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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Ⅰ천영우 외교안보수석비서관

“북한이 흉기 내려놓았다면 5억~6억 달러 줄 수 있었다”

“연평도 포격 강력 응징 못한 것은 한… 위안부 문제 제기 통해 일본 테스트”

“북한이 흉기 내려놓았다면 5억~6억 달러 줄 수 있었다”

“북한이 흉기 내려놓았다면 5억~6억 달러 줄 수 있었다”

● 1952년 경남 밀양 출생
● 부산대 불어과(학사), 미국 컬럼비아대 국제학과(석사)
● 1977년 11회 외무고시 합격, 북핵 6자회담 수석대표
●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노무현 정부)
● 외교통상부 제2차관, 외교안보수석비서관(이명박 정부)

이명박 정부 후반기 외교·안보 컨트롤타워인 천영우(61·사진) 대통령실 외교안보수석비서관은 그동안 5·24 대북 제재조치, 미사일 가이드라인 개정, ‘아덴만의 여명’ 작전, G20 서울정상회의 같은 긴박하고 굵직한 외교·안보 현안을 비교적 깔끔하게 마무리했다.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 후 북한과 함께 파멸의 길로 들어서자는 동귀어진(同歸於盡) 전략 속에서 이룬 성과라 더욱 빛났다.

그는 그동안 자랑할 법도 했지만 “나는 그림자”라며 말문을 닫았다. 입은 있어도 말은 없었다. 어지간해서는 자신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1월 16일 오후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실에서 만난 천 수석은 그동안의 인터뷰 거절이 미안했는지 “수석은 (대통령의) 그림자이니 이해해달라”며 웃었다.

천 수석은 1977년 11회 외무고시에 합격해 35년간 공직생활을 한 외교관. 2010년 10월 외교통상부 제2차관에서 외교안보수석비서관에 임명됐다. 그는 공직생활 중 가장 보람 있는 일로 ‘아덴만의 여명’ 작전과 미사일 가이드라인 개정 협상을 꼽았다. 이야기는 아덴만으로 흘렀다.

▼ ‘아덴만의 여명’ 작전은 쉽지 않은 선택이었는데요.

“인명이 걸린 일을 결정하는 것은 굉장히 어렵습니다. 사람 생명이 걸린 결정을 함부로 할 수 없죠. 참 고심을 많이 했습니다. 우리는 무역에 의존하는 나라이고, 연간 수백 척 넘는 우리 상선이 아덴만을 지납니다. 해양수송로를 보호하지 못하면 무역국가로서 큰 타격을 받아요. 청해부대를 아덴만까지 보낸 것도 그 때문이죠.”



▼ 삼호주얼리호 이전에는 석방금을 주고 풀려났죠.

“계속 돈을 줄 수는 없잖아요. 그렇게 되면 청해부대 파병 명분도 없고, 소말리아 해적 처지에서는 한국 배는 쉽게 납치해 비싸게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할 겁니다. 한국 배가 언제 어디를 지나간다는 정보만 제공해줘도 돈벌이가 되는 그런 세상이 될 수 있거든요.”

아덴만의 여명 작전 제안

▼ 그래서 군사작전을 하자?

“이런 걸 우리가 반드시 막아야겠다, 그래서 삼호주얼리호 납치 소식을 전해 듣고는 관계부처 대책회의를 소집했어요. 제가 ‘군사작전을 하자’는 결론을 내렸고요.”

▼ 실패했을 경우 책임지겠다는 뜻이었군요.

“맞아요. 누구도 먼저 ‘군사작전을 하자’는 이야기를 못 해요. 책임을 져야 했으니까요. 제가 인명피해가 있더라도 하자고 했어요. ‘이의가 있으면 말하라’고 했는데 아무도 하지 않았어요. 한편으로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국방부에 ‘인명 손실이 나더라도 작전을 한 이유’를 국민이 납득할 수 있도록 자료를 만들라고 지시했죠.”

▼ 작전 당일 밤을 새웠나요.

“북한이 흉기 내려놓았다면 5억~6억 달러 줄 수 있었다”

2010년 11월 23일 북한군 포격으로 화염에 휩싸인 주택.

“나는 잘 잤어요. 작전 30분 전 대통령께 보고를 드렸는데, 대통령께서는 걱정돼 밤새 못 주무셨다더군요. 인명피해가 날까 걱정을 많이 하셨어요. 군이 잘해내리라는 믿음도 있었고요.”

