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58

2012.10.15

“손가락질 마라…합법화하면 세금 내겠다”

생계형 집창촌 여성들 “우릴 제발 내버려둬” 절규

  • 박은경 객원기자 siren52@hanmail.net

    입력2012-10-15 10: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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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가락질 마라…합법화하면 세금 내겠다”
    #1 10년째 ‘아가씨’ 생활을 하는 김모(34) 씨는 20대 중반 미아리 집창촌에 처음 발을 들였다. 생후 8개월 만에 어머니가 세상을 뜨고 할머니 손에서 자란 그는 아버지 병원비와 생활비를 혼자 떠맡아야 했다. 올해 73세인 김씨 아버지는 선천성 소아마비로 몸이 불편한 데다 오랫동안 심장병과 당뇨 합병증을 앓았고, 심근경색으로 쓰러져 수술도 여러 차례 받았다.

    불편한 몸 탓에 가족 생계를 책임질 수 없었던 아버지를 대신해 생활전선에 뛰어든 김씨가 처음 일했던 곳은 식당이다. 고되게 일하고 손에 쥐는 돈은 한 달 90만 원 남짓. 그 돈으로는 한번에 1200만 원 넘게 들어가는 아버지 수술비와 병원비를 감당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가 선택한 일이 성매매였다. “아버지를 돌아가시게 놔둘 수는 없지 않느냐”고 말하는 김씨는 지금도 시골에서 홀로 사는 아버지 생활비와 병원비를 대고 있다.

    #2 가족을 먹여 살릴 경제력도 없고 의처증으로 걸핏하면 폭력까지 휘두르는 남편을 피해 20대 중반에 어린아이를 데리고 지옥 같은 집을 뛰쳐나온 이모(37) 씨. ‘매일 맞고 사느니 이혼하자. 설마 굶어죽기야 하겠느냐’고 생각했지만 세상은 아이 딸린 이혼녀에게 녹록지 않았다. 당장 들어가 살 집도, 수중에 돈 한 푼 없던 그가 살려고 찾은 곳이 미아리 집창촌이다. 미아리 생활 10년이 넘은 그는 처음 ‘집창촌’이 어떤 곳인지도 모른 채 길거리 전단지를 보고 찾아갔다. 유리창 너머 붉은 불빛 아래 죽 늘어앉은 ‘아가씨’들을 보는 순간, 일에 대한 두려움보다 ‘못생겼다고 테이블에 안 앉혀주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이 앞설 정도로 상황이 절박했다.

    어느새 고등학생으로 훌쩍 자란 아이는 현재 친정어머니가 돌본다. 이씨는 집창촌에서 숙식하며 주 5~6일 일하고 쉬는 날 아이와 엄마를 보러 친정에 간다. 성매매 일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친정어머니가 지나가듯 무심히 내뱉은 한 마디를 그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뉴스에서 보니까 요즘 김강자 씨(당시 서울 종암경찰서장)가 단속을 심하게 하더라.” 어머니 말에 이씨는 깜짝 놀랐다. 말은 안 했지만 딸이 무슨 일을 하는지 짐작하고 있었던 것. “지금 이 나이에 내가 무슨 다른 일을 하겠느냐”는 이씨는 벌써부터 아이 대학등록금 걱정에 잠을 설친다.

    #3 예술고교를 졸업한 후 음악대학에 진학해 작곡을 공부하고 싶었던 장모(40) 씨는 ‘딴따라’를 싫어하던 아버지 반대에 못 이겨 4년제 대학 환경공학과에 진학했다. 대학생활도 잠시,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집안이 풍비박산나면서 1년 반 만에 중퇴했다. 빚 수십억 원을 안고 쓰러진 아버지 때문에 집 안 곳곳에 ‘차압딱지’가 붙고 수시로 사채업자들이 들이닥쳐 물건을 부수면서 난동을 부리는 통에 집 안은 하루가 멀다 하고 전쟁터가 됐다.



