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57

2012.10.08

맑은 차 한 잔에 송편의 품격

차례(茶禮)

  • 김대성 한국차인연합회 고문·차 칼럼니스트

    입력2012-10-08 09:30: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맑은 차 한 잔에 송편의 품격

    차를 올린 차례상.

    우리의 큰 명절 추석은 잘 쇠셨는지? 추석은 알다시피 가족·친지가 한자리에 모여 햅쌀로 빚은 송편과 햇과일로 상을 차리고 수확의 기쁨을 조상께 알리는 차례를 모시는 날이다. 그런데 정작 추석에 ‘차례(茶禮) 모신다’ 하면서도 실제는 주례(酒禮)상이 된 것이 현실이다.

    2006년 한국차인연합회 회보 ‘차인’에 박권흠 회장이 “나는 올 추석부터 명절 차례를 술 아닌 차로 모시기로 결심하고 이를 실천할 것을 선언한다. 그뿐 아니라 내가 주재하는 모든 기제사에도 술 아닌 차로 모실 것”임을 밝혀 전국 500만 차인으로부터 뜨거운 호응을 받았다.

    추석 차례상에 차가 오른 역사는 유구하다. ‘삼국유사’ 가락국기편을 보면, 삼국을 통일한 신라 문무왕이 재위에 오른 661년 “가야는 망했지만 수로왕은 나의 외가 쪽 선조이니 제례를 잇도록 하라. 세시(정월 3일과 7일, 5월 5일, 8월 8일과 15일)마다 술, 식혜, 떡, 밥, 차, 과일을 올려라”고 말했다고 한다.

    제수품은 모두 여섯 가지다. 놀라운 것은 위 제수품 가운데 차만 빠지고 과일, 떡, 밥, 술, 식혜는 1500여 년이 흐른 지금도 어김없이 올린다는 사실이다. 한 나라의 역사도 천년을 유지하기 어려운 법인데, 이쯤 되면 우리가 문화민족임을 세계에 내놓고 자랑해도 모자라지 않을 것이다.

    육당 최남선은 “다식은 차례의 제수요, 차례는 지금처럼 곡물가루로 만든 다식을 올리는 것이 아니라 본래는 점다(點茶)로써 행하였던 것이다. 찻가루를 찻잔에 넣고 차선으로 휘젓는 풍습이 차차 변하여 다른 곡물 등을 반죽하여 다식으로 만들어 제수로 쓰고 그 명칭만은 원래의 뜻을 전하는 것이다”라며, 차례에는 술을 올리는 게 아니라 원래는 차가 제사의 의례물이었음을 환기하고 있다.



    전남 광양시 칠성읍 칠성리 나주 나씨 송도공파 종가에서는 오래전부터 추석 차례상에 올리는 제수품으로 차 한 잔, 차송편, 4가지 과일이 전부다. 차례상에 차를 올리려고 종손 나상면(58·보광한의원 원장) 씨와 종부 김영순(56) 씨는 주말이면 종가에서 1시간 거리에 있는 산속 야생 차밭으로 달려가 차나무를 손질한다. 종손은 차밭에서 풀을 뽑고, 종부는 찻잎을 따서 정성껏 만든 차를 추석 차례상에 올리는 것은 물론, 종가에서 모시는 모든 제례에서도 술 대신 쓴다.

    종손은 “술을 올리면 부침개나 적을 준비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따르지만 차는 안주가 필요 없어 추석 차례상 차림 걱정을 덜 수 있어 좋다”고 말했다. 맑은 차 한 잔과 햅쌀로 빚은 송편, 그리고 햇밤과 햇대추, 감과 다식 한 그릇으로 조상을 맞이하는 추석은 격이 있어 보이지 않는가. 무엇보다 차례상에 차 한 잔을 올리면 어린아이까지 온 가족이 조상이 마시던 차를 음복할 수 있어 가족 공동체의 따뜻한 정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차례상 음식 만들기에 부담이 없다면 우리의 미풍양속인 설과 추석도 세세연연 이어갈 수 있을 것이다. 제례는 후손의 우의를 다지는 매개체로, 조상을 기리면서도 자기를 돌아보는, 그래서 형제와 후손이 화합하는 데 뜻을 둘 뿐 형식적인 제수품에 뜻이 있지 않음을 옛사람은 누누이 강조했다. 명절을 보낸 뒤 차 한 잔을 마시면서 떠올린 단상이다.



    차향만리

    댓글 0
    닫기