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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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前 대통령 휘호 책 펴놓고 베껴

경매 앞두고 대담하게 전시, 가격 올려

  • 이동천 중국 랴오닝성 박물관 특빙연구원

    입력2012-12-24 09: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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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 前 대통령 휘호 책 펴놓고 베껴

    그림1. 추정가 8000만~9000만 원에 나온 인쇄품.

    1990년대 중반, 중국 베이징 고궁박물원(故宮博物院)에 근무하는 지인으로부터 서예작품을 위조한 인쇄품을 진짜라면서 팔려고 가져오는 사람들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당시는 황당한 얘기여서 웃어넘겼지만, 언젠가 우리도 한 번쯤 겪을 일이라고 생각했다.

    몇 년 전, 서울 인사동에서 필자는 마침내 인쇄된 그림을 진짜라고 속여 파는 고미술상을 만났다. 운치 있는 고미술품 상점에 들어가 구경하던 중 원작보다 조금 크게 인쇄된 그림을 보고 가격을 물었다. 나이가 지긋한 주인은 겸재 정선의 작품이라면서 200만 원을 불렀다. 어떻게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것 같아 “진짜냐”고 재차 물어봤다. 주인은 정말 진짜이며, 만약 가짜라면 자기가 경찰에 잡혀갈 거라고 말했다.

    2007년 서울옥션 제106회 한국 근현대 및 고미술품 경매에서 필자는 인사동에서와 같은 일을 겪었다. 추정가 8000만~9000만 원에 출품된 ‘북산 김수철, 우봉 조희룡, 대산 강진’의 ‘산수도’(그림1)는 원작이 아니라, 원작을 사진으로 찍은 인쇄품이었다. 경매 도록에는 ‘삼베에 수묵담채, 52×32cm(4폭)’라고 해놓았지만, 실상 원작은 비단에 그린 그림이었다. 사진을 찍으면서 비단이 확대돼 올이 굵은 삼베처럼 보였기에 삼베라고 속인 것이다.

    위조자는 종이에 인쇄된 것을 감안해, 그림 둘레를 비단 대신 같은 종이인 금색지로 처리했다. 이러한 처리는 이 작품이 마치 일본인 손에서 나온 듯한 느낌을 주려는 의도였다. 위조자는 작품 겉틀을 투명 아크릴로 처리해 발각되지 않도록 주의도 기울였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원작 또한 가짜라는 점이다. 이처럼 우리나라의 인쇄된 고서화작품 중에는 가짜를 진짜로 알고 만들어진 경우가 적지 않다.

    박정희 前 대통령 휘호 책 펴놓고 베껴

    그림2. 추정가 3000만~4000만 원에 나온 가짜 ‘휘호’ 작품.

    그림보다 글씨 인쇄품이 타깃



    일반적으로 그림보다는 글씨 인쇄품에서 위조자가 기술을 발휘한다. 2005년 서울옥션 제96회 한국 근현대 및 고미술품 경매에서 추정가 3000만~4000만 원에 출품된 박정희 전 대통령의 ‘휘호’(그림2)는 진짜를 영인한 인쇄품이다. 서예작품은 글씨 쓰는 속도, 필획의 겹침에 따라 먹 번짐과 농담이 다른데, 이 영인본은 농담이 변함없이 일정하다. 이 영인본에서는 위조자의 기술이 보이지 않고, ‘한국일보創刊二十周年記念’ 부분에 인쇄 과정에서 생긴 미세한 점이 많이 보였다. 누구나 전시장에서 자세히 살펴보면 의심할 부분이다. 도록만으로는 이것을 확인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반드시 현장에서 자기 눈으로 경매 전 응찰 희망물품에 대해 철저히 조사해야 한다.

    감정학은 실전 학문으로, 감정가는 반드시 미술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실력을 갖춰야 한다. 우스갯소리로 감정가는 아파도 안 된다고 한다. 항상 미술시장을 지켜봐야 한다는 뜻이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서예작품을 전문적으로 위조하는 위조자가 있다. 2002년부터 미술시장에 나온 박 전 대통령의 서예작품을 지켜본 결과 그 수준이 나날이 발전하는데, 아마도 그동안의 판매를 통해 위조자들이 나름대로 자신감을 얻은 것 같다. 한 예로 위조자가 인쇄품을 근거로 똑같이 묘사해 위조한 경우를 살펴보자.

    2009년 제114회 서울옥션 미술품 경매에서 예상가 2500만~3000만 원에 출품돼 2550만 원에 낙찰된 박 전 대통령의 ‘휘호’(그림3)는 인쇄된 작품자료를 활용해 위조한 것이다. 작품 크기는 다르게 기입됐지만, 이 작품은 2007년 서울옥션 제105회 한국 근현대 및 고미술품 경매에 추정가 4000만~6000만 원에 출품했다가 유찰했다. 2009년 제114회 경매에서는 경매도록에 이 출품작의 ‘보조설명’으로 작품 수록처를 1975년판 ‘위대한 생애’ 169쪽이라고 밝혔다. 나아가 경매 전에 하는 전시인 프리뷰에서 대담하게 출품작 옆에 ‘위대한 생애’ 169쪽을 펼쳐놓고 같이 전시했다. 참고로, ‘위대한 생애’는 민족중흥회가 ‘박정희 대통령 휘호를 중심으로’ 1989년에 발행한 책이다.

    박정희 前 대통령 휘호 책 펴놓고 베껴

    그림3. 2550만 원에 낙찰된 박정희 전 대통령의 가짜 ‘휘호’.(왼쪽) 그림4. ‘위대한 생애’에 수록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작품.(오른쪽)

    글자 간격 멋대로 치명적 실수

    2550만 원에 낙찰된 박 전 대통령의 가짜 ‘휘호’와 ‘위대한 생애’ 169쪽에 수록된 작품(그림4)이 어떻게 다른지 살펴보자. 먼저 간단하게 두 작품의 글자 크기를 같게 해서 맞춰보면 바로 알 수 있다(그림5). 위조자의 치명적 실수는 글자 사이의 상하좌우 간격이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같은 작품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다음으로 글자를 비교해보면, 박 전 대통령의 강단 있는 글씨와 다르게 위조자는 자신의 글씨 습관을 나타냈다. 특히 미묘한 차이지만 글씨 강약을 다르게 표현했다. 예를 들어, ‘年’ 자를 쓸 때 박 대통령은 글씨 중간에 위치한 두 획을 가볍게 쓴 데 반해 위조자는 힘을 줘서 썼다.

    감정은 게임보다 재미있다. 필자는 당시 전시장에서 일반인 2명에게 이 작품과 작품 옆에 펼쳐진 ‘위대한 생애’ 책에 있는 도판에서 차이점을 찾아보라고 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이렇듯 의심을 가지고 의식적으로 관찰하면 누구나 감정가가 될 수 있다.

    박정희 前 대통령 휘호 책 펴놓고 베껴

    그림5. 가짜 ‘휘호’와 ‘위대한 생애’의 글자 크기를 같게 해서 맞춰본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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