아덴만의 여명 작전은 2011년 1월 18일 새벽 4시 58분 청해부대원들이 소말리아 해적에게 납치된 삼호주얼리호와 선원들을 구출한 작전이다. 석해균 선장이 부상했지만 선원 전원을 무사히 구출해 국민에게 큰 자긍심을 준 사건이기도 하다. 기자는 당시 이 작전을 취재하면서 그가 최초로 이 작전을 제안했음을 알았지만, 천 수석은 기자의 확인 요청에 입을 굳게 다물었다. 당시 또 다른 청와대 관계자는 기자에게 “자칫 작전이 실패하면 광우병 촛불시위에 이어 또다시 촛불집회가 일어날지 모를 일이었다. 촛불집회 트라우마가 있는 우리(이명박 정부)로서는 엄청난 부담이었는데, 천 수석이 태연히 군사작전을 하자고 말해 짐짓 놀랐다”고 말한 바 있다.

▼ 미사일 가이드라인 협정은 어땠나요.

“1990년 미사일 가이드라인은 사거리가 180km였어요. 그걸 1995년부터 2001년까지 9차례 협의해 300km로, 2012년 10월 800km로 다시 늘인 거죠.”

▼ 미국 태도는 어땠나요.

“미국은 처음에는 개정을 안 하려고 했어요. 2011년 8월에 토머스 도닐런 국가안보보좌관을 만나 개정이 필요하다고 3시간 동안 이야기했죠. 그걸 듣고 미국 측에서 개정 필요성을 이해했어요. 그래서 이명박 대통령이 그해 가을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했을 때도 개정 중요성을 말씀하셨죠.”

▼ 왜 800km였나요.

“사실 미국은 ‘500km면 북한에 있는 모든 군사기지를 타격 가능하다’는 견해였는데, 우리가 800km를 요구하니까 ‘군사적으로 필요 없는데 왜 그러느냐’고 묻더군요. 그 말은 맞아요. 부산에서 북한 나진까지 대략 800km쯤 됩니다. 우리가 미사일 기지를 부산이나 여수에 배치할 이유는 없지만, 남한 전역에서 북한 군사기지를 타격할 수 있다는 ‘정치적 상징성’이 중요하다고 강조했어요. 800km면요, 강릉에서 쏘면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북쪽 150km까지 날아갑니다. 북한 외의 나라를 공격할 능력을 달라는 건데, 그럼 당연히 인접국은 위협으로 느끼겠죠. 그런데 1000km를 요구하면 설득력도 없고 다른 의도만 부각돼요.”

▼ 당시 북한은 “진짜 전쟁 맛을 보여주겠다”며 한미 양국을 비난했는데, 대북정책은 어떻게 평가합니까.

“대북정책이 잘못됐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견해에는 대체로 동의하지 않습니다.”

▼ 오히려 대북 억지력과 협상력을 키웠다는 뜻인가요.

“참여정부에서 북한에 준 현금과 현물을 다 합치면 45억 달러 정도 됩니다. 북한 1년 예산이 56억 달러 수준이에요. 북한 1년 예산을 지원해준 셈인데, 그렇다고 도발을 안 했느냐? 수시로 했죠. 한반도 평화를 위협할 ‘흉기’인 핵무기·미사일을 만들 여력을 키워준 거거든요. 사실 마음 편하게 산 것 같지만, 내일의 평화를 희생하고 그걸 가불해서 산 환상으로 살아온 거죠. 굴욕적 평화예요. 그걸 맞추려고 쌀, 비료, 돈을 가져다주고…. 그걸 바로잡아야 된다는 겁니다. 우리가 지원하면 북한도 내놓는 게 있어야죠. 하다못해 ‘흉기’라도 덜 만든다든지. 쌀 주면서 우리를 괴롭히지 말라는 게 협상입니까.”

베수비오 화산 폭발이 이랬을까. 대북정책에 대해서는 거침없다. ‘그림자’도 ‘그동안 하고 싶은 말이 참 많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1월 3일자 일부 신문에는 정부 고위관계자 말을 인용해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우리 정부가 북한 경제 지원 요구를 들어주지 않자 북한이 이에 항의하는 차원에서 2010년 3월 천안함 폭침과 2010년 11월 연평도 포격 도발을 했다. 이명박 정부는 남북 정상회담을 수차례 시도했지만 북한이 요구한 대가를 거부하자, 북한이 천안함을 폭침하고 연평도를 포격 도발했다는 것이다.”

▼ 이 보도는 어떻게 나온 겁니까.

“‘정상회담도 못하고 남북관계만 얼어붙었다’며 현 정부의 대북정책 실패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어 그동안의 과정을 설명한 겁니다. 이명박 정부는 정상회담을 안 하려고 한 게 아니라, 북한이 제시한 조건이 너무 어처구니없어 안 한 거죠. ‘안 하는 것보다 나은’ 정상회담을 할 수 없었으니까요. 그 연장선상에서 천안함 폭침이 일어났다고 설명했고요. 정상회담 불발과 천안함 폭침 간 인과관계를 이야기한 건 아닙니다. 그건 아무도 알 수 없죠.”

