을 준비하는 대신 방송사 조연출 일을 하면서 “드라마 작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면서도 “그렇다고 작가 준비생이라고 불리고 싶진 않다”고 덧붙였다.

    “드라마는 내 글을 대중에게 전달하는 하나의 플랫폼일 뿐이다. 지금처럼 인터넷에 글을 올리면서 독자들과 소통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행복하다. ‘이번에는 어떤 글을 써볼까’라는 생각으로 하루를 보낸다. 무엇이 되는 것보다 무엇을 하느냐가 나에겐 더 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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