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71

2013.01.14

한겨울 눈 속 초록의 예쁜 잎

노루발

  • 이유미 국립수목원 산림생물조사과장 ymlee99@forest.go.kr

    입력2013-01-14 09:2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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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겨울 눈 속 초록의 예쁜 잎
    참 추운 겨울입니다. 눈도 많이 내리고요. 한동안은 눈이 내리는 족족 녹더니, 이번엔 오래도록 대지를 덮고 있습니다. 숲에 속속들이 내려앉은 눈도 여전히 그대로입니다. 차가운 겨울 숲 기운을 온몸으로 느끼며 걷노라니 움츠러든 몸이 조금씩 훈훈해집니다. 무엇보다 이런저런 생각과 욕심, 회한으로 탁해졌던 마음이 깨끗해지고 정신도 맑아지는 듯해서 좋습니다.

    온 숲 바닥, 나무 사이사이에 순백의 눈이 때 묻지 않은 채 그대로입니다. 이를 배경 삼아 이리저리 뻗어 내린 회갈색 나뭇가지들의 조화가 참으로 그윽하고도 애잔합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겨울 숲 풍광입니다.

    이런 숲에선 생명의 느낌을 얻기가 쉽지 않습니다. 간혹 산짐승의 발자국을 보기도 하지만 그것도 흔적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문득 숲 바닥에 동글동글 살아 있는 초록 잎새들이 선명하게 눈에 박혀옵니다. 겨울 숲에서 작은 풀 한 포기는 점처럼 자라지만 그래도 생명으로 다가옵니다. 바로 노루발입니다. 노루 발자국은 눈 속에서 실체를 느낄 수 없지만, 노루발이라는 이름의 이 풀은 초록으로 생생하게 전달됩니다.

    노루발은 노루발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풀이자 중부지방에선 흔치 않은 상록 풀입니다. 물론 한여름의 생기로 반짝이는 초록빛은 많이 퇴색했지만 한겨울에 이게 어딥니까. 콩팥 모양의 동글동글한 잎 여러 장이 한 포기를 만들며 이 산 저 산 어딘가에서 푸르게 살아 있으니 말입니다. 더러는 꽃이 달렸던 꽃대 그대로 열매가 익었다가 씨앗마저 터뜨려 내보내고, 남은 갈색의 대와 열매 껍질이 지난 계절의 흔적처럼 남아 있기도 합니다. 잎은 잎맥이 발달한 부분의 색깔이 연해 마치 무늬가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지요.

    흔적만 남은 꽃은 이미 한여름에 피었습니다. 한 뼘쯤 꽃대가 올라오고 10개 남짓한 흰꽃이 차례로 달리지요. 암술이 길게 뻗어 나온 모습은 아름답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해서 노루발의 전체적인 모습을 귀엽고 친근감 넘치게 만들어줍니다. 보통 한번 만나면 근처에서 몇 포기씩을 함께 보는데, 이는 가는 줄기들이 땅속에서 이어져 있기 때문이지요.



    쓰임새로 치면 상록의 예쁜 잎이 있으니 관상용으로 가능할 듯한데, 다소 그늘진 정원 또는 화분에 담아 키우는 용도로 적절할 것입니다. 약용식물로는 유명한 풀입니다. 이 풀에 전하는 이야기가 있는데요, 한 부인이 사냥꾼을 피해 도망쳐온 노루를 치마폭에 넣어 숨겨주었고, 이후 아파서 사경을 헤맬 때 그 노루가 물고 온 풀을 먹고 살아났다는 내용입니다. 노루발이란 이름은 노루가 가져다 놓고 가서 붙은 것이라고도 하고, 가녀린 꽃대가 노루발과 같다고 해서 그리 부른다고도 합니다. 어찌됐든 한방에선 이 풀을 녹수초(鹿壽草)라고 해서 약으로 씁니다. 생약 이름에도 노루가 목숨을 살린 사연이 담겨 있네요.

    노루발의 꽃말은 ‘소녀의 기도’라고 합니다. 고개 숙인 꽃송이들 모습과 순결한 흰빛이 그리 느껴지기도 합니다. 올 한 해 행복하시기를 바라는 마음을 부족한 글에 담아 꽃으로 대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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