    다섯 식구가 길거리로 쫓겨나 들어간 곳은 반지하 단칸방. 그사이 부모가 이혼하고 장녀인 장씨는 졸지에 여동생 둘과 아버지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 됐다. 처음에는 평범하게 직장생활을 했지만 아버지의 엄청난 빚과 식구들 생활비를 감당할 수 없어 룸살롱으로 직장을 옮겼고, 술 마시는 게 고역이어서 다시 영등포 집창촌으로 들어갔다. 8년째 이곳에서 일하는 장씨는 그동안 아버지의 인공혈관이식 수술과 신장이식 수술비로 월 400만~500만 원을 썼다. 지금은 아버지 병원비와 생활비, 대학원에 다니는 둘째 여동생 용돈과 학비를 책임진다. “둘째가 똑똑하니까 끝까지 공부시키고 싶다”는 그의 현재 관심사는 오로지 가족과 숙소에서 함께 생활하는 강아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빨리 돈을 모아서 집창촌을 나갈까’ 하는 궁리뿐이다. 성매매 일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돼서 정신적, 육체적으로 너무 힘들어 우울증에 시달리다 자살을 기도했지만 실패했다. 이후 꾸준히 운동하고 애완견을 기르면서 우울증을 극복했다. “학창 시절 공부를 제법 잘했는데 하고 싶은 공부를 끝까지 못한 게 후회스럽다”는 그는 “언젠가 여건이 되면 꼭 다시 공부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집창촌 규모는 줄지 않아

    “손가락질 마라…합법화하면 세금 내겠다”
    성매매 특별법(이하 특별법)이 시행되면서 집창촌은 하루아침에 ‘불법집단 거주지’로 전락했고 그곳을 삶의 터전으로 삼던 사람에게도 된서리가 닥쳤다. 이후 미아리와 영등포 등 서울의 대표적 집장촌 모습은 과거와 크게 달라졌다. 가장 큰 변화는 집창촌 강제철거와 폐쇄, 잦은 단속 등으로 규모가 대폭 축소된 점이다. 미아리 집창촌은 업소 일부가 아파트 땅으로 강제 편입되면서 법 시행 전까지만 해도 400여 곳에 달하던 가게가 현재 100여 곳으로 줄었고, 아가씨들도 호황기 때 2000여 명 수준에서 4분의 1로 줄었다. 영등포의 경우 54개 업소 가운데 25개만 남아 아가씨 40여 명이 일하고 있다. 청량리와 천호동은 각각 70여 개, 50여 개 업소에 160여 명, 120여 명이 일한다.

    강현준 한터전국연합회 사무국 대표는 “겉으로 드러나는 규모는 언뜻 축소된 것 같지만 실상은 다르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청량리 지역은 철도 옆으로 도로가 나면서 13개 업소가 강제 철거됐지만 이들이 집창촌 뒤편 골목으로 숨어들어 지금도 계속 영업 중이라는 것. 영등포 지역 역시 타임스퀘어 옆 도로변에 위치한 업소 수는 줄었지만 뒤편 골목에서 40~50개 업소가 은밀히 영업 중이다. 강 대표는 “미아리를 제외하고 다른 집창촌은 뒤편으로 숨어든 업소가 많아 실제 규모는 거의 줄지 않았다”고 말했다.

    특별법이 시행된 이후 돈을 주고 성을 사는 사람도 처벌 대상이 되면서 집창촌을 찾는 손님이 확 줄었다. 미아리의 경우 손님의 80~90%가 줄었다. 김인숙(34) 한터 여종사자연맹 미아리 대표는 “특별법 이후 단속에 걸릴까 봐 골목 가로등을 다 끄고 업소도 커튼으로 가려 깜깜한 채로 영업하니까 이곳이 없어졌다고 생각하는 손님이 많다. 특별법 시행 후 성노동자들이 살기가 너무 힘들어졌다”고 말했다. 미아리 생활 13년째인 마담 이모(39) 씨는 “과거 미아리에서는 쇼를 많이 했지만 요즘은 쇼가 없어졌다. 그 대신 손님을 끌려고 ‘술방(술 마시는 곳)’에서 하는 립 서비스 등 서비스 종류가 엄청 많아져 아가씨들이 피곤해졌다”며 안타까워했다.

    손님이 줄면서 과거에 없던 호객행위가 매일 밤 집창촌의 일상 풍경이 됐다. 특히 뒷골목으로 숨어든 업소는 아가씨들이 대로변까지 진출해 손님잡기 경쟁을 벌인다. 마담 이씨는 “1990년대 중반 호황기에는 미아리가 전국구로 소문나면서 밤이면 이곳 골목뿐 아니라 큰길에서부터 사람이 줄지어 밀려들었다. 마치 개미떼처럼 새까만 머리만 보일 정도로 손님이 미어터졌다”고 회상했다. 그는 “요즘은 아예 손님이 없어 하루 매상을 공치는 업소나 일당을 못 받는 아가씨가 있을 정도다. 과거에는 상상도 못한 일”이라고 덧붙였다. 10년 전 미아리에 들어온 이모(37) 씨는 “이 일을 시작한 초창기에 ‘누나, 누나’ 하면서 드나들던 단골이 지금까지 찾아온다. 단골이 없으면 공칠 때도 있다”고 말했다.

