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63

2012.11.19

산책길 곳곳서 몸 흔들며 인사

수크령

  • 이유미 국립수목원 산림생물조사과장 ymlee99@forest.go.kr

    입력2012-11-19 10: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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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책길 곳곳서 몸 흔들며 인사
    먼 산자락에선 억새가 일렁입니다. 강 하구에서 바닷물을 바라보면 갈대숲이 무성합니다. 자연은 화려한 꽃송이를 가져야만 아름다운 것은 아닌 듯합니다. 식물 중에는 사람이나 곤충의 눈길을 끄는 꽃잎이 없어도, 달콤한 꿀내음이나 향기로 주위를 자극하지 않아도 바람결에 몸을 맡긴 꽃가루가 닿아 맺어진 인연에 의지해 살아가는 종류도 있습니다. 이런 꽃들은 곤충이 중매쟁이인 충매화와 달리 바람이 중매했다고 해서 풍매화라고 부릅니다.

    억새나 갈대가 그러하고, 들판에 핀 강아지풀이나 오늘 주인공인 수크령도 그러합니다. 늦은 가을에는 이런 풀들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으며 만들어내는 풍광이 마음을 더 흔들어놓습니다. 아마도 바람은 풀은 물론, 사람 마음까지도 움직이게 만드나 봅니다. 노파심에 하는 말인데, 이런 식물도 꽃을 피우느냐고 고개를 갸웃거릴 수도 있겠지만, 당연히 고등한 모든 식물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답니다. 다만 눈에 뜨이는 꽃잎이 없을 뿐이지요.

    갈대나 억새는 작심하고 길을 떠나야 만날 수 있지만, 수크령은 훨씬 가깝게 있습니다. 한강 둔치나 천변을 따라 만들어진 산책길에서, 혹은 모처럼 가을을 만나러 떠난 산행의 하산 길에서, 혹은 시골마을 가장자리 정자에 잠시 들러 농주로 피로를 풀며 느긋한 마음으로 주위를 둘러보면 만날 수 있습니다. 아무래도 가장 멋진 수크령과의 조우는 해가 질 무렵입니다. 꽃(꽃처럼 보이진 않지만)에 달린 빳빳한 털들이 석양을 받아 반짝반짝 생기가 돌면서 일렁거리는 장관을 기억하는 이들이 많을 듯합니다.

    수크령은 갈대나 억새 혹은 강아지풀처럼 볏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풀입니다. 생김새로 치면 강아지풀과 비슷하지만 키가 훨씬 크고 꽃차례도 크며 색도 진합니다. 강아지풀보다 억세 보인다 싶으면 수크령이기 십상입니다. 수크령은 키가 1m까지도 크지요. 강아지풀을 닮은 이삭은 쉽게 말해, 꽃잎이 없는 꽃들이 다닥다닥 원통형으로 달린 모습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리고 꽃가루받이가 이뤄지면 그대로 열매로 익어가는 거지요.

    수크령이란 이름은 ‘남자 그령’이란 뜻이랍니다. ‘그령’이라는 식물이 있는데, 식물학적으로 수크령과는 별개입니다. 결초보은(結草報恩)이라는 유명한 유래를 가진 그령은 암꽃과 수꽃이 있는 것이 아니라 좀 작아서 여성 같은 이미지라면, 수크령은 그령처럼 길가에 많지만 훨씬 억세고 강하다는 느낌을 줍니다. 실제로 이 풀의 이삭 생김새가 남성스러워 수크령이 됐다고 하네요.



    수크령은 생각보다 자주 보입니다. 건조한 기후에도 강하고, 옮겨 심기도 쉬우며, 아무 곳에서나 잘 자라고, 꽃이 오래 핀다는 장점을 지닌 식물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하천을 정리하면서 가장자리에 많이 심었다고 하지요. 화려하진 않아도 독특한 개성만으로 이렇게 훌륭한 장점들을 보여주는 꽃이 수크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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