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73

2013.01.28

비진도에서 만나는 우윳빛 꽃송이

팔손이

  • 이유미 국립수목원 산림생물조사과장 ymlee99@forest.go.kr

    입력2013-01-28 09: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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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진도에서 만나는 우윳빛 꽃송이
    올 초 문득 팔손이가 꽃을 잘 피웠을지 염려됐습니다. 겨울이 다가설 즈음부터 우리나라 가장 남쪽 끝에서 우윳빛 꽃송이를 한껏 피워, 보는 이 마음까지 환하게 만들어주는 꽃이 바로 팔손이인데, 올핸 남쪽에서도 한파가 계속돼 걱정이 앞서네요. 사실 땅도 얼고 물도 어는 겨울에 몸체 가득 수분을 담은 식물이 땅을 뚫고 올라와 꽃을 피우길 원한다는 것 자체가 잘못입니다. 그래도 남쪽 따뜻한 곳이긴 하지만 겨울철 꽃 구경을 가능하게 해주는 꽃이 팔손이지요.

    팔손이는 풍모가 워낙 이국적인 데다, 제주나 남쪽 섬에서는 해변가에서 자라지만 중부지방에선 대부분 분에 넣어 실내에서 키우는 식물입니다. 그래서 외국에서 들여온 수많은 관엽식물 가운데 하나려니 생각하는 분이 많지만, 실은 이 땅에서 절로 나고 자라는 우리 자생식물이랍니다. 팔손이 자생지는 경남 통영에서 배를 타고 다시 한참을 가다 보면 나오는 한산면 비진도입니다. 이 섬에는 크게는 4m까지 자라는 팔손이 자생지가 있는데, 천연기념물 제63호로 지정, 보호하고 있지요. 물론 인근 다른 섬에서도 팔손이를 볼 수 있지만 태풍 피해를 입기도 하고 사람들이 마구 캐어 내다 판 탓에 천연 자생지가 많이 줄었답니다.

    이렇게 귀하디 귀한 팔손이를 그래도 남쪽지방 정원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건 1970년대 이순신 장군 전승지를 꾸미면서 함께 했던 이식사업이 성공한 덕분이라고 합니다. 어찌 됐든 아주 먼 섬까지 찾아가지 않아도 겨울이면 풍성한 우윳빛으로 꽃을 피우는 팔손이를 만날 수 있게 된 것은 반가운 일이지요.

    씩씩하고 무성하게 자라서 언뜻 풀처럼 보이지만 사실 팔손이는 두릅나뭇과에 속하는 작은 키 나무입니다. 그것도 언제나 푸른 상록수지요. 어린아이 팔뚝 길이만한 잎이 8갈래로 갈라진 모양새 때문에 팔손이란 이름이 붙었다지만, 7개짜리 잎도 있고 9개짜리 잎도 있습니다. 겨울철에는 잎이 아래로 처지는데, 꽃을 더 돋보이게 하려는 잎의 배려일까요.

    팔손이에게는 엉뚱하게도 인도 공주와 얽힌 이야기가 전해 내려옵니다. 옛날 인도에 바스라라는 아름다운 공주가 살았는데, 어머니에게서 받은 예쁜 반지 2개를 소중히 여겼습니다. 어느 날 공주 방을 청소하던 한 시녀가 반지들을 보고 호기심에 양손 엄지손가락에 하나씩 껴봤지요. 그런데 아무리 해도 뺄 수가 없자, 큰 벌을 받을까 두려워 다른 반지를 덧씌워 감춰버렸습니다. 상심한 공주를 위해 궁궐의 모든 이가 손을 내밀고 검사를 받게 됐고, 시녀는 엄지손가락 두 개를 감췄지요. 바로 그 순간 하늘에서 뇌성벽력이 떨어지면서 시녀는 한 그루 나무로 변했는데, 이 나무가 바로 팔손이라는 것입니다. 처음 이 이야기를 듣고는‘그렇다면 이 식물 이름은 팔손이 아닌 팔손가락이 돼야겠네’ 하는 실없는 생각도 해봤답니다.



    비진도에서는 팔손이를 총각나무라고 부릅니다. 마음속에 비밀을 간직한 채 잎새처럼 넓적한 얼굴로 환하게 웃는 섬 총각의 투박한 모습을 보는 듯하네요. 그래서인지 팔손이의 꽃말은 ‘비밀’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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