    집창촌 아가씨들의 변화

    “손가락질 마라…합법화하면 세금 내겠다”

    서울 영등포 집창촌 여성들의 생활공간.

    집창촌을 찾는 손님이 줄고 오랫동안 경기불황이 이어지면서 집창촌에서 일하는 아가씨와 손님도 변했다. 호황기에는 돈을 따라 들어온 젊고 예쁜 20대 초·중반 아가씨가 대다수를 차지했지만 지금은 연령대가 높아졌다. 대부분 20대 중·후반에서 40대 초반까지로, 평균 30대다. 이들은 짧게는 5~6년, 길게는 10년 넘게 한곳에서 일하면서 집창촌을 ‘가족 같은 사람들과 함께 사는 일상의 터전이자 생활무대’로 여긴다.

    한편 아가씨들이 일하는 방식에도 큰 변화가 생겼다. 집창촌 하면 떠오르던 감금, 폭행, 인신매매 같은 불법이 판치고 감시와 억압, 숙소 집단생활로 대표되던 집창촌 아가씨 생활도 옛 시절 이야기로 퇴색하고 있다.

    지금은 자유의사에 따라 숙소 생활 또는 출퇴근 형식으로 근무할 수 있다. 그뿐 아니라 업소에서 정하는 기본 휴일 외에 몸이 아프거나 외출할 일이 생기면 과거처럼 벌금을 물지 않고 쉴 수 있다. 강현준 대표는 “특별법 제정을 둘러싸고 사회적 공방이 있을 때부터 우리 연합회 차원에서 전국적으로 집창촌 업소들을 관리해왔다. 집창촌에서 감금이나 폭행과 연루된 사건이 터지면 그것을 빌미로 정부가 강제 폐쇄와 단속 등 강력한 조치를 취할 수 있기 때문에 업소 차원에서 최대한 말썽이 일어나지 않도록 한 것이다. 그 때문에 아가씨들 생활에 많은 변화가 생겼는데, 그게 한 10년쯤 됐다”고 말했다.

    집창촌 아가씨들의 근무 시간과 조건이 변하면서 출퇴근뿐 아니라 주 2~3일만 일하는 경우도 있고, 대학 또는 직장에 다니거나 미용기술 등 자격증을 준비하면서 주말에만 아르바이트 형식으로 일하는 경우도 흔하다. 돈이 필요할 때마다 며칠 잠깐 나와서 일하고 그만두는 ‘철새’까지 등장했다.

    집창촌 분위기와 아가씨 생활이 변한 것 못지않게 손님들도 변했다. 영등포의 경우 지난해 겨울부터 10대 미성년자 출입이 많아졌다. 한터 여성종사자연맹 대표이자 이곳에서 일하는 장모(40) 씨는 “애들한테 민증(주민등록증)을 내놓으라고 하면 절대 안 내놓는다. 간혹 친구 가운데 생일이 빠른 성인 1명의 민증만 보여주고 들어오는 애들도 있다. 워낙 손님이 없어 돈이 절박하다 보니 어린 손님을 받는 아가씨도 있어 걱정스럽다”고 말했다. 그는 “8년 전 내가 여기 처음 왔을 때는 30~50대 손님이 많았다. ‘스타킹을 신어라’ ‘때려 달라’는 변태 손님도 많았지만 그런 사람은 팁을 후하게 줬다”고 덧붙였다.

    요즘 집창촌을 점령한 손님은 대학생이나 20대 직장인이다. 주머니가 가벼운 탓에 상대적으로 돈이 적게 드는 곳을 찾는 것이다. 경제적으로 여유 있고 가정도 있는 나이 많은 손님은 특별법 시행 이후 자칫 단속에 걸려 망신당할까 봐 몸을 사리기 때문에 집창촌에는 발길을 뚝 끊다시피 했다. ‘점잖고 돈 많은 손님’이 옮겨간 곳은 특별법 시행 이후 급속도로 확산된 유사 성매매업소다. 집창촌 아가씨들에 따르면 풀살롱이나 유리방, 키스방, 란제리방, 귀파주는방을 차려놓고 음성적으로 성매매를 하거나 오피스텔 등지로 숨어든 성매매업소가 나이든 손님을 끌어들이고 있는 것. 집창촌 단속을 피해 유사 성매매업소로 옮긴 젊은 아가씨도 많다.

