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재 판결, 근로자 먼저로 바뀌나

작업환경과 백혈병

  • 남성원 법무법인 청맥 변호사

    입력2012-10-22 11: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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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재 판결, 근로자 먼저로 바뀌나

    7월 26일 삼성 백혈병·직업병 피해자들이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가졌다.

    최근 삼성이 삼성전자 반도체공장에서 일했던 백혈병 피해자들 가족에게 “대화로 문제를 해결하자”며 만남을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2007년 삼성전자 반도체공장 관련 백혈병 문제가 터진 이후 삼성과 피해자 측은 책임과 보상 문제를 둘러싸고 5년째 팽팽히 맞서왔다. 현재 산재소송이 진행 중인데, 지난해 6월 23일 서울행정법원 행정14부는 삼성전자 반도체사업부에서 근무하다 백혈병으로 숨진 황유미, 이숙영 씨 유족이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낸 유족급여 등 부지급처분 취소 소송에서 유족 손을 들어줬다. 오는 11월 1일 항소심에 대한 최종 변론이 있을 예정이다. 항소심이 진행 중이긴 하나 지난해 판결 이후 근로복지공단도 전향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산업재해보상보험법상 근로자가 근무 중 유해물질 때문에 질병에 걸려 재해를 입으면 근로복지공단에 산재청구를 하고, 회사 측에도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 문제는 근로자에게 발생한 질병과 업무와의 관련성, 즉 인과관계 입증을 누가 하느냐다. 원칙적으로는 원고인 근로자 측에 그 입증책임을 묻고 있어 이들이 승소하는 데 상당한 걸림돌로 작용했다. 그러나 위 재판부는 “고인들은 시설이 노후한 기흥사업장 3라인에서 지속적으로 유해 화학물질에 노출된 것으로 보인다”며 “각종 유해물질에 노출돼 백혈병이 발병했다고 추단(推斷·미루어 판단)할 수 있다”고 봤다. 근로자의 백혈병 발병 사실과 업무 간 인과관계를 인정한 것이다.

    작업환경에서 발생한 유해물질과 백혈병 발병 간 상관관계가 처음 사회문제로 떠오른 것은 타이어 공장 근로자들 때문이었다. 한국타이어 대전공장에서 근무하다 백혈병이 발병한 사례에 대해 대법원은 2004년 “백혈병을 유발하는 발암물질 벤젠에 지속적으로 노출됐고, 실제로는 산업안전보건연구원에서 측정한 것보다 더 많은 양의 벤젠에 노출됐다고 판단된다”며 업무상재해를 인정했다. 근로복지공단에서도 금호타이어 곡성공장에서 일한 근로자에 대해 “작업장 내에서 벤젠에 노출됐던 점, 발병 시점으로부터 잠복기가 10년 정도인 점, 다른 과거력이나 가족력이 없는 점 등으로 보아 업무 관련성이 높은 것으로 판단된다”며 산재 승인을 한 바 있다.

    작업환경과 백혈병의 인과관계에 관한 판례를 보면 “백혈병은 현대의학상 확실한 발생 원인이 밝혀지지 않은 채 다만 바이러스 감염, 방사선이나 화공약품 등 유해물질 노출 등으로 인해 발생하는 것으로 추정된다”는 점을 전제로 “업무와 질병의 인과관계는 반드시 의학적, 자연과학적으로 명백히 입증돼야만 하는 것은 아니고, 근로자의 취업 당시 건강 상태, 질병 원인, 작업장에 발병 원인물질이 있었는지 여부, 발병 원인물질이 있는 작업장에서의 근무기간 등 제반 사정을 고려해 추단되는 경우에도 입증이 된다”고 판단한다.

    근로자는 작업환경에서 발병 원인인 유해물질이 발생하고 있었던 사실, 그러한 환경에서 상당 기간 지속적으로 근무한 사실 정도만 입증하면 특별히 가족력 등 개인적인 발병인자가 없는 한 인과관계를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다.



    얼마 전 역학조사를 기초로 산재보험법 시행령에 따른 업무상 질병 인정 기준을 개선해 업무상 질병으로 인정하는 범위를 확대할 것이라는 소식도 있었다. 또 한 대통령선거 후보는 삼성반도체 공장에서 근무하다 백혈병에 걸린 환자를 찾아가 위로하기도 했다.

    삼성전자가 5년이나 계속된 갈등을 풀려고 발 벗고 나섰다는 소식은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실제로 인체에 유해한 물질이 없는 작업환경을 만들고자 하는 노력과 근로자를 염려하는 진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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