사거리 800km는 정치적 상징성

▼ 2009년 10월 임태희 당시 노동부 장관과 김양건 북측 통일전선부장이 싱가포르에서 만났을 때 북한이 요구한 게 식량과 비료 지원이었나요?

“그런 요구는 꾸준했어요. 나는 (정상회담 대가로) 5억, 6억 달러 드는 건 문제가 아니라고 봐요.”

▼ 임태희 전 대통령실장은 최근 라디오에 출연해 ‘돈 이야기는 없었다’고 주장했는데요.

“글쎄요. 접촉 당시 임 전 실장에게 이야기한 게 다는 아니었고요. 외교라인을 통해 저쪽(북한)이 요구한 것을 들었어요. 중요한 점은 북한도 내놓는 게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흉기’ 일부라도 내놓겠다든지, 우리를 해칠 능력을 키우는 데 사용하지 않겠다든지, 뭐 그런 약속이라도 있어야죠. 이런 확신 없이 정상회담을 하는 것은 북한 핵능력을 강화하는 결과만 초래할 뿐이었어요. 우리가 구걸하듯 (정상회담을) 해야 합니까.”

▼ 그럴 수는 없다?

“평화라는 게 상호신뢰를 바탕으로 상생 공영하겠다는 진정성이 있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사실 ‘햇볕 금단현상’도 바로잡아야 하고요. 남북관계가 불편하더라도 북한의 앵벌이나 갈취 버릇은 고쳐야 합니다.”

그는 천안함 폭침 사건이 정상회담 불발에 대한 불만 때문인지, 싱가포르 접촉 이후 발생한 대청해전(2009년 11월 북한 경비정이 북방한계선을 침범해 발생한 군사 충돌) 보복 차원인지, 김정일 건강 악화로 인한 내부 불안 때문인지 단정할 수 없다고 정리했다.

▼ 정상회담 카드는 선거용, 정국 전환용으로 꽤 유혹적이었을 텐데요.

“물론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남북 정상회담을 안 하는 정부는 대북정책에서 실패했다는 비난을 받을 거고, 그러한 상황에서 선거를 치르면 필패(必敗)라고 주장한 여당 사람도 많았죠. 제 방에 찾아와 총선에서 지면, 정권재창출을 못하면 무슨 소용이냐는 분도 있었어요. 그래도 정상회담을 국내 정치적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반대합니다.”

▼ 2010년 10월 수석에 임명되자마자 연평도 포격이 있었는데요. 당시 포격 직전 특이 징후는 없었나요.

“우리가 사격훈련을 할 때마다 북한은 항상 협박했고 군사적 움직임도 있었어요. 60년 동안 그런 협박을 했지만 실제 행동한 적이 없다 보니 (우리 군이) 방심한 거죠. 그게 잘못이었어요.”

회의 멤버 아닌 사람 때문에 혼선

연평도 포격 사건은 2010년 11월 23일 북한군이 대연평도를 향해 포격을 가한 사건이다. 해병대원 2명과 민간인 2명이 사망했고, 20여 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대한민국 영토를 직접 타격해 민간인이 사망한 것은 6·25전쟁 이후 처음이었다. 천 수석에게도 호된 신고식이었다.

▼ 당시 ‘MB(이명박) 확전자제 발언’ 같은 확인되지 않은 말이 터져 나와 혼란스러웠는데요.

“거, 참.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소집할 때는 거기 참석하는 사람이 정해져 있어요. 그런데 참석할 사람도 아닌 사람들이 각종 회의에 우르르 같이 들어왔고 멤버 아닌 사람이, 나서지 않을 사람이 나서서 책임지지 못할 이야기를 해 혼선이 빚어진 겁니다.”

NSC는 대통령, 국무총리, 통일부 장관, 외교통상부 장관, 국방부 장관, 국가정보원장 등과 대통령비서실장 및 대통령이 임명하는 위원으로 멤버가 한정된다. 당시 외교·안보장관회의 등도 잇따라 열렸다.

▼ 좀 더 구체적으로….

“‘멤버 아닌 사람은 다 나가라’고 할 수도 없었어요. 특보나 경호처장, 이런 사람에게 ‘나가라’고 할 수 없었죠. 자주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 다 들어오다 보니, 그 안에서 결정된 내용만 나가야 되는데 나서지 말아야 할 사람이 나섰어요.”