    “손가락질 마라…합법화하면 세금 내겠다”

    서울 영등포 집창촌의 밤풍경.

    한편 주머니가 가벼운 젊은 손님이 집창촌을 주로 찾다보니 10명 중 8명꼴로 15~30분 남짓의 ‘숏타임’(비속어로 창녀가 화대를 받고 손님과 짧은 시간을 보내는 일)을 ‘기본’으로 즐길 뿐, 시간을 늘리고 돈을 더 내는 ‘추가’ 주문이 거의 없다. 그 때문에 업소나 아가씨들이 매상을 올리기는 쉽지 않은 반면, 과거에 없던 ‘진상손님’이 집창촌의 골칫거리가 됐다. 숏타임을 끊어서 추가 시간까지 서비스로 받은 뒤 “사정을 못했으니 환불해달라”는 손님이 아가씨들이 꼽는 최고 진상손님이다. “환불을 안 해주면 112에 신고하겠다”며 휴대전화를 꺼내들면 업소와 아가씨들은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다. 업소는 영업정지에 벌금을 물고 아가씨 역시 특별법 시행 이전에는 없던 100만 원의 벌금을 물고 ‘전과’까지 달게 되기 때문이다.

    미아리 마담 이씨는 “특별법 이후 손님들이 집창촌 종사자를 ‘봉’으로 안다. 예전에는 시간이 되면 마담이 칼같이 방에 들어가 손님을 끄집어내고, 말썽 피우면 험악한 삼촌들이 나서서 겁을 줬기 때문에 찍소리 못하고 고분고분했는데 지금은 ‘환불 상습범’까지 있는 실정”이라며 하소연했다.

    주고객은 대학생이나 20대 직장인

    “손가락질 마라…합법화하면 세금 내겠다”

    기자와 인터뷰하는 서울 영등포의 한 성매매 여성.

    집창촌 생활 2년째인 김모(34) 씨는 “술 취한 사람을 상대할 때마다 내가 왜 이 일을 하나 싶을 때가 많다. ‘적금 붓는 것만 끝나면 당장 이 일을 그만둬야지’ 하지만 돈이 좀 모일 만하면 아버지가 아파서 병원에 입원하거나 동생이 사고 쳐서 손을 벌린다. 항상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돈을 주다보니 여기까지 왔다. 가족이니 어쩔 수 없지 않느냐”고 말했다.

    한편 아픈 부모와 두 동생을 돌보기 위해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성매매에 뛰어든 김모(27) 씨는 “식구들에게 한 달 300만~400만 원이 들어간다. 부모님을 길거리에 나앉게 할 수 없으니까 장녀인 내가 돈을 벌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손님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나를 위해 유일하게 쓰는 돈이 네일아트”라는 김씨는 “막내동생이 장가갈 때까지만 이 일을 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지금까지 집창촌을 떠나지 못하고 남아 있는 아가씨들 가운데 비슷한 처지의 사람이 적지 않다. 아이를 둔 미혼모이거나 자녀를 데리고 이혼한 여성으로 육아와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경우가 많고, 부모와 형제 등 온 가족의 생계를 걸머진 여성이 대부분이다. 그래서인지 집창촌 아가씨들은 “사람마다 먹고사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도둑질 안 하고 내 몸으로 벌어서 먹고살게 우리를 가만히 내버려둬라” “왜 불법으로 묶어놓고 우리한테 손가락질하나. 누가 쌀 한 톨 우리한테 거저 준 적 있나”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한터 여종사자연맹 장 대표는 “정부는 성매매를 그만두면 월 41만 원 보조금을 주겠다, 정부보증으로 대출을 받게 해주겠다고 하는데, 아가씨 중에는 신용불량자가 많아 정부 대출보증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면서 정부 정책에 대해 답답해했다. 그는 “차라리 정부가 음성적 업소를 강력하게 단속하고 특정 지역을 정해 공창제 같은 걸 만들어 관리해주면 우리도 정부 규제에 따르면서 정당하게 세금 내고 떳떳하게 일하고 싶다”며 현실적인 대책을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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