포격 사건 후 김희정 대변인을 통해 전해진 이 대통령의 첫 반응은 ‘확전자제’였다. 여론이 들끓었다. 얼마 뒤 이 발언은 정정됐고, 이후 “막대한 응징을 해야 한다”로 바뀌었다. 이를 놓고 김인종 당시 경호처장이 김병기 청와대 국방비서관에게 ‘확전자제’ 메시지를 전했고, 이를 김 대변인이 대통령 뜻으로 발표했다 정정했다는 지적이 나왔다. 그는 이를 말하는 것이다.

▼ 김인종 전 경호처장이 확전자제 메시지를 전달했나요.

“특정인 이야기는 않겠습니다. 정식 의사결정 과정을 거치지 않고 알려지는 걸 막지 못한 건 잘못이죠.”

“북한이 흉기 내려놓았다면 5억~6억 달러 줄 수 있었다”

2010년 5월 천안함 폭침과 관련해 유엔사 특별감사단 일행이 증거물을 살피고 있다.

▼ 확전자제 발언은 들었습니까.

“나는 듣지 못했어요. 대통령은 그런 말을 하시지 않았고요. 그날 저녁 합참에 갔을 때도 북한의 연평도 포격은 법 위반 어쩌고 하기에 ‘군이 공격받으면 반격하는 게 먼저지 법률가 같은 이야기를 한다’며 대통령이 격분했어요. 군복 입은 분들이 교전규칙에 노예가 돼 있는 상황에 분개했죠. 사실 그때는 우리가 (연평도 포격에 대해) 자위권 차원에서 강력하게 응징해야 했는데…. 후회스럽습니다.”

▼ 외교는 어땠나요. 한미관계는 이견이 없는 듯한데요.

“나는 이렇게 봐요. 우리가 강대국에 둘러싸인 약소국인데, 이런 나라는 독립과 주권을 유지하고 나라를 온전히 지키는 게 중요합니다. 그걸 우리는 세계 최강대국에게 생명보험을 들어놓은 것이거든요. 60년 동안 전쟁이 없었다고 그 보험료를 아깝게 생각해선 안 됩니다. 동맹을 당연시 생각해서도 안 돼요. 동맹에도 공을 들여야 합니다. 동맹관계라고 해도 어려운 일이 있으면 위로도 하고 술도 사야죠. 보험금 탈 일을 만들지 않으면서 주변국과 잘 지내는 게 중요해요.”

MB 독도 방문은 자연보호 콘셉트

▼ 일본과는 소원해진 것 아닌가요.

“그 이야기도 대통령이 들으면 억울해할 겁니다. ‘속까지 친일이다’ ‘일본에서 태어났으니까 친일’이라는 소리를 들었는데, 일본군 위안부 문제로 일본을 압박했다고 한일관계 책임지라고 하면 억울하죠.”

▼ 일본군 위안부 문제 제기는 전략적이었습니까(이 대통령은 2011년 11월 18일 교토 영빈관에서 열린 노다 요시히코 일본 총리와의 정상회담에서 양국관계의 ‘암초’인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우리는 한일 자유무역협정(FTA)도 해야 하고, 안보 분야 협력도 해야 하며, 또 군수지원 협정 같은 것도 다 하려고 마음먹었어요. 양국 관계를 본질적으로 업그레이드하는 거죠. 그럼 앞길을 가로막는 족쇄 가운데 하나 정도는 해결해야 한다고 봤고요. 폭넓은 한일관계를 위해 일본을 테스트한 겁니다. 일본은 통과하지 못했어요.”

▼ 테스트를 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돌아가시면 어떻게 할 겁니까. 평생 그 한을 풀어드리지도 못하고 한일관계도 발목 잡힐 거예요. 일본이 반발하면서 FTA도 통과 못 하고, 안보는 말도 못 꺼냈어요. 제대로 된 한일관계를 만드는 과정인데 일본이 협조를 안 해서 그런 거죠.”

▼ 일본이 테스트에 불합격해 2012년 8월 독도를 전격 방문했나요.

“그건 별개 문제였어요. 우리 섬이 3000여 개 있는데 독도는 그중 우리 국민에게는 특별한 의미가 있잖아요. 그런데 그때는 우리 영토라는 사실을 알리려고 간 게 아니고, ‘자연보호 콘셉트’로 간 겁니다. 독도는 천연기념물이잖아요. 이 대통령이 독도에 방파제를 지으려는 것도 막았어요. (방파제 건설로) 관광객이 더 많이 들어와 천연기념물을 망쳐서는 안 된다는 뜻이었죠.”

▼ 퇴임 후 계획은 세웠나요.

“글쎄요. 외교담론 시장에 논객으로 자주 나서서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주간동아 2013.01.21 872호 (p44~47)

  • 배수강 기자